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파격 제안
모난 눈길을 받으면서도 유하는 넉살 좋게 넙죽 인사를 건넸다.
“예비 스승님, 안녕하셨어요? 또 찾아왔습니다.”
“왜 왔지? 대답은 지난번에 한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이 세계에는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거든요. 뛰어난 스승을 얻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하겠어요?”
“뻔뻔하군.”
“기왕이면 적극적인 거라고 해 주세요.”
벨키오르가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렸고 유하는 얄밉게 씩 웃었다. 손만 까딱하면 유하를 처리할 수 있는데 은새가 있으니 그리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끔찍이도 아끼는 ‘친구’이기도 하니 그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손끝에 모인 마력을 애써 흐트러뜨리며 벨키오르는 유하에게서 몸을 완전히 돌렸다.
무시하려는 모양새에도 유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돌아온 은새가 손님을 마냥 현관에 세워 둘 수는 없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음. 일단 들어올래? 차라도 한잔하고 가.”
“고마워.”
유하는 사양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즉시 벨키오르의 못마땅하다는 시선이 뒤따랐고 은새는 그런 그의 등을 토닥여 달랬다.
은새가 차와 함께 유하가 사 온 디저트를 접시에 담아 내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벨키오르와 유하가 마주 앉았고, 눈치를 보던 은새가 벨키오르의 옆에 앉았다.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유하를 보고 벨키오르가 다소 위압감을 풍기며 말했다.
“나는 들을 말이 없다. 네가 뭐라고 해도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아.”
“보기보다 성급하시네요. 돌아가서 생각해 봤습니다. 벨키오르 님께서 제 제안을 거절하는 건 대가가 없기 때문이겠죠?”
“그것 말고도 나는 인간과 사사로이 엮일 생각이 없다. 원래 세계에서도 하지 않은 짓을 외부 세계에 와서 할 이유는 없으니.”
“하지만 대가가 있으면 심도 있게 고려해 주시겠죠.”
유하가 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에 벨키오르는 은은한 불쾌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가진 패가 벨키오르에게 잘 먹힐 거라는 걸 확신하는 태도가 아닌가. 인간이 뭘 얼마나 대단한 대가를 가져왔길래.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벨키오르가 턱짓했다.
그런데 유하가 영 엉뚱한 얘기를 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은새의 오랜 친구입니다. 그만큼 은새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은새가 학교 다닐 때 어떤 아이돌을 좋아했는지, 최고 석차가 몇 등이었는지,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다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 또…….”
“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은새가 기겁하며 유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유하의 폭로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모의고사 시험지로 돛단배 접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일도 있고, 제비뽑기로 세 번 연속 같은 남자애랑 짝꿍 돼서 주변에서 결혼하라고 하니까 슬리퍼로 때려서 보건실 보낸 일도 있어요. 이야, 맞아. 그랬었지, 너.”
“그만 말해!”
“왜. 다 추억인데.”
은새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며 유하가 낄낄거렸다.
벨키오르는 갑자기 은새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유하의 태도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찌푸려진 미간과 한층 사나워진 눈빛.
그런 벨키오르를 힐끔 곁눈질한 유하가 ‘흐음.’ 하고 콧소리를 냈다.
밑밥은 이만하면 됐으려나?
그는 승부수를 던졌다.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파격 제안으로, 제 스승이 되어 주신다면 은새에 대한 얘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제가 지켜보기로 이 세계에서 벨키오르 님에게 유의미한 건 오직 은새뿐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
벨키오르가 지그시 유하를 노려보았다. 이 인간이 지금 누구 앞에서 가증을 떠는 거지?
그의 정확한 속내까지야 모르겠지만 인간이 드래곤을 재단하는 게 아주 주제넘었다.
“원래 관심이 생기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궁금해지잖아요. 그 궁금증, 제가 다 풀어 드리겠습니다.”
“허튼소리. 내게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건가?”
벨키오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도 관심이 있다는 말에 부정은 안 하네.
유하는 제 감정도 자각하지 못한 은새보다 벨키오르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들유들한 태도로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도 알면 좋잖아요.”
“본인의 허락 없이 그런 얘기를 흥미 본위로 다루다니. 인성이 덜 됐군.”
“그럼 허락받으면 되겠네요? 은새야, 그래도 괜찮을까?”
“하지 마! 하지 마!”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구한테 뭘 말해 준다고?
자신의 흑역사가 일부라도 공개되어 창피해 죽겠는데 이 이상 뭘 더 알려 준다는 말인가.
‘벨키오르 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은새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벨키오르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염치를 모르는 유하가 쿠키 가루가 묻은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친구가 곤란한 상황인데 좀 봐주면 안 될까?”
“아니 왜 하필 그런 얘기를…….”
“이거 어쩌지. 내가 가진 것 중에 벨키오르 님에게 드릴 만한 건 그것밖에 없는데.”
“그런 얘기 안 하고도 진심이 통하면 받아 주실 거야.”
“그럴까?”
유하가 짐짓 시무룩한 척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은새가 저도 모르게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지! 유하가 은새 모르게 속으로 환호했다.
은새가 있을 때를 노리고 방문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앞에 말한 것들은 다 이를 위한 빌드업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은새의 의지는 흐려졌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가 팔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못살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은새가 우물쭈물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벨키오르 님. 유하가 원래 아쉬운 말 잘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벨키오르 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
“한 번만 생각해 봐주실 수 없을까요? 부탁드려요.”
“저도 부탁드립니다.”
유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벨키오르는 두통이 몰려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은새가 부탁하면 벨키오르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저자도 그걸 알아서 이 자리를 마련한 거겠지. 아까 은새에 대해 얘기해 준다는 것도 일부러 흘린 것일 테다.
‘뻔뻔한 것.’
유하를 보는 금색 눈동자가 일순 서늘해졌다.
결국, 은새의 간절한 눈빛을 이기지 못한 벨키오르가 마지못해 승낙의 말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지.”
“정말요? 감사합니다, 벨키오르 님!”
“가, 감사…… 감사합니다! 아,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다 나네요.”
허벅지를 꼬집어 웃음을 눌러 참은 유하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를 바라보는 벨키오르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은새 역시 힐난의 눈빛으로 유하를 노려봤다. 서로를 알아 온 세월만큼 유하에 대해 잘 아는 그녀였다.
이게, 내 창피한 과거를 팔아서 벨키오르 님의 환심을 사려고 해? 벨키오르 님은 그런 걸로 혹하실 분이 아니거든!
은새는 벨키오르가 자신 때문에 말만이라도 알겠다고 한 것을 알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과하는 의미로 그의 손등에 제 손을 얹자,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벨키오르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벨키오르 님!”
남은 차를 단숨에 마신 유하가 방정맞게 양팔을 휘두르며 떠났다.
그를 배웅하러 나온 은새와 벨키오르는 멀어지는 자동차를 말없이 응시했다.
“……은새. 아무리 그대가 한 부탁이라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는 걸 이해해 주길 바란다. 엄연히 저자와 나의 거래니까.”
“네. 알고 있어요. 제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은새가 배시시 눈웃음을 띠자 벨키오르도 따라서 픽 웃음을 흘렸다.
살다 살다 고작 인간 하나에게 휘둘리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점심으로 국수 어때요?”
“레시피가 있나?”
“그건 제가 만들 줄 알아요. 제가 할게요!”
집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어깨가 가까웠다.
***
휘오오오.
강풍이 몰아치는 고산지대.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흩날리고 어딜 봐도 온통 눈과 얼음뿐이다.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그 혹독한 환경에서, 미국인 헌터 아나이스 벨은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가까스로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다.
“하…….”
그가 토해 낸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이게 며칠째지?
두꺼운 외투에는 마수들의 피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고 이미 그는 체력적으로 한계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야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서, 설마…….”
거멓게 죽어 있던 아나이스 벨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감각을 잃은 팔과 다리를 움직여 목표를 향해 기다시피 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을 헤쳤다. 그렇게 드러난 것은 주먹만 한 돌이었다.
“드디어 손에 넣었어……!”
아나이스 벨이 있는 힘을 다해 돌을 움켜쥐자 그 순간, 환한 빛이 일대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