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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96)화 (96/190)

95화 – 라바 골렘

던전 안에 들어온 지 82시간이 지났다. 지독한 환경과, 계속된 전투로 인해 은새와 친구들은 지치고 다쳐 너절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챙겨 온 생수로 피를 씻어 내던 중 솔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나 아무래도 후각을 잃은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인찬이 눈을 끔벅였다. 쉬고 있던 다른 친구들도 쟤가 또 왜 저러나, 하고 솔을 쳐다봤다.

솔이 옆에 있던 우리를 끌어당겨 그의 목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우리가 진저리를 치며 솔을 밀어 냈다.

소름이 돋는다는 듯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이래? 미쳤어?”

“아무 냄새도 안 나. 분명 길짱의 고약한 체취가 맡아져야 하는데…….”

“너, 씨…….”

우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공략이 시작되면 수원이 가까이 있지 않은 이상 자주 씻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와 친구들은 길드가 세워진 이래 가장 많은 던전 공략에 참가했고, 서로 볼꼴 못 볼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까지 고루 보여 준 사이였다.

그런데 솔이 새삼스러운 지적을 하자 잊고 있었던 수치스러움이 솟아났다. 우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너는 냄새 안 나는 줄 알아?!”

“망했어……. 내가 후각을 잃다니. 내 완벽한 헌터의 삶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니야, 솔아. 나도 그래. 아마 다 그럴걸?”

도다리에게 건량을 나눠 주고 있던 은새가 푸스스 웃음 지었다. 배를 잡고 낄낄거리던 유하가 다정함을 가장하며 솔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런 환경이니 어쩔 수 없지. 걱정 마, 밖에 나가면 힐러님이 치유해 주실 거야.”

“정말? 미리내야, 내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길짱의 3주는 머리 안 감은 것 같은 정수리 냄새도…….”

“야, 남궁솔! 너 잠깐 나 좀 보자.”

“시러잉. 냄새 옮아.”

우리가 솔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피로를 감추기 위해 유쾌한 척 구는 친구들을 따라 실없이 웃던 은새가 도다리에게서 떨어져 다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은새야, 그 마수들한테 너무 정 주는 거 아니야?”

“응?”

던전 안에서 테이밍한 마수들을 치료해 주던 은새의 곁으로 어느새 미리내가 다가와 있었다.

중간 보스급이던 ‘플라마’와 ‘라바 슬라임’이었다. 마수들은 은새의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다가 미리내가 가까이 오자 덩치를 부풀리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런 마수들을 은새가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그래도 다쳤는데 두고 보기 그래서.”

“데리고 나갈 거 아니지?”

“응. 지금은 내 말을 따르고 있지만 스킬이 풀리면 야성을 드러낼 텐데.”

마수들에게서 손을 뗀 은새가 쓰게 웃었다. 아무리 길들였다고 해도 도다리나 집에 있을 다른 마수들처럼은 되지 않는다는 게 묘하게 착잡했다.

결국 그녀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 더 신경 쓰게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친구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라바 슬라임이 흐물흐물 몸을 무너뜨렸다가 도로 형체를 다잡는다. 플라마는 미리내를 경계하면서도 다친 상처를 부단히 핥았다.

은새는 묵묵히 마수들을 돌봤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미리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고 있으면 됐어. 나는 네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 은새야.”

“고마워.”

자신을 걱정하는 미리내의 마음이 전해져 와 은새가 부러 씩 웃었다. 모두가 제 몫을 하고 있었다. 은새 또한 우선순위를 잊지 않고 맡은바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은 유한하고, 사람인 이상 더 애정이 가는 쪽이 있기 마련이니.

‘그러니까 이 순간만이라도 얘네에게 최선을 다해야지.’

은새는 한시적 동맹을 맺은 마수들에게 아낌없이 식량을 내주었다.

“이제 모여 봐.”

잠시 뒤 길드장의 위엄을 되찾은 우리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까지와 다른 심각한 분위기.

왜 그런지 알기에 친구들도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 앞에는 히든 보스가 있어. 추정 등급 S급, 하지만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만큼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그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험할 거야. 은새가 알아 온 바로는 이 던전의 히든 보스는 라바 골렘. 3년 전에 핀란드에서 공개한 공략 영상 본 적 있지?”

“엉. 조금 까먹기는 했는데 대충 기억남.”

“나도.”

“헌터지원팀에서 용암 지대라는 거 알고 혹시 몰라서 자료 이만큼 뽑아 줬더라.”

미리내가 두 손바닥을 마주 보게 해 틈을 벌렸다. 그걸 본 친구들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이미 공략 4팀을 잃었기에 더 이상의 희생은 원치 않는다는 헌터지원팀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 다들 프로니까 긴말할 필요 없겠지. 쿨러드링크 마실 시간도 없을 테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싸워야 해. 특히 인찬아, 네 역할이 중요해.”

“알고 있어.”

라바 골렘은 공격기가 까다로웠다. 게다가 장기전으로 갈 것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에 탱커인 인찬의 역할이 중요했다.

“자, 브리핑 끝냈으면 입만 나불대지 말고 가 보자고!”

보스 에어리어에 진입하기 직전, 미리내가 친구들에게 버프 스킬을 걸어 줬다. 활력과 민첩, 체력 등이 크게 상승했다.

“온다!”

침입자를 감지한 라바 골렘이 태산처럼 거대한 몸체를 일으켰다. 하늘이 올려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

끄어어어!

“엄청 크네! 우리 길드 빌딩보다도 더 큰 듯!”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짜릿한 살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라바 골렘의 구멍이 뻥뻥 뚫린 몸에서 뜨거운 용암이 줄줄 흘러내렸고, 시퍼렇게 빛나는 안광이 일행을 적시했다.

“스타트는 내가!”

흥분이 끓어오른 솔이 가장 먼저 투포환처럼 날아가 헬리오스의 창을 휘두르며 ‘태양신의 심판’을 발동했다.

창끝에 에너지가 집중되고 라바 골렘의 머리에 직격했다.

꽈광!

끄어어어!

머리를 뒤흔드는 충격에 몸체가 조금 뒤로 밀려났으나 괜히 그 덩치가 아닌지 화만 돋운 결과를 초래했다.

맞으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매서운 주먹이 날아왔고 솔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물러났다.

“한우리!”

“알고 있어!”

우리의 검이 묵빛의 오러로 뒤덮였다. 그가 스킬, ‘베는 자의 맹세’를 발동하자 검 끝에서 오러가 갈라져 나왔다.

“일격, 압도하라.”

거세게 휘몰아친 검풍이 라바 골렘의 거체를 가르고 지나갔다. 히든 보스는 피 대신 용암을 쏟아 내며 크게 분노했다.

“이격, 유연하라.”

회피기로 날아오는 불덩이를 피한 우리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성.

묵빛의 오러가 쉬지 않고 라바 골렘의 몸에 상흔을 냈다. 그사이 유하가 스킬, ‘천 개의 화살’을 발동해 별처럼 무수히 많은 빛의 화살을 날려 보냈다.

“삼격, 섬멸하라.”

틈을 노린 묵빛의 충격파가 라바 골렘의 몸에 내리꽂혔다.

콰과과광!

자욱한 연기가 뒤덮이고,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데미지를 입힌 우리가 훌쩍 물러나 사태를 관망했다.

다음 순간,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후려쳤다.

“우리야!”

“아이고, 우리 길짱 죽네!”

반대편 벽에 처박히는 우리를 인찬이 달려가 받아 냈고, 미리내가 즉시 힐을 사용했다. 징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우리가 ‘으윽.’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뼈가 다 부서지는 줄 알았네.”

“저 덩치에 저 속도는 사기 아니야?”

“그런 상식이 통했으면 히든 보스라고 할 수 없지.”

우리가 쿨러드링크를 따서 쭈욱 들이켰다. 빈 병을 멀리 내던진 그는 검으로 몸을 지탱해 일어섰다.

끼에엑!

도다리가 피어를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새의 의지에 따라 플라마와 라바 슬라임이 라바 골렘을 향해 진격했다.

플라마의 염화의 불꽃이 히든 보스의 몸에 옮겨붙었고, 용암을 섭식한 라바 슬라임이 웨엑, 용해액을 쏟아 냈다.

라바 골렘은 왜 이것들이 자신을 공격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포효하며 마수들을 떨쳐 냈다. 상위 개체의 위압감에 하마터면 스킬이 풀릴 뻔한 걸 은새가 알아채고 이능을 끌어올려 단단히 단속했다.

솔의 ‘태양신의 심판’이 다시 한번 직격했다.

끄어어어!

“헐, 쟤 눈 좀 봐. 레이저 쏘아지겠다.”

염화의 불꽃에 휩싸인 라바 골렘이 시퍼런 안광을 번뜩였다. 그 순간, 화산이 폭발하듯 히든 보스의 전신에서 용암이 분출되었다.

“윽, 인찬아!”

“흐읍!”

인찬이 이능을 불어넣은 방패가 넓게 펼쳐지며 하늘에서 낙하하는 용암을 막아 냈다. 방패를 떠받친 팔과 다리에 울룩불룩 근육이 솟아올랐다.

비를 피하는 참새들처럼 인찬의 방패 아래로 모여든 친구들이 숨을 돌렸다. 길아연과의 훈련 이후 인찬의 방패는 전보다 훨씬 강력하고 안정적이었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아공간에서 쿨러드링크를 꺼내 마시는 그들에게 미리내가 힐을 했다.

“다들 얼마나 버틸 수 있어?”

“백 시간도 넘게 버틸 수 있어.”

솔이 허세를 부렸다. 유하가 코웃음 쳤다.

“웃기지 마, 여기서 네가 제일 문제야.”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받을 사람이 아니거든?!”

“자, 자. 싸우지 말고. 솔이가 불의 이능을 못 쓰는 거지, 다른 스킬을 못 쓰는 건 아니니까.”

“맞아!”

미리내의 시선이 라바 골렘과 대치 중인 플라마와 라바 슬라임에게 가닿았다.

“저 마수들을 이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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