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이변
“여기.”
우리가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미리내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보안용 아이템 상자를 열자, 보라색 천에 감싸인 각성석이 드러났다.
게임에서 희귀 아이템이 등장할 때 으레 연출되고는 하는 강렬한 빛이나 팡파르 같은 건 없었다.
각성석을 빤히 들여다본 솔과 인찬이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이게 각성석? 그냥 돌 아니야?”
“연구팀에서 확인했어. 진짜 각성석이야.”
“허……. 이렇게 생겼으면 봐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겠는데? 아나이스 벨은 어떻게 아이템이라는 걸 알아본 거지?”
“미국에서 발견된 건 이거보다 크더라. 뭐,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
“별이 눈썰미가 대단하네.”
한동안 신기하다며 각성석을 구경하던 그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태블릿 피시를 들여다보던 미리내가 우리에게 물었다.
“각성석이 발견됐다고 언제 발표할 거야?”
“발표해야 해?”
“그러엄. 당연한 말씀을. 도천 길드 잘나간다는 거 보여 줘야지. 골드스타가 아무리 치고 올라와도 우리한테는 안 된다는 걸 알려 줘야지.”
솔이 우리의 간식 박스를 뒤적이며 리듬 타듯 흥얼거렸다. 오, 이거. 토끼를 발견한 매처럼 눈동자를 반짝인 솔이 낱개 포장된 과자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아싸, 이 넛츠 바 맛있는데. 길짱,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되지?”
“솔이 너 남의 간식 박스 좀 그만 탐내라. 너 한 번 왔다 가면 텅텅 비어서 다 다시 사다 놔야 한다고.”
“돈도 많은 사람이 왜 이래? 쪼잔하게. 억울하면 나중에 사다 주면 될 거 아니야.”
“한 번이라도 사다 놓고 말해라. 어휴.”
상습적 간식 털이범인 솔은 말만 저렇게 하지, 여태껏 단 한 번도 우리의 간식 박스에 공헌한 적이 없었다.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차라리 정치인을 믿겠다.
우리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발표하려면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
“이 각성석이 우리 길드가 아닌 정부 소유의 던전에서 발견됐다는 거야.”
“아~ 그러면 아무래도 소유권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
“근데 그건 그냥 조작하면 되지 않나? 어차피 은새네 식구들밖에 없었잖아, 거기.”
“그게…… 우리 말고 아는 사람이 또 있어.”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은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리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던 우리를 제외한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
“골드스타 길드의 천창현 헌터.”
“천창현?”
“어디서 들어 봤더라. 아, 아. 기억났다. 그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사람. 헌터 중에 컨셉충 많은데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어.”
“은새야, 너 별이랑 마수들 데리고 휴가 간 거 아니었어? 왜 다른 사람이 있어?”
“그게……. 천창현 헌터가 은신 스킬을 써서 따라 들어왔더라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친구들이 정색을 하고 은새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음.”
은새는 간략하게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벨키오르가 낯선 이의 기척을 가장 먼저 느끼고 주의를 준 것. 정체가 드러난 천창현이 어영부영 변명하다가 도주한 일까지.
얘기가 다 끝나자 친구들이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유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수상한데.”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한우리, 너 천창현 조사하고 있지 않았어? 뭐 나온 거 없어?”
“직접 봐.”
우리가 책상으로 가 서류 파일을 하나 가져왔다. 은새와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함께 읽었다.
우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 명씩 보면 되잖아. 왜 그렇게 불편하게 봐?”
“그럼 인원수대로 준비해 주든가. 너는 애가 왜 이렇게 섬세하지를 못해?”
“내 잘못이야?”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우리와 솔이의 투닥거림에도 별 반응이 없던 은새가 의아하다는 듯 서류의 내용을 손으로 짚었다.
“김일문, 오하나, 이아람, 조인준, 진해성……. 이 사람들 다 골드스타에서 한 끗발 날리는 에이스들 아니야?”
“맞아.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천창현을 따르고 있더라고. 특히 김일문은 보기 드문 제작자잖아.”
“진해성은 스킬 사용 문제 때문에 가진 능력과 별개로 길드 내에서도 겉돌지 않았나.”
“힐러에 탱커에…… 야무지게 챙겼는데? 천창현이 A급이라고 했지? 이 정도면 공략팀을 꾸려도 되겠는데. 백찬민이 이걸 두고만 본다고?”
“안 그래도 백찬민 길드장이 천창현을 견제하는 것 같더라.”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유하가 이죽거렸다. 치사하게 알바까지 써 가며 그렇게 도천을 견제하더니 요즘 잠잠했던 이유가 내부 단속하느라 그런 거였구만.
쯧, 하고 혀를 찬 유하가 마저 서류를 읽었다.
“그런데 여기 스킬 확인이 제대로 안 된다는 건 무슨 뜻이야?”
“천창현이 평균 A급보다 잡다한 스킬을 보유한 건 알지? 그런데 얼마 전 공략 나갔을 때 체인 블래스터를 사용했다더라고.”
“검사가 체인 블래스터? 그게 뭔 궁사가 장갑차 끌고 다니는 소리야.”
천창현은 독특한 형태의 대검을 주무기로 사용했다. 그런데 검사와 하등 상관없는 체인 블래스터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고?
유하가 기막혀했다.
우리가 눈썹을 매만지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리고 행적이 좀 불분명해. 감이 좋아서 미행도 금방 눈치채고 던전 공략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서울을 자주 벗어나는 것 같아.”
우리는 박도윤의 조언에 따라 천창현에게 감시를 붙여 놨었다. 그런데 아무리 실력 좋은 헌터라도 붙이는 족족 알아채니 얻어 낼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불법 헌터들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
“그런 이력이 있는 자가 각성석이 있는 던전에 나타났다라……. 의심스럽네.”
“그렇지. 의심스럽지.”
각성석을 노리고 온 걸 확신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의혹은 남았다.
“그런데 정말 알고 왔을까? 무슨 재주로?”
“그러고 보니 골드스타 내에서 천창현한테 예지 스킬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던데.”
“와, 말이 됨? 예지 스킬이 있는데 왜 헌터를 해.”
나 같으면 국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등 따수운 곳에서 몸 편하게 살겠다. 솔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미리내의 손끝이 서류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천창현에 대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솔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아아, 됐고. 각성석 발표는 우리 길짱이랑 부길짱이 해결하도록 하고. 이제 결정의 시간이 왔다.”
결정? 뜬금없이 무슨 결정?
은새와 친구들이 왜 또 저러나, 하는 시선으로 솔을 바라봤다. 솔이 득의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행사 진행자처럼 구호를 외쳤다.
“각성석은 하나! 헌터는 여섯! 과연 누가 가져갈 것이냐.”
“으응?”
“엥?”
솔의 발언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 누가 먼저 SS등급이 돼서 길드를 대표할지 정하자고. 기왕 얻은 각성석 놀릴 생각은 아니지?”
“당연히 그렇겠지만……. 솔이 네가 왜 그런 말을 해? 누가 너 준대?”
“은새가 찾았으니까 당연히 은새 거 아니야?”
“노노. 모르는 소리. 길드에 헌납됐으니 길드 재산이지. 공평하게 해, 공평하게!”
“공평 좋아하네. 그렇게 따지면 모든 길드원들한테 기회를 줘야지.”
정신을 차린 우리와 인찬, 미리내가 솔에게 딴지를 걸었다. 어째 솔의 주도로 이상한 흐름이 되자 우리가 염려스럽게 은새를 바라봤다.
“은새야, 괜찮겠어?”
“당연하지. 누구든 먼저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걸로 하자.”
은새는 각성석을 누가 쓰든 딱히 상관없었다. 엄연히 말하면 자신이 찾은 것도 아니고 별이 찾아준 것이니까.
그녀의 대답을 들은 미리내가 조용히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우리가 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길드장인데다, 아나이스 벨의 경우를 봤을 때 전투 계열이 각성 효과를 가장 많이 볼 것 같은데.”
“에이. 길드장이라고 그런 특혜를 받으면 쓰나. 게다가 나는 이미 한국 1위인데 여기서 더 올라갈 데가 어디 있어? 인찬이나 유하는 어때? 필요하잖아.”
“미리내한테 양보하는 건 어때? 힐러가 강해야 우리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잖아. SS급 힐러는 뭐가 다를까? 기대된다.”
“그래도 은새가 가져왔는데 은새한테 줘야 하지 않을까?”
한 명씩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먼저 쓰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오랜 친구 사이들답게 누구에게 가장 이득이 될지를 먼저 생각했다.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솔이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야! 너희들 왜 나는 아무도 추천 안 해 줘?!”
은새와 친구들이 서로를 바라보다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진지했던 태도를 버리고 은근히 딴청을 피웠다.
“솔이 너는 좀 그렇지.”
“맞아, 좀 그래.”
“우리 길드는 역성혁명을 허용하지 않아. 솔이 너는 그냥 지금 이대로 2인자 하자.”
놀림 반, 진담 반으로 솔을 제외하자는 의견이 과반수를 이루었다.
“그게 뭐야? 싫어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솔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썼다.
각성석을 누가 갖느냐로 한창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비서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길드장님, 큰일 났습니다.”
“뭔데?”
도천 크루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비서가 굳은 얼굴로 막 들어온 소식을 전했다.
“던전 이상 현상이 발생해 인천 지역에 파견된 공략 4팀이…… 전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