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인찬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제가 지키고 싶은 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또한 힘이 닿는다면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굳은 눈빛을 본 길아연은 듣지 않아도 그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저런 눈빛을 하고 부나 권력, 일신의 안위 같은 걸 말할 리 없지.
자신과도 닮은 느낌에 길아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패 꺼내 보세요.”
“넵.”
인찬이 아공간에서 금테가 둘린 커다란 방패를 꺼내 들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방패로, S급 던전 ‘인어들의 낙원’에서 얻은 것이었다.
유심히 인찬의 방패를 살피던 길아연이 물었다.
“평소 이능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요?”
“방패에 둘러서…….”
“그게 보통 방식이죠.”
방패에 이능을 둘러 방어하거나 공격하는 방식. 보통 탱커들이 이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길아연이 인찬의 방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우선 탱커가 방패를 든다는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내 무기는 검이에요. 하지만 모두가 나를 탱커라고 불러요. 왜?”
길아연이 제 허리춤을 눈짓했다. 가죽끈으로 고정된 클레이모어가 보였다.
“방패가 없어도 충분히 탱커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아…….”
“무기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버려요.”
“……!”
“극단적인 예로 방패가 부서지면 서인찬 헌터는 어떻게 싸울래요? 친구들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만 있을 거예요?”
“아닙니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이 있어요. 마찬가지예요. 탱커가 강해지는 방법? 별거 없어요. 그냥 좋은 무기를 쓰면 돼요. 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서 ‘능동적인 대처법’을 익힌다면 더 발전이 있겠네요.”
“능동적인 대처법…….”
인찬이 길아연의 말을 곱씹었다. 고민하는 듯한 그에게 그녀가 정답을 말해 줬다.
“방패가 없으면 C급 철검으로라도, 혹은 몸으로라도.”
“몸이요?”
“서인찬 헌터에게는 마침 딱 좋은 조건이 있네요. 고유 능력 금강.”
“…….”
인찬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고유 능력은 그저 몸을 단단하게 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탱커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성이었으나 그게 다였다.
그의 생각이 길어지자 길아연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알아요? 캐나다의 가브리엘 호쉬 헌터는 위급한 상황에 바위에 이능을 실어 방패 대용으로 썼어요.”
“……!”
아무리 둔한 인찬이라도 못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호신강기인 금강. 그리고 무기에 의존하지 말라는 조언.
인찬은 제 몸을 내려다봤다. 만약, 방패 대신 제 몸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인찬의 시야가 환해졌다.
“그렇군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알아들었으면 됐어요. 물론 그 경지에 이르는 건 서인찬 헌터의 운과 노력이 따라 줘야겠지만.”
길아연이 클레이모어를 빼 들었다.
“대련 한번 하죠.”
“네? 지금요?”
“실력 좀 보자고 했잖아요? 입으로 떠들기만 할 거였으면 여기 안 데려왔지.”
놀라는 인찬을 보고 길아연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겁나요?”
“아,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길아연 헌터.”
“까마득한 후배라고 해도 나는 안 봐줘요.”
“바라던 바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었던 인찬이 길아연의 눈치를 봤다.
“저…… 방패 없이, 대련해도 괜찮을까요?”
“의외네. 결단을 내리면 행동이 빠른 타입이네요?”
길아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소심하게 굴길래 실전에 들어가는 것만 한세월 걸릴 줄 알았는데.
머릿속에서 인찬에 대한 평가를 고치며 길아연이 자세를 취했다.
“갑니다.”
“넵!”
달려드는 길아연을 보고 인찬이 결연한 표정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고유 능력 금강을 발동하며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흐아……!”
얼마간의 대련 후 만신창이가 된 인찬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길아연은 정말 봐주지 않았다. 맨몸의 인찬을 신명 나게 두드려 팼다.
“아, 개운하다!”
“어윽, 너무 아파요…….”
울상인 인찬과 다르게 오랜만에 몸을 마음껏 움직인 길아연의 얼굴은 상쾌해 보였다.
울긋불긋 멍이 든 몸을 일으키며 인찬이 끙끙거렸다.
하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방패 없이 대련하면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고유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고유 능력을 잘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아직 모호하지만 이전과는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인찬은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훈련실 한복판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 인찬을 보고 길아연이 피식 웃었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한 그녀가 치워 두었던 짐을 챙겨 들었다.
훈련실에서 나가기 전, 인찬이 길아연을 붙잡았다.
“저…… 길아연 헌터. 이제 와 이걸 묻기도 민망한데, 왜 저를 도와주신 건가요?”
“고작 몇 마디 해 준 게 단데 뭘 계산하고 따져요?”
“그래도…….”
인찬은 서늘한 첫인상과 다르게 성실히 조언해 주고 대련까지 해 준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쉰 길아연이 눈썹을 매만졌다.
“내 전 동료들 알죠?”
“전 동료분들이라면 세화 길드의……?”
인찬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길아연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녀가 어딘지 모를 먼 곳을 바라봤다.
“꽤 잘나가는 시절이었죠. 지금의 도천 길드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았을 거예요. 허세가 아니고 그때는 정말 우리가 최고였다니까요?”
“압니다.”
길아연의 표정에서 세화 길드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많은 사람을 구했고 몸으로 부딪쳐서 던전 공략법을 알아냈어요.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을 때라는 걸 감안하면 자랑스러운 성과죠.”
세화 길드는 S급 길아연을 필두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길드였다.
한승혁, 김은하, 심기찬, 오진희가 그곳에 속해 있었고 이들은 ‘세화 크루’로 불리며 대한민국을 여러 차례 위험에서 구해 냈다.
지금도 헌터들 사이에서 그들의 업적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야말로 헌터계의 레전드.
길아연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졌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더라고요. 등을 맡길 수 있었던 친구도,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도…….”
다만 최고 주가를 올리며 모두의 우러름을 받던 세화 크루의 끝은 안 좋았다.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던 그들은 몇 년 뒤 분열했다.
계기는 사소했다. 돈과 권력.
그리고 누구보다 뛰어났던 길아연을 향한 다른 이들의 질투심과 열등감이 파멸을 불러왔다.
“특히 부길드장이었던 승혁이는 나를 죽이고 세화 길드를 먹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깟 길드장 자리,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는데.”
당시 느꼈던 감정이 울컥 솟아난 듯 길아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이 믿었던 세상이 무너지고 모든 걸 잃었다.
사람들의 비난과 외면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배신은 뼈아픈 상처였다.
“죽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내 손으로 세화 길드를 해체하면서 다짐했어요. 다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절대 곁을 내주지 않을 거라고.”
“저, 길아연 헌터…….”
생각보다 심각한 내용에 인찬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세화 길드의 끝이 좋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해체된 계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던 그였다.
자신이 혹시 그녀의 아픈 과거를 괜히 건드린 게 아닌가 초조해하는 인찬에게 길아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요?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아…….”
괴로웠던 과거에 어두웠던 표정은 어디 가고 그새 감정을 털어 낸 듯 씩 웃은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천 크루 얘기는 여기서도 많이 들려요. 내가 서인찬 헌터를 도와준 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겉보기와는 달리 순박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인찬을 보니 도와주고 싶기도 했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요. 하긴, 서인찬 헌터 성격을 보니 싸울 일도 없겠어요.”
“아니에요. 그……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비 맞은 강아지 꼴이네요.”
길아연이 키득키득 웃자 인찬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녁이나 먹을래요?”
“앗, 저는 영광입니다.”
“영광까지야. 내가 잘 아는 곳이 있어요. 잠시만요, 지금 예약을…….”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훈련실에서 나가기 전 핸드폰을 열어 본 길아연이 잠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서인찬 헌터? 여기서 나랑 만난 거 다 소문났어요.”
“네?”
머리를 갸웃하는 인찬을 두고 길아연이 훈련실 문을 열자 바깥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인파가 훈련장 밖에 몰려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들을 마주한 인찬이 얼떨떨해했다.
“와! 진짜네. 서인찬 헌터다.”
“내 말 맞지? 몸 엄청 좋다. S급은 다 이런가?”
“아닐걸? 인터뷰에서 봤는데 훈련량이 엄청나대.”
“아, 여기 봤다. 서인찬 헌터! 사인 좀 해 주세요!”
“아, 저…….”
당황한 서인찬이 길아연을 돌아봤다.
실실거리며 웃던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직 시간 있죠? 팬 미팅이라도 하고 가지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