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그건 괜찮은 건가?
은새는 던전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건에 맞는 던전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기에 집으로 복귀했을 때는 감회가 남달랐다.
현관에 묵직한 짐을 내려놓으며 은새가 큰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나 왔어!”
“누…… 누나!”
삐삐!
기다리고 있던 이의 귀환에 별이와 봄이가 거실에서 하던 걸 다 내팽개치고 호다닥 달려 나왔다.
같이 놀고 있던 황새와 백합이도 ‘깍깍!’, ‘쉭쉭.’ 하고 은새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반갑다고 인사했다.
은새가 황새와 백합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 동안 아이들은 마치 은새와 몇 년은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애틋하게 매달려 왔다.
은새는 뭉클한 감정을 느끼며 그들의 뺨에 쪽쪽 소리 나게 입 맞췄다.
“우리 아가들. 잘 지냈어?”
“뉴, 뉴나. 보고 시펐어요. 흐웅…….”
삐- 삐-
아이들도 은새와 같은 심정인 듯 눈물을 글썽이며 칭얼거렸다.
별이와 봄이로서는 은새와 이토록 오래 떨어져 지낸 게 처음이었다.
출장을 떠나기 전, 은새는 벨키오르에게 핸드폰을 사 주고 조작법을 알려 줬다.
손바닥만 한 기계가 처음 제 손에 쥐어졌을 때 낯선 반응을 보였던 벨키오르는 ‘언제든 연락하세요. 꼭이요, 꼭!’이라는 은새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었다.
덕분에 시간 날 때마다 영상 통화를 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의 그리움은 점차 커져만 갔다.
별이와 봄이는 아침에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은새를 찾았다.
밥을 먹을 때도, 잘 놀다가도, 씻다가도 은새 생각에 훌쩍거렸다.
그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고 보살핀 게 벨키오르였다.
“별이 봄이, 말썽 안 피우고 아빠 말 잘 듣고 있었어?”
“네!”
삐-!
아이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간의 벨키오르의 수고는 몽땅 잊은 듯했다.
소란을 듣고 어느새 벨키오르가 현관에 나와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은새가 고개를 들어 벨키오르를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은새가 사르르 눈꼬리를 휘었다.
출장지 숙소에서 느꼈던 적막함과 외로움이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졌다.
집에서 자신을 맞이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문득 행복으로 다가왔다. 알게 모르게 냉기가 감돌던 집이 지금은 포근함으로 꽉 차 있었다.
“벨키오르 님, 저 왔어요.”
“다친 곳은?”
“당연히 없죠. 저 잘하고 왔어요. 특훈의 성과가 있었어요!”
상기된 은새의 얼굴을 보고 벨키오르가 피식 웃었다.
“저 이제 B급 마수 다섯 마리까지 동시 테이밍 가능해요. A급은 시간은 짧지만 그래도 성공했고요. 아마 더 연습하면 유지 시간이 늘어날 거예요.”
“잘했군.”
“헤헤.”
담백한 칭찬에 은새의 뺨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깃들었다. 벨키오르의 시선이 언뜻 다정해졌다.
“뉴나, 다 같이 그림 그리고 있었어요. 봄이랑 황새랑 백합이랑. 보여 줄까요? 참, 어제 아빠랑 쿠키 만들었어요! 별 모양 쿠키랑 곰돌이 모양 쿠키~”
“그래? 궁금하다. 쿠키 맛있었어?”
“네! 누나 것두 남겨 놨어요.”
“정말? 고마워. 맛있겠다.”
아이들이 도통 은새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자 벨키오르가 대신 은새의 짐을 안으로 날랐다.
그녀 혼자서 들고 왔다고 하기에는 짐이 많고, 무거웠다. 떠날 때는 분명 가방 하나만 챙겨 갔던 것 같은데.
“뭐가 많군.”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아이들 선물이랑 기념품 좀 샀어요. 아, 저기 저 박스는 벨키오르 님 드릴 거예요.”
“선물? 별이 선물 사 와써요, 뉴나?”
“그럼! 이따 같이 풀어 볼까?”
“조아요!”
삐삐!
아이들이 은새의 다리에 매달려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까악?
쉬익.
황새와 백합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근처를 얼쩡거리는 걸 내버려 둔 채 벨키오르는 망설임 없이 은새가 가리킨 박스를 뜯어 보았다.
그 안에는 묵직해 보이는 술병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술?
“이게 뭐지?”
“경주법주 초특선이라고, 우리나라 전통주의 하나예요. 한번 맛보시라고 공수해 왔죠.”
누가 봐도 맛만 보라고 가져온 양이 아니었다. 눈대중으로 적어도 다섯 병은 넘어 보였다.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벨키오르는 되묻는 대신 잠자코 박스를 다시 닫았다.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못 본 척하고 싶었다.
술이 약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황새와 백합이가 창문을 통해 나가는 걸 본 은새가 벨키오르에게 질문했다.
“벨키오르 님, 식사하셨어요?”
“아니. 오늘 그대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들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헉, 어떡해. 배고프시겠다. 얘들아, 먼저 먹고 있지!”
“아니에여. 누나랑 먹으려구 기다리고 있었어요!”
삐-이!
배가 고플 게 분명한데도 별이와 봄이는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맞춰 우렁차게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 아닌데! 나 배 하나도 안 고픈데!”
“안 되겠다. 벨키오르 님, 우리 식사부터 해요.”
“준비하지. 그대는 씻고 나오도록 해.”
“네? 밥 먹고 씻으면 안 돼요?”
벨키오르는 말없이 은새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어? 어?
순조롭게 은새를 처리(?)한 그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하나씩 쥐여 주고 주방으로 갔다.
미리 준비를 다 해 두었기에 음식은 금방 완성되었다.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어느 때보다 빠르게 샤워를 마친 은새가 잠시 후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후각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에 절로 이끌려 식탁 앞으로 갔다.
“와, 닭볶음탕! 저 집밥 진짜 그리웠어요.”
“머리 제대로 말리고 와라.”
“이건 진짜 봐주세요. 금방 말라요.”
벨키오르의 말에 눈을 찡긋한 은새가 그대로 식탁에 앉으려고 했다.
얕게 한숨을 내쉰 벨키오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수건을 뺏어서 검은 머릿결을 살살 털어 냈다.
막 씻고 나온 은새에게서 향긋한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은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러실 필요는…….”
“가만히.”
물기가 어느 정도 제거되자 벨키오르는 은새의 머리끝을 살짝 쥐고 마법을 걸었다.
금세 뽀송뽀송하게 마른 검은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손길로 은새의 머리를 정돈해 준 벨키오르가 젖은 수건을 챙겨 물러났다.
멀어지는 기척을 느끼며 은새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앉지. 아이들은 내가 데려올 테니.”
“네…….”
벨키오르가 별이와 봄이를 데리러 간 사이 은새는 얼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열심히 손부채질했다.
식탁에는 닭볶음탕 말고도 메추리알 장조림, 콩나물무침, 구운 김, 떡갈비 등이 있었다.
그리고 봄이의 것이 분명한 식용 꽃이 듬뿍 섞인 샐러드도.
백반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메뉴임에도 벨키오르가 만들어서 그런지 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언젠가 은새의 책장에서 ‘표 주부의 강력 추천 한식 레시피’를 찾아낸 벨키오르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런 게 입맛에 맞나?’
‘네. 한국인이니까요? 그런데 저 먹을 거 안 가려요. 벨키오르 님이 해 주시는 거면 뭐든 좋아요.’
은새의 말을 듣고 한참을 책을 보며 생각하던 벨키오르는 그날부터 식단을 조금씩 바꿨다.
그 변화가 신기해 은새가 칭찬을 쏟아 내니 그는 답지 않게 욕심이 생겼는지 다른 책을 더 요구했다.
은새는 기쁜 마음으로 인터넷 서점에서 한식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요리책까지 잔뜩 사서 그에게 안겼다.
그 결과 벨키오르가 만든 세계 진미들을 맛볼 수 있었다. 오늘은 출장을 다녀온 은새를 위한 한식 풀코스였다.
별이와 봄이를 유아 의자에 앉힌 벨키오르가 은새의 맞은편에 앉았다.
젓가락을 들며 은새가 살갑게 말을 건넸다.
“저 없는 동안 뭐 하고 지내셨어요?”
“별거 없었다.”
“뉴나! 세계수 이-따만큼 자랐어요! 내가 물 줬어요!”
“와. 별이가 했어? 잘했어. 이따 보러 가야겠네.”
은새는 칭찬의 의미로 작게 자른 떡갈비를 별이의 입에 쏙 넣어 줬다.
별이의 뽀얀 뺨이 볼록 튀어나왔다. 별이는 은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주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그런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듯 은새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살짝 싱겁게 간이 된 나물을 한 입 집어 먹고 말했다.
“당분간 집에 있을 거예요. 갑작스레 던전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바쁜 일 없거든요.”
“그런가.”
“네. 벨키오르 님, 혹시 하고 싶은 일 있으세요?”
“글쎄…….”
벨키오르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식사를 소홀히 하는 은새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줬다.
그의 무심한 대답에 되레 안달이 난 은새가 조르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같이 생각해 봐요.”
“그러지. 우선 식사부터.”
“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은새와 아이들이 똑같이 통통 배를 두드렸다.
별이의 입가를 닦아 주는 은새를 보며 벨키오르가 입을 열었다.
“네 친구가 찾아왔었다.”
“친구 누구요?”
“김유하.”
“어…….”
유하가?
은새가 눈을 깜박였다. 유하가 찾아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벨키오르의 입에서 자신 말고 다른 이름이 나온 게 생소했다.
내 친구들 이름을 알고 계시긴 했구나!
“왜 그렇게 보지?”
“아, 아뇨. 유하가 왔었어요? 왜요?”
“스승이 되어 달라고 하더군.”
으잉? 은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승…… 이요? 제가 알고 있는 그 뜻이 맞나요?”
“다른 뜻도 있나?”
“너무 의외라서요. 유하가…….”
혼자서 벨키오르님을 찾아왔다니. 그것도 내가 없는 사이에.
‘흐음.’ 하고 은새가 입술을 매만졌다.
유하는 친구들끼리 하는 대화 중에 가끔 벨키오르에 관한 화제가 나올 때면 늘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였었다.
그런 그가 벨키오르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했다고?
물론 벨키오르 님은 다재다능하시고 아는 것도 많으시지만 그래도 드래곤인데?
그건 괜찮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