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함락의 수호자
함락의 수호자, 길아연과 약속을 잡은 인찬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카페에 앉아 인찬은 물을 연거푸 마셨다. 컵의 물이 금세 바닥을 보였다.
인찬에게 있어 길아연은 영웅이나 전설 같은 존재라 더욱 긴장이 됐다. 그녀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
땀이 찬 손을 꼼지락거리는 그때 딸랑,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찬이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서인찬 헌터?”
“아, 안녕하십니까! 도천 길드 소속 서인찬이라고 합니다!”
벌떡 일어난 인찬이 소리 높여 인사했다. 뻣뻣한 인사에도 길아연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인찬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저…….”
“됐어요. 앉아요. 나 음료 시키고 올게요.”
“넵.”
인찬은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냅킨을 북북 찢었다. 기다리는 중에도 그의 시선은 길아연을 향해 있었다.
잠시 후 길아연이 요거트스무디를 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스무디를 한 입 마신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나를 왜 만나자고 했죠?”
“아, 길아연 헌터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나에게?”
“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제 얘기를 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길아연은 우람한 덩치를 가지고 안쓰러울 정도로 제 눈치를 보는 인찬을 기묘하게 바라봤다.
활동하는 지역이 다르지만 그녀도 인찬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
한국 1위 길드인 도천 크루에 속한 탱커. A급에서 S급으로 올라간 노력가.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길아연의 전성기는 격변의 시대 도래 이후 5년 사이.
그리고 그녀는 당시 설립했던 ‘세화 길드’를 모종의 사건으로 공중분해시켜 버리고 경남 지역에 틀어박혔다.
그러니 이후 세대인 인찬과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뭘까.
길아연이 눈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일단 들어는 볼게요.”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탱커입니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하하,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에 비하면 부족한 능력을 지녔고요.”
인찬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남 앞에서 인정하는 건 그로서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의외로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 길아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인찬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서 함락의 수호자님께 배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서인찬 헌터는 S급 아닌가요?”
“네……. 하지만 그게 끝이란 소리는 아니죠.”
“허, S급만으로 부족하다는 소리인가요?”
“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길아연이 기막혀하자 인찬이 멋쩍은 표정을 했다.
쪼로록.
순식간에 요거트스무디 절반을 비운 길아연이 빨대에서 입을 뗐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욕했을 거예요. S급으로도 만족을 못 한다니.”
“…….”
“그런데 나한테 배울 게 있을까요? 나는 일선에서 물러난 퇴물인데.”
“네? 아닙니다! 누가 그런 가당치 않은 말을. 길아연 헌터는 격변의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이죠. 특히 서울 상륙 작전 때 길아연 헌터께서 보여 준 활약은 눈이 부셨고 스킬 ‘비상하는 방패’는 모든 탱커들이 바라는…….”
“흐음…….”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던 인찬이 히죽히죽 웃는 길아연을 발견했다. 민망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길아연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이 자주 놀리죠?”
“네…….”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적어도 내 이름값만 보고 찾아온 건 아닌가 봐요.”
“절대 아닙니다. 길아연 헌터는 제 우상이십니다.”
인찬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진지한 눈빛에 길아연이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잠시 뒤 어느새 빈 잔을 트레이에 담으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죠. 여기서 더 할 말은 없겠네요.”
“저…… 거절하시는 건가요?”
“근처에 사설 헌터 훈련장이 있어요.”
“그 말씀은!”
인찬이 벌떡 일어났다. 반절쯤은 긍정적인 대답에 인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서 일단 서인찬 헌터 실력부터 봐야겠네요. 도천 길드 수준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그……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서 길드의 평가가 달라진다는 말에 인찬이 바짝 긴장했다.
우락부락한 덩치와 안 어울리게 순해 빠진 반응을 보이는 그를 곁눈질한 길아연이 피식 웃었다.
카페를 나온 두 사람은 인찬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사설 헌터 훈련장.
길아연이 나타나자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나!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몸 풀려고 왔어요?”
“올, 아연. 다음 주에 백양산 던전 너도 가지?”
“언니 저 신기술 개발했어요! 봐 줘요!”
길아연을 둘러싸고 아기새처럼 떠들던 그들은 그녀를 따라 들어온 인찬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찬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세상에, 서인찬 헌터다! 도천 길드!”
“와, 몸 엄청 좋네! 이거 다 단련한 거예요?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훈련해야 해요?”
“아연 누나랑은 왜 같이 왔어요? 둘이 아는 사이예요?”
“저기, 하나씩만…….”
물음표 살인마들에게 둘러싸인 인찬을 구해 준 건 길아연이었다. 길아연이 참새 쫓듯 헌터들을 밀어 냈다.
“저리 가라. 나 바쁘다.”
“두 사람 무슨 사이예요? 여기는 뭐 하러 왔어요?”
“서인찬 헌터, 저 사인 좀 해 주세요!”
“네, 네. 이따가 해 드릴게요.”
따라붙는 사람들을 힘들게 떼어 내며 인찬이 앞서가는 길아연을 쫓아갔다.
길아연은 빈 훈련실을 찾아서 들어갔다. 졸래졸래 따라 들어온 인찬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돌아봤다.
짐을 벗어 의자에 걸어 놓은 길아연이 쭉쭉 스트레칭을 했다.
“정확히 뭘 알고 싶은 거예요?”
“저는…….”
인찬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윽고 그가 입에 담고 있던 말을 쏟아 냈다.
“저는 탱커지만 친구들에게 큰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요.”
“응?”
“친구들은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는데 저는 발전이 없어요. 굳이 내가 아니어도 탱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고…….”
자연스레 인찬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말을 하면서도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길아연이 속으로 탄식했다. 저런. 자존감이 바닥이군.
원래 탱커가 그렇다. 잘해도 티가 안 나고 못 하면 욕먹는 거.
그래도 탱커 자체가 귀한 몸이었다. 아니, 도천 길드 S급들은 왜 탱커 기를 죽이지?
“친구들이 그런 걸로 타박해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딱히 두드러진 특성도 없고…….”
“나만 잘하면 되지 굳이 남들 눈에 띌 필요 없어요.”
길아연의 위로에도 그의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인찬이 길아연의 눈치를 봤다.
“차라리 저도 길아연 헌터처럼 강하고 멋진 스킬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하.
길아연은 인찬이 뭘 고민하는지 눈치챘다.
그녀의 스킬, ‘비상하는 방패’는 푸른 이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패가 돔 형태의 보호막을 만들어 아군을 보호하는 기술이었다.
그 크기는 길아연의 의지에 따라 변하며 위력은 가히 드래곤의 브레스를 견딜 만큼 강했다.
또한 이능이 바닥나지 않는 한 무한히 생성 가능하니 그야말로 무적.
길아연이 ‘함락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가만히 인찬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서인찬 헌터는 탱커가 뭐라고 생각해요?”
“아군을 보호하고 마수의 공격을 받아 내는 역할입니다.”
“방패만 들고 다니면 다 탱커인가요? 어그로 끌고 몸빵하면 다 탱커예요?”
“그건…… 아니죠.”
전선에서 방어에 집중하며 때때로 동료들에게 향하는 적의 공격을 끌어오고, 공격의 타이밍을 만들어 내는.
탱커는 의외로 뛰어난 멀티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닌 것 같네.’
길아연은 아직도 눈치를 보고 있는 인찬을 살피며 물었다.
“고유 능력이 뭐예요?”
“금강(金剛)입니다.”
“뭐야, 엄청 좋은 능력이네요? 난 또 ‘소심’이나 ‘소극’인 줄 알았네.”
“……놀리신 거죠?”
“그걸 이제 알았어요?”
훈련장 정중앙으로 걸어간 길아연이 허공에 대고 스킬을 발동했다.
“잘 봐요.”
길아연을 중심으로 그녀의 주변에 푸른색의 커다란 방패가 나타났다. 머리 위에서 번쩍 빛난 방패가 곧 투명한 돔을 만들어 냈다.
길아연의 주변 2미터로 시작한 발동 범위가 커다란 훈련실을 가득 채울 때까지 늘어났다.
그녀의 스킬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 인찬이 눈을 크게 뜨고 경외의 시선을 보냈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길아연이 스킬 범위를 도로 줄이면서 말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스킬이라는 건 곧 기원이에요.”
천천히, 그녀가 스킬을 유지한 채 인찬에게 걸어왔다.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지. 얼마나 절실한지. 또 얼마나 구체적인지.”
인찬의 앞에 서자 길아연이 스킬 범위를 한 번에 크게 훅 늘렸다.
“내가 이 스킬을 처음 개방한 건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비룡 티마이오스가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을 때예요. 정말 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죠.”
“아…….”
투명한 돔 안에 들어간 인찬이 멍하니 길아연을 바라봤다.
제 앞에 뜬 방패를 만지던 길아연이 인찬을 응시하며 물었다.
“서인찬 헌터, 당신의 스킬에는 염원이 담겼나요? 정말로 지키고 싶은 건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