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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89)화 (89/190)

88화 – 포기는 할 수 없지

유하는 스스로의 일을 남에게 의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결정이 의외였다.

“그래서 받아 주셨어요?”

“거절했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쉽게 포기하던가요?”

“다시 오겠다고 하더군.”

숟가락을 내려놓은 벨키오르가 물을 마셨다.

언뜻 유하가 뇌물이랍시고 건넨 은새의 사진이 떠올랐으나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비록 예상치 못한 경로로 얻었어도 제 손에 들어온 이상 그것은 제 것이었다.

불현듯 궁금증이 솟아난 은새가 질문했다.

“벨키오르 님은 과거에 제자를 두신 적 있어요?”

“없어.”

“왜요? 벨키오르 님 실력이면 가르침 받겠다고 줄을 섰을 것 같은데.”

벨키오르가 은새를 지그시 응시했다. 천진하게 깜빡이는 눈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가끔 보면 은새는 헤츨링을 키우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드래곤에 대해 지나치게 편견이 없었다.

아니면 그만큼 자신을 신뢰하고 있거나.

“……내가 있는 세계에는 드래곤을 멋대로 우상화하는 자들도 있지만, 보통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긴다.”

“아.”

“그러니 감히 드래곤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는 인간은 없지. 무엇을 대가로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가끔 유희 중에 재능 있는 이를 만나면 변덕으로 가르침을 주는 경우가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야.”

“그렇군요……. 유하가 그 어려운 걸 해냈네요.”

“거절했다고 했을 텐데?”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은새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유하. 제 친구다웠다.

하지만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유하는 한번 정한 것은 끝까지 해내고 마는 성미였기에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벨키오르를 찾아올 터였다.

아마 한동안 집요하게 시달리지 않을까? 현재의 벨키오르로선 짐작도 못 하고 있었지만.

그 광경을 상상해 본 은새가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 다 제게 소중한 사람이니 한쪽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유하야, 힘내. 파이팅! 벨키오르 님도요. 은새가 속으로 그들에게 응원을 건넸다.

그녀가 더 식사를 이어 갈 기미가 없자 벨키오르는 식탁을 치웠다.

그를 도와 빈 접시를 싱크대에 쓸어 넣은 은새가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마법으로 하면 된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제가 하고 싶어요.”

“먼 거리를 이동해 왔으니 쉬는 게 나을 텐데.”

“벨키오르 님이 해 주신 맛있는 음식을 먹었더니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

진심 어린 은새의 미소에 벨키오르가 짧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새가 수세미에 퐁퐁을 묻혀 거품을 내고 그릇들을 하나하나 닦았다. 가짓수는 많았지만 집중해서 하니 금방 할 수 있었다.

쏴아아.

흐르는 물에 거품이 씻겨 내렸다. 그릇의 물기를 탈탈 털어 낸 은새가 선반에 그릇을 정리했다.

바삐 움직이는 하얀 손을 벨키오르가 옆에서 지켜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은새가 아, 하고 떠오른 것을 질문했다.

“벨키오르 님도 유희를 다니셨나요? 인간들을 많이 만났고요?”

“아니. 나는 다른 동족들에 비해 유희 기간이 짧다.”

“왜요?”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리고 그때는 반려를 찾는 게 더 시급했으니까.”

벨키오르의 유희는 그가 살아온 세월에 비해 1, 2백 년 정도로 몹시 짧았다.

선대가 살아 있던 시절, 드래곤의 영역에서 통 벗어나질 않는 그를 보고 선대가 ‘너는 뭐가 문제지? 나가서 좀 놀다 와라.’ 하고 뻥 차서 내보낸 것이 계기였다.

확실히, 머리가 좀 크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헐레벌떡 인간세계로 떠나는 다른 동족들과 달리 벨키오르는 그런 것에 열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인간세계에 내던져진 그가 잘 적응했을 리 만무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바닥인 벨키오르는 크고 작은 사고를 쳐 금세 쫓기는 신세가 됐고, 그를 수거하러 온 선대의 딱한 것을 보는 눈빛과 먼저 유희를 떠났던 동족들의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 후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몇 번 더 인간세계에 발길을 했고,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싶을 때 벨키오르는 더 이상 유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반려를 찾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당시를 회상하고 있던 벨키오르의 귀에 어딘가 달라진 듯한 은새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느새 물소리는 멈춰 있었다.

“반려…… 그러고 보니 산체스 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었죠. 저, 그 반려를 찾는 것은 포기하신 건가요?”

“글쎄…….”

벨키오르가 준비해 뒀던 수건으로 은새의 젖은 손을 닦아 줬다.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그를 올려다보는 은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동요를 보지 못한 벨키오르가 말을 이었다.

“그건 포기한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

“설사 닿지 못할 곳에 있다고 해도 나는 평생을 그리워하겠지. 드래곤에게 반려란 그런 것이니.”

그 말을 하는 벨키오르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예전처럼 덧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누군지 모를 이를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증도, 초조함도 찾아오지 않았다.

벨키오르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눈앞에 은새가 있었기 때문에.

그건 꽤 기묘한 감각이었다. 반려라는 확신도 없이, 은새의 존재만으로 이토록 안정감을 느끼다니.

‘그래. 포기는…… 할 수 없지.’

은새라는 존재가 나타난 이상 더욱더.

한편 은새는 욱신거리는 가슴 통증을 느끼고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염치없이 섭섭한 마음이 밀려왔다.

깜빡이는 검은 눈동자가 혼란을 내비쳤다.

‘내가 왜 이러지? 벨키오르 님에게 반려가 어떤 의미인 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마치 포기했다는 대답을 기대한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한 은새는 충격에 빠졌다. 반려를 포기하지 못한 벨키오르에게 섭섭함이라니.

자신이 뭐라고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진단 말인가.

오랜 시간 동안 홀로 버텨 왔을 그를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유은새, 이 바보 멍청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심스러움에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몰려왔다.

“은새?”

갑자기 말이 없어진 은새를 벨키오르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아…… 저기, 그게.”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는 찰나, 별이가 리본이 묶인 상자를 들고 주방으로 달려왔다.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은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뉴나! 우리 선물 같이 풀어 봐여!”

“그, 그럴까?”

살았다!

은새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별이를 얼른 품에 안았다. 벨키오르가 행여 붙잡을세라 그녀는 거실로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은새의 급변한 태도에 머리를 기울인 벨키오르가 묘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다음 날 아침.

은새는 아직 꿈나라를 여행 중인 별이와 봄이를 내버려 둔 채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전날 밤, 아이들이 오늘은 누나랑 꼭 같이 자고 싶다며 매달려 오는 통에 은새는 밤늦게까지 동화책을 읽어 줘야 했다.

은새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이미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의 벨키오르가 어제 아이들과 함께 매달아 놓은 썬 캐처를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 장식장 위에는 첨성대 피규어와 마리모가 든 작은 유리병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전부 은새가 별이와 봄이를 위해 사 온 기념품들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잘 잤나?”

은새의 인사를 받은 벨키오르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은새는 아직 약간은 어색한 기분을 감추고 싱긋 웃었다.

“오늘 일정은?”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뭐 하면서 보낼까요? 하고 싶은 게 있으세요?”

“그걸 나에게 묻는 건가?”

“계속 아이들과 집에만 계셨으니까요. 답답하지 않으실까 해서. 어디 나갈까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어디에 있든, 뭘 하든 벨키오르에게는 은새가 있다면 상관없었다.

평소와 같은 대답이지만 어제 일 때문일까, 어쩐지 울렁거리는 느낌에 은새가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뉴나…….”

그때 별이가 터벅터벅 걸어와 은새의 다리에 매달렸다.

“별이, 깼어? 더 자지. 왜 나왔어.”

“뉴나 나갈까 봐…….”

잠이 덜 깨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의 하늘색 곱슬머리를 은새가 슥슥 쓰다듬었다.

“아니야, 내가 말도 없이 어딜 나가. 우리 별이, 오늘 누나랑 뭐 하고 놀까?”

“……! 나 뉴나랑 하고 시픈 거 많아요!”

“그래, 그거 전부 다 하자.”

별이는 양팔을 번쩍 들고 날아갈 듯이 좋아했다.

아이들과 즐겁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정오 무렵에 이르렀을 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니 반가운 손님이 와 있었다.

“유하야?”

은새가 현관에서 벨키오르와 대치 상태에 있는 유하에게로 달려갔다.

“유하야, 무슨 일이야?”

연락 없이 찾아온 유하에게 은새가 의문을 표하자, 그는 태연하게 양손에 들고 있던 걸 내밀었다.

“출장 다녀오느라 수고했어. 이건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고마워. 와, 여기 디저트 맛있는데. 별이랑 봄이가 좋아하겠다.”

은새는 아무런 의심 없이 유명 디저트 전문점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후각이 좋은 별이와 봄이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눈을 반짝이며 은새에게 달려들었다.

“과자예요? 달콤한 거다!”

삐삐!

“쿠키랑 케이크네. 잠깐만, 별이 봄이. 이건 밥 먹고 먹자.”

당장이라도 먹고 싶어서 손을 뻗는 아이들을 은새가 달래어 놀이방으로 데려갔다.

“밥 꼭꼭 씹어서 다 먹으면 먹게 해 줄게. 후식으로 먹는 거야. 별이랑 봄이 그럴 수 있지?”

“네에!”

다행히 별이와 봄이는 생떼 부리지 않고 은새의 말을 잘 들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유하의 방문 목적을 알아챈 벨키오르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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