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꼭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네?”
“회피기를 먼저 보여 드릴게요. 제 스킬,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이 단순 회피기가 아닌 순간 이동의 하위 호환이라는 것과 상태 이상 면역 효과를 동반하는 거 아시죠?”
“물론이죠.”
미리내에게도 물론 회피기가 있었다. 하지만 모다온의 스킬이 특별한 건 바로 위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순간 이동은 본디 마법 이능 헌터 전용 스킬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마법 이능 헌터의 수는 적었고, 그만큼 순간 이동을 실제로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후에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과 같은 하위 호환 스킬들이 등장했다.
이 스킬들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순간 이동과 같은 원리로 작용한다는 게 밝혀졌다.
또한 중독, 출혈, 마비, 기절 등 체력을 지속적으로 깎는 디버프를 막는 옵션이 붙어 있어 각광받는 스킬이었다.
“최미리내 헌터라면 ‘현자의 눈’과 같은 통찰 스킬이 있을 거예요. 우선 이능의 흐름과 발동 원리를 읽는 것을 목표로 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스킬을 카피하는 방법은 발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최적화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웠다. 특히 후자가.
일단 상성 문제도 있고, 재능과 운도 따라 주어야 했다. 이러니 성공할 확률은 극악.
그래서 스킬 카피가 세상에 존재하는 걸 알아도 그걸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뭣보다 스킬이란 그 헌터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었으므로 그걸 베껴 쓰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만약 스킬 카피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면 이 세상 헌터들은 너도나도 좋은 스킬들을 가지려 했을 것이다.
극한의 난도와 좋지 않은 인식 탓에 스킬을 카피하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스킬 카피 방법으로는 ‘스킬 카피 스킬’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아니 친구들만 알고 있지만 미리내는 해당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패널티가 있어서 자주 사용하지는 못해도 이게 아니었더라면 모다온을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리내가 모다온을 공격하기 전 걱정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호텔에서 제가 공격해도 괜찮을까요?”
“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이 호텔은 격변의 시대 이후에 세워진 곳이라 큰 충격에 대한 방비가 다 되어 있대요. 맞지?”
모다온이 매니저에게 동의를 구했다. 오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격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렇군요.”
“자, 시간이 없으니 어서 시작하죠!”
모다온의 재촉에 미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공간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상태 이상 ‘환각’이 옵션으로 달린 단검이었다.
“가겠습니다.”
“네!”
단검을 치켜 든 미리내가 통찰 스킬 ‘아테네의 시선’을 발동했다. 잠시 모다온과 대치한 미리내는 기회를 노리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와, 몸놀림이 좋으시네요!”
모다온이 흥분에 차 재잘거렸다. 그건 미리내가 할 말이었다.
모다온은 미리내의 공격을 물 흐르듯이 피했다. 놀라운 건 그녀가 아직 별다른 스킬을 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즉, 순수 신체 능력만으로 미리내의 공격을 피하고 있다는 뜻.
‘아무리 진심으로 공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피하다니.’
미리내가 입술을 깨물며 속도를 높였다. 모다온이 공격을 피하느라 미끄러진 틈을 타 미리내가 몸을 비틀어 발차기를 날렸다.
“이크.”
예상치 못한 공격에 모다온이 점프해 소파를 뛰어넘었다. 뒤이어 찔러 들어오는 단검을 손에 잡힌 쿠션으로 막았다.
찌이익-
천이 찢기는 소리가 나면서 쿠션 안에 있던 솜뭉치가 터져 나왔다.
그 틈을 타 모다온이 거리를 벌렸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그녀의 실력에 미리내는 점차 진지하게 임했다.
숨을 내쉰 미리내가 일단 호텔 기물의 위치를 파악하고 가벼운 공격을 하며 모다온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벽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미리내가 단검을 휘두르자 모다온이 상체를 뒤쪽으로 내뺐다.
‘지금!’
급소를 노린 일격이 터지기 직전, 모다온의 스킬이 발동됐다.
미리내의 뛰어난 동체 시력이 이능의 흐름을 잡아챘다. 상태 이상 ‘환각’을 말소하며 모다온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게 순간 이동…….’
그야말로 찰나였다. 게다가 잔상이 남지 않아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다행히 ‘아테네의 시선’은 모다온의 모션을 빠짐없이 분석했고 미리내는 알아낸 것을 곱씹느라 잠깐 멈춰 있었다.
뒤에서 모다온의 밝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어때요? 감이 와요?”
“다시 한번 보여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미리내가 의욕을 보이자 모다온은 마치 동심으로 돌아가 친구와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신나 했다.
미리내가 공격하고 모다온이 회피하는 동작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제 손을 잡고 같이 이동해 봐요.”
“그게 가능해요?”
“제게서 떨어지지 마세요.”
방긋 웃은 모다온이 미리내의 손을 깍지 꼈다. 미리내는 기감을 곤두세웠다.
스킬이 발동되는 것과 동시에 이능의 흐름이 찌릿 하고 피부에 와닿았다.
어느새 그들은 창가 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미리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런 게 가능하다면…….”
앞으로 던전 공략 방법이 무궁무진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개인 전투에서도 활용도가 높을 터였다.
미리내의 눈동자에 환희가 들어찼다.
그 변화를 옆에서 지켜본 모다온이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도움이 됐나요?”
“네. 정말 고마워요, 모다온 씨.”
스킬, ‘아테네의 시선’을 아직 거두지 않은 미리내는 그녀가 느낀 것, 알아낸 것, 최적화 방법 등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넣었다.
이제 훈련 시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다온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바로 다음 스킬 ‘맞은 만큼 덜 아프다’를 해 볼까요? 그 전에…….”
“그 전에?”
모다온이 샐그러지게 눈가를 휘었다.
“먹지 못하는 묵이 뭔지 아세요?”
“네?”
“침묵이에요! 하하하.”
예고 없이 튀어나온 아재 개그에 미리내가 멈칫했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오경애가 터질 게 터졌다는 듯 이마를 쳤다.
주변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모다온은 두근두근한 표정을 했다.
“양이 높은 곳에 있으면?”
“……뭘까요?”
“고양이죠!”
“하, 하하…….”
미리내는 모다온을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 몇 차례 더 만나게 될 것 같은데, 모다온의 개그 코드에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될 것 같았다.
***
“흐아암.”
솔은 길드 휴게실에 늘어져 있었다. 던전 공략 일정도 없었고 친구들은 저마다 바쁘니 방해하기도 미안했다.
그녀는 무료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휙휙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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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만한 게 없네.”
늘어지게 하품을 한 솔은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모바일 게임 공략 영상을 시시덕거리며 보던 솔의 눈에 한 게시물이 들어왔다.
[익명게시판] 상암에 ㅇㅇㅅ 뜸
“엥. 설마 이거 유은새?”
솔이 게시물을 클릭했다. 이미 댓글은 만선이었다.
댓글(406개)
⤷설마 유은새?
⤷요즘 목격담 많이 뜨네.
⤷뭐 하는데 지금?
⤷⤷몰라. 스치듯 지나가면서 본 게 다라서.
⤷지금 상암 가면 유은새 실물 볼 수 있냐?
솔이 벌떡 일어났다. 은새는 어제 지방으로 던전 공략을 갔다. 그러니 서울에서 목격담이 뜰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요새 은새를 둘러싼 저급한 소문들부터 시작해 헌터 폭행 사건까지 일어나 수상하게 여기던 차였다.
은새에게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날렸지만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혀를 찬 솔은 사실 확인을 위해 자차를 끌고 상암으로 달려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게시물의 댓글을 새로 고침 했다.
⤷유은새 지금은 어디 있어?
⤷⤷막 스카이 빌딩 지나감
⤷⤷이제 진성 아웃렛 들어가는 것 같은데?
하필 사람 많은 곳에!
솔은 차를 길가에 아무렇게나 세워 두고 진성 아웃렛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 어. 저기 남궁솔 헌터다!”
“헉, 진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솔은 유은새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알아본 직원이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여기에 유은새, 아니 유은새 닮은 사람 왔어요?”
“네? 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은 무전기로 대고 무어라 말했다. 솔은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보챘다.
“CCTV! CCTV 확인 가능해요?”
“그건 남궁솔 헌터님이라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직원이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내색을 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솔의 눈치를 봤다.
헌터 중에는 일반인을 무시하고 위협하는 부류가 꽤, 많이 있었다.
알려진 바로 솔이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혹시 몰랐다. 어쩐지 굉장히 초조한 모습이었기에.
“하, 씨.”
솔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감을 넓게 펼쳤다.
일반인과 헌터가 복작복작하게 섞여 있었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이런 방식으로는 특정할 수 없었다.
“쯧!”
솔은 마지막 희망으로 게시물을 새로 고침 했으나 아까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글이 삭제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뭐야? 꼭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솔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