98화 – 하늘의 신의 망나니 자식
“앉아.”
아케이아가 빈자리를 턱짓했다.
“내가 이때쯤 올 거라는 걸 알았나?”
“너는 왜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래. 아케이아가 모르는 건 없어.”
“자, 자. 벨키오르도 오랜만에 얼굴 비쳤으니 끼워 주자!”
레몬색 머리카락에, 눈 밑에 콕 눈물점이 박힌 남자가 벨키오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 순간 벨키오르는 매서운 손길로 그것을 탁, 쳐 냈다.
분위기가 싸해지려는 찰나 푸하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손을 맞은 남자, 광륜의 드래곤 세크레온이 아픈 척을 해 대며 툴툴거렸다.
“어휴, 저 결벽증. 반려 만나서 다 나은 거 아니었어?”
“그냥 네가 만지는 게 싫은가 보지.”
“같은 수컷 주제에 손대지 말라고~”
“쟤는 암컷도 싫어해. 산체스한테 하는 거 보면 몰라?”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끌어들여? 나도 싫어!”
산체스가 술병을 탁자에 쾅 내려놓았다. 튀어 오른 붉은 액체가 그녀의 하얀 손등을 적셨다. 아케이아가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었다.
앞이 보이기는 하는지 실눈을 둥글게 휜 조화의 드래곤, 데키뉴가 분위기를 잘 다독였다.
“모처럼 모였으니 벨키오르의 반려 얘기나 해 보자. 몬텔라에게 듣기로는 인간이라며?”
“뭐?! 외부 세계 출신인 것도 모자라 인간이라고?”
“너는 어디 땅굴에 처박혀 있다 왔니?”
“한 팔백 년쯤 레어 밖으로 안 나왔으니 그 말이 맞긴 한데…….”
“이 은둔형 외톨이야, 그러다가 비늘에 이끼 끼겠다!”
인원이 많으니 한 마디씩만 해도 소란스러웠다. 벨키오르는 지끈지끈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래서 동족들과 만나기 싫었다. 안 그래도 오랜 세월을 사는 종족인데 할 말들이 어찌나 많은지 내버려 두면 해가 가도록 떠들 것이다.
그때 이학의 드래곤, 네슬리안이 은색 테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벨키오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인간이 드래곤의 반려가 될 수 있어? 흥미로운 사실인데.”
“하하하! 종족을 초월한 운명이지. 과연 벨키오르는 헤츨링 시절부터 비범하더니 그 반려마저 범상치 않군!”
몬텔라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럴수록 벨키오르의 미간 주름은 깊어져만 갔다. 아케이아만 아니었으면 이런 성가시고 시끄러운 자리,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을 것이다.
그의 그런 기색을 읽은 인내의 드래곤, 푸릴로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말투는 꽤 신랄했지만.
“어쨌든 다행이다, 벨키오르.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는 독거 드래곤 신세는 면해서. 그래서 각인은 했어?”
“그래, 각인은 했니? 지난번에 물었을 땐 안 했다며.”
“했겠지. 그토록 찾아 헤맨 반려인데 가만 내버려 뒀겠어? 냉큼 아가리에 처넣고 물고 빨았겠지.”
“…….”
벨키오르가 상스러운 말을 한 투쟁의 드래곤, 테살라를 노려보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동족들이 펄쩍 뛰었다.
“뭐?! 설마 아직이야? 왜? 너 어디 문제 있어?”
“그 질문 내가 전에 했었다고! 벨키오르, 너 솔직히 말해 봐. ……신약 필요하니? 그, 욕구가 메말랐어?”
“친우여, 내가 지난번에 분명 인간의 생은 유한하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조언했을 텐데…….”
강장제까지 들먹이는 산체스 때문에 벨키오르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안 보고 안 듣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그때 세크레온이 눈치를 보다가 슬쩍 질문했다.
“혹시 벨키오르 너…… 반려한테도 손도 못 대게 해?”
끔찍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벨키오르의 결벽스러운 성정은 동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기에 타당한 추론이었다.
나잇값 못 하는 드래곤들의 무궁한 상상력에 밀려오는 한숨을 삼키며 벨키오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다.”
“맞아, 그건 아니야. 전에 보니까 아주 땅에 발도 못 붙이게 품에 끼고 다니더라.”
“산체스 너 벨키오르의 반려를 만났어? 외부 세계 인간이라며. 어떻게?”
“와악, 나도 만날래! 벨키오르, 원래 반려 생기면 동족들한테 소개해 줘야 하는 거 알지?”
“접촉하는 데 무리가 없으면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설마 종족이 달라서 각인이 안 되나?”
“그건 아닐걸. 데키뉴의 반려가 엘프잖아. 내가 봤을 때 이건 그냥 벨키오르가 한 번도 연애를 못 해 봐서 감을 못 잡는 것 같은데…….”
동족들의 측은한 시선이 벨키오르를 향했다. 벨키오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몬텔라가 느물거리는 투로 말했다.
“친우여, 원래 진도 나가는 데에는 술이 최고라네. 용기가 필요하다면 취기를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세.”
“역시 몬텔라가 풍요의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잘 아네! 맞는 말이야.”
“그렇지! 풍요가 다산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그런데 벨키오르는 후계자가 이미 있지 않나?”
“아이는 많을수록 좋아. 귀엽잖아.”
벨키오르는 이제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이 편견 없는 드래곤들 같으니…….
그런데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대화를 끊고 가시 돋친 말이 날아왔다.
“그렇게 잘난 체하더니 백 년도 못 사는 인간 반려라니.”
벨키오르와 드래곤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들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오만상을 찌푸린 흑발의 남자가 있었다. 동토의 드래곤, 코르토브였다.
벨키오르와 코르토브의 사이를 잘 아는 드래곤들이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들은 공인된 앙숙으로, 정확히는 코르토브가 일방적으로 벨키오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열등감을 불태우는 관계였다. 벨키오르는 언제나 그렇듯 무시로 일관하고.
이번에도 역시 벨키오르는 코르토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딱히 그의 말을 모욕적으로 느끼지 않았다. 인간이 백 년도 못 사는 건 사실이었으므로.
벨키오르는 조용해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제 용건만 듣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여태 가만히 방관하고 있던 이 자리의 주최자를 불렀다.
“아케이아. 왜 오라고 한 거지?”
“모두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아케이아의 고요한 목소리는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코르토브 때문에 분위기도 망했겠다, 벨키오르의 반려에 대한 궁금증 해갈을 다음 기회로 미룬 드래곤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세계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어.”
“아케이아, 그게 무슨 말이야?”
산체스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눈을 느리게 깜빡인 아케이아가 미루는 것 없이 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용살자들이 동족들을 죽이고 있어.”
“타데아가 죽은 건 들었어. 그런데 또 있다고?”
“돌풍의 드래곤 미네아, 향락의 드래곤 유젠.”
“그러고 보니…….”
드래곤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이 자리에 모인 건 같은 세대에 태어난 드래곤들이었다.
이전 세대나 고룡은 포함되지 않았고, 또 같은 세대라고 해도 드래곤은 워낙 제멋대로인지라 자의로 빠진 줄 알았다.
설마 살해당했기 때문이었을 줄은.
“이 일을 자초한 건 하늘의 신 모아누의 서자. 그자가 인간 용살자들을 이끌고 있어.”
“반신 나부랭이가 우리를 죽일 수 있다고? 하!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설마, 모아누가 개입한 거야?”
테살라가 격분했고 네슬리안이 심각하게 물어 왔다. 아케이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신은 지상의 일에 관여할 수 없어.”
드래곤은 자연을 관장하고,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해도 인과율에 의해 탄생한 드래곤을 함부로 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일이 오로지 반쪽짜리 신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뜻이었다. 테살라가 투지를 불태웠다.
“그 빌어먹을 새끼 어디 있어? 당장 죽여 버릴 테다!”
“안 돼. 반쪽짜리라고 해도 신의 핏줄이야. 우리가 먼저 그를 해칠 수는 없어.”
그것이 섭리이자 법칙이었다. 신이 드래곤을 해할 수 없듯, 드래곤은 신에게 대적할 수 없다.
“그자가 먼저 우리에게 칼을 겨누었는데 참아야 한다고? 미쳐 버리겠네. 그럼 어떡하라고?”
“모아누는 망나니 자식 단속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아케이아, 우리가 뭘 하면 돼?”
데키뉴가 침착하게 답을 청했다. 아케이아는 준비해 둔 말을 매끄럽게 내놓았다.
“만약 그자가 찾아온다면 주의해. 그 말을 하기 위해 모이라고 했어.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먼저 덤비면 죽여도 되는 거지?”
아케이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쪽짜리 신이 앞서 법칙의 틈을 이용했으니 드래곤은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항해야 한다.
그건 섭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벨키오르가 나직하게 질문했다.
“그자의 목적이 뭐지?”
“…….”
“그래, 그 반쪽짜리는 우리를 죽여서 뭘 하려는 거야?”
아케이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하얀 눈동자가 오롯이 벨키오르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는 완전한 신이 되고 싶어 해.”
“뭐?”
“그자가 하려는 건 권능의 탈취야.”
“미친놈…….”
긴 세월을 살면서 웬만한 풍파는 모조리 겪었다고 자부하는 드래곤들이 경악했다. 드래곤이 가지고 있는 권능. 하늘의 신 모아누의 서자이자, 반쪽짜리 신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푸릴로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탄했다.
“이래서 신들의 무분별한 교합을 금지해야 한다니까? 왜 자식새끼 뒤치다꺼리를 우리가 해야 하는데.”
“아서라. 그게 막는다고 될 일이냐.”
“와, 그런데 그런 짓을 실제로 벌이다니. 말세다, 말세야.”
들을 건 다 들었다고 판단한 벨키오르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지.”
“어어, 벨키오르! 그냥 가게? 조금만 더 있다 가!”
“맞아. 분위기 잡는 데 좋은 술이 있는데 나눠 줄까?”
“가게 내버려 두게나. 반려가 보고 싶어 안달 난 모양이지.”
“아, 그런 거라면 우리가 이해해야지. 벨키오르, 다음에 올 때는 반려도 데려와!”
“각인도 얼른 해치우고!”
불쾌한 티를 풀풀 풍기며 벨키오르가 그곳을 떠났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아케이아의 시선이 코르토브에게 설핏 닿았다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