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직면
작전이 수립되자 친구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우리가 길게 팔을 그어 내 암혈을 뽑아냈다.
그가 휘두르는 검에서 검은 연꽃 봉오리가 솟아났다. 십, 이십, 삼십…… 백여 송이에 달하는 검은 연꽃이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했다.
아직 개화 전임에도 유황 냄새와 뒤섞여 진득한 꽃향기가 퍼져 나갔다. 친구들이 으, 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우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리 향기로운 꽃도 이 정도로 많으면 난잡할 뿐이었다. 게다가 독화라면.
아, 이러다가 정말 후각을 잃는 건 아니겠지? 솔이 찝찝한 표정으로 ‘암중봉연’을 준비하느라 이능색으로 눈동자가 검게 일렁이는 우리를 곁눈질했다.
“냄새 한번 독하다, 독해. 저러다 길짱 빈혈 걸리겠다.”
“힐러님 아니었으면 실려 나갔을 듯.”
“이거 우리한테는 아무런 해도 없는 거 맞지?”
“그러게 길짱한테 평소에 잘하지 그랬냐. 목숨 귀한 줄 알면…….”
“오냐, 내가 실수로 너를 죽여도 이해해라.”
“죽일 수나 있고?”
그렇게 말하는 솔과 유하도 전력을 쏟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솔이 ‘질시하는 바람’을 일으켰고, 유하가 ‘천 개의 화살’을 재장전했다.
우리의 기세가 점점 심상치 않아졌다. 그의 손짓에 검은 연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는 순간, 인찬이 스킬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으로 라바 골렘을 속박하며 외쳤다.
“지금이야!”
우리가 총알처럼 튀어 나가 히든 보스를 덮쳤다. 스킬, ‘새벽이 밝아 오는 시간’을 발동한 그는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렀다.
묵중하게 날아오는 라바 골렘의 공격도 무시한 채로 우리는 검은 이능에 휩싸여 오러를 발산했다.
우리의 검이 라바 골렘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어 깊게 베어 냈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몸이 쩌억 갈라지며 용암을 후드득 쏟아 냈다.
쿠구궁.
끄어어어!
“준비하시고, 발사!”
헬리오스의 창에서 비롯된 ‘태양신의 심판’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상흔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유하의 빛의 화살까지 가세하자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라바 골렘의 한쪽 팔이 무너져 내렸다.
그 광경은 웅대한 자연재해처럼 보였고, 그를 이룩해 낸 이들로 하여금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강렬한 성취감과 탄복을 자아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미리내가 도다리의 등에 타고 있는 은새를 불렀다.
“은새야, 네 차례야!”
“얘들아, 내 지시대로만 해!”
라바 슬라임이 액체로 된 몸을 쭉 늘려 라바 골렘의 구멍 숭숭 뚫린 몸 안으로 침입했다. 그와 동시에 플라마가 염화의 불꽃을 날렸다.
새파란 불꽃이 주변을 잠식한 독기를 태우며 폭발을 일으켰다. 검은 연꽃이 뿜어내는 독기가 맹렬해질수록 염화의 불길 역시 거세졌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라바 골렘에게 암중봉연의 독은 별 효용이 없었다. 그러나 장작으로 쓴다면 또 다르지.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 라바 슬라임은 히든 보스의 내장을 용해액으로 살뜰히 녹였고 플라마는 외부에서 불꽃으로 태웠다.
끄어어어!
끔찍한 고통 속에서 라바 골렘이 우짖었다. 거의 수세로 몰아넣었다고 은새와 친구들이 생각한 찰나, 몸부림을 치던 라바 골렘이…….
폭발했다.
쿠가가강!
불이 붙은 돌무더기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우리가 크게 다쳤고, 솔과 유하, 은새가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피하며 우리를 걱정했다.
“미리내야! 피해!”
가장 큰 돌덩이가 후위로 날아가는 걸 본 은새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미리내의 옆에는 인찬이 있었지만 저 정도 크기라면 인찬 역시 상당한 부상을 각오해야 할 터였다.
자신들 쪽으로 날아오는 돌덩이를 미리내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인찬이 이를 악문 채로 방패를 들어 올리며 고유 능력, 금강을 사용했다.
자신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미리내에게는 조금의 파편도 튀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순간에 미리내의 팔이 뻗어 와 인찬의 허리를 휘감았다.
“미, 미리내야?!”
“꽉 붙잡아, 인찬아.”
미리내는 모다온에게 전수받은 스킬,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을 활용해 몇 번이고 낙하하는 돌덩이를 피해 냈다.
폭발이 멈추고 지옥 불처럼 떨어지던 돌덩이들도 이제 더는 없었다.
상황이 잠잠해지고 난 뒤 친구들은 라바 골렘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서로의 상태를 살폈다.
“와, 진짜 죽을 뻔했다.”
솔이 과장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아까 미리내한테 바위 떨어질 때 시간이 느려지는 걸 실제로 경험했잖아. 미리내야, 그거 모다온 씨한테서 얻은 스킬이지?”
“맞아. 덕분에 나랑 인찬이는 하나도 안 다쳤어.”
“힐러 님 다치면 우리도 죽어. 모다온 씨한테 감사해야겠네. 진짜 다행이다.”
정작 걱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으윽…….”
“길짱!”
“우리야.”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우리가 휘청하고 몸을 무너뜨렸다. 유하가 빠르게 달려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우리를 부축했다.
“한우리 상태가 제일 심각하다. 대충 응급처치만 끝내고 나가서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인찬이가 미리내랑 우리 데리고 먼저 나가. 우리는 길드원들의 시신 수거해서 나갈게.”
“응. 부탁할게, 얘들아.”
인찬이 우리를 들쳐 업고 미리내와 함께 출구로 향했다.
은새는 솔과 유하를 따라가기 전, 라바 골렘이 있던 자리에서 플라마와 라바 슬라임의 흔적을 눈으로 찾았다.
“은새야?”
“으응. 잠시만.”
은새는 돌무더기를 헤쳐 플라마의 시체를 꺼냈다. 안타깝게도 라바 슬라임은 원래 액체 형태인지라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녀는 도다리의 도움으로 플라마를 반듯하게 눕혀 놓고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고마웠어. 비록 잠깐이었지만, 너희와 함께해서 좋았어.”
은새는 아공간에서 봄이가 배고플 때를 위해 준비해 놨던 꽃을 한 움큼 꺼내 플라마의 시체 위에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깐의 묵념을 했다.
솔과 유하는 그런 은새를 말없이 기다려 줬다.
이로써 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히든 던전의 공략이 종료되었다.
***
그로부터 3일 뒤, 공략 4팀의 장례식이 열렸다.
히든 던전 공략에 참가했던 도천 길드 길드장이 반죽음 상태로 나왔다는 소식은 최초 목격자들에 의해 걷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수군거렸고, 언론에서는 호기심을 갖고 이 일을 주목했다.
하지만 도천 길드 측에서 S급들의 회복을 이유로 장례식이 열리는 오늘까지 기자 회견을 미뤘기에 세간에서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사상 초유의 히든 던전 발생?! 도천 길드 선 공략팀 전멸!]
[도천 길드 길드장과 S급들 긴급 투입! 공략은 성공했지만…….]
[빈사 상태로 나온 도천 길드 길드장! 대체 히든 던전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던전 이상 현상,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많은 사상자를 낸 도천 길드의 무리한 공략 시도, 누구의 잘못인가.]
이때다 싶어 도천 길드의 명성을 깎아 내리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에 흔들릴 우리와 친구들이 아니었다.
장례식은 성대히 치러졌다.
[도천 길드 공략 4팀 합동 장례식]
도천 병원 지하에 마련된 빈소. 연락을 받고 많은 조문객이 찾아왔다.
사망자들의 유족들은 물론, 도천 길드의 소속원들, 고인의 지인들, 그 외에도 다른 길드의 사람들의 발길이 차례로 이어졌다.
그리고 장례식의 모든 과정에는 도천 길드 S급들이 함께했다. 분위기는 엄숙했으며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장례식 마지막 날. 이른 시각부터 장례식장 밖에서 기자들이 진을 치고 한우리 길드장의 발표를 기다렸다.
우리를 제외한 친구들은 소란을 우려해 길드로 돌아와 스트리밍 서비스를 보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아직 벗지 못한 이들이 길드장 사무실 소파에 흐물흐물 늘어졌다.
“잠을 못 잔 것도 아닌데 피곤하다.”
유하가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리내가 적극적으로 동감했다.
“정신적 피로지, 뭐.”
“차라리 던전 공략을 세 탕 연속으로 뛰는 게 낫겠어.”
“길드원들의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보단 말이지.”
그들의 표정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은 병원에 두고 온 우리를 걱정했다.
“한우리 걔는 괜찮나?”
“걔도 지금 제정신 아닐 것 같은데. 기자 회견에서 실수나 안 할지 모르겠다.”
“솔이 너보단 잘할 듯.”
“이게…….”
상황이 상황인지라 투닥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시작한다.”
인찬이 친구들을 집중시켰다. 화면에 우리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초췌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선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지자 그가 굳게 다문 입을 천천히 열었다.
[먼저 던전 이상 현상으로 인한 히든 던전의 발생으로 사고를 당한 공략 4팀의 팀원들과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한 발 옆으로 나온 우리가 허리를 숙였다. 카메라 플래시 소리만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저희 도천 길드가 공략한 이번 히든 던전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한 정보를 공개하겠지만, 그 전에.]
우리가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히든 던전을 맨 처음 경험한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헌터로서 엄숙히 선언합니다.]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우리의 무거운 눈빛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중계를 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향했다.
[인류는 또다시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