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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84)화 (84/190)

83화 – 뇌물은 챙겨 드려야지

벨키오르와 유하는 자리를 옮겨 거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마당에서 놀던 별이와 봄이는 손발을 씻겨 안으로 들여보냈다. 놀이방에서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고 벨키오르는 물끄러미 유하를 바라봤다.

유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은새의 친구들은 인간치고는 담이 큰 듯싶었다.

벨키오르가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새가 없을 때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염치 불고하지만, 부탁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인간이, 나에게?”

벨키오르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인간이 겁 없이 자신에게 부탁을 해 온 게 이걸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은새의 친구라는 한우리였다. 그는 은새의 저주를 풀 방도를 알아내고자 벨키오르를 찾아왔다.

조금 흥미가 동한 벨키오르가 머리를 기울였다.

“거래인가?”

“그렇습니다.”

유하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상식으로는 정당한 등가교환만 있을 뿐 호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정에 약한 인간들에게 야속하게 비칠지 모르나 고작 은새와 연이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벨키오르가 사정을 봐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의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동공이 샐쭉 세로로 가늘어진 벨키오르가 팔짱을 꼈다.

“드래곤과 한 거래의 대가는 무겁다. 말한 적 있을 텐데.”

“기억하고 있습니다. 각오하고 왔습니다.”

유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벨키오르를 직시하는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온 건 아닌 모양이군. 벨키오르가 다리를 꼬며 대답했다.

“들어 보지.”

“제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스승?”

벨키오르는 제가 맞게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드래곤에게 스승이 되어 달라고?

……인간이?

생전 처음 듣는 유형의 요청이었다. 그는 바로 거절하지 않고 내막을 캐물었다.

“자세히.”

“얘기를 하기에 앞서 저희 세계에 대해 간략한 설명부터 해 드릴게요.”

“음.”

“이 세계에 던전과 마수라는 위기가 닥친 건 고작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미증유의 사태에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종말론이 대두되고 실제로 거의 그 직전까지 갔었어요.”

미리 준비한 것처럼 유하의 말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고 지금 보시는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습니다. 헌터라는 이능력자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는 급속도로 안정을 찾는 듯 보였어요. 그래도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 있어요.”

말을 하는 유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던전 사태가 터진 지 고작 10년이다.

치안 유지가 잘 되고 국가 동원력이 뛰어난 한국에서조차 불법 헌터가 성행하는데 아예 정부 통제력을 잃고 국가 자격을 포기한 나라는 어떻겠는가?

이건 그나마 먼 나라 얘기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어도 전 세계적으로 등장하는 고등급 던전이 문제였다.

던전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저와 제 친구들은 인간 중에서 제법 강한 축에 속하지만 그게 모든 위험을 막아 낼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몇 가지 이상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유하가 심각한 표정으로 손깍지를 껴 무릎에 올렸다. 그는 지난 몇 달간을 떠올렸다.

던전 이상 현상과 스텔라 본의 예언.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시스템’이 도입된 대전 미로 던전이었다.

대전 던전에는 이례적으로 ‘아큘라의 미로’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붙어 있었다.

‘아큘라’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바가 없었다.

유하는 그와 비슷한 특수 던전이 또 나타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이러다 멸망급의 던전이 출현하면 생존을 점치기 어려워지겠지요. 그래서 저와 제 친구들은 더 강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은새가 갑자기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던전 투어를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고요.”

“그래서?”

“우리와 솔이는 연구팀과 협력해 기술 개발을 하고 있고, 미리내와 인찬이는 조언을 해 줄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댈 만한 곳이 없었다. 유하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도 많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이 이것이었다.

“전에 말씀하신 적 있지요. ‘그 능력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 쓰다니.’라고요.”

도천 크루가 벨키오르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은새의 집 근처에서 힘을 겨루었던 적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벨키오르에게 얻어터졌던 기억. 격이 다른 강함에 절망하면서도 유하는 그때 벨키오르가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벨키오르 님이라면 제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부정은 안 하겠다.”

“그러니 제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유하가 머리를 숙였다. 미동 없는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벨키오르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성장할 실마리를 찾는 거라면 꼭 스승이 필요치는 않을 텐데.”

“저는 단물만 빼 먹고 튀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유하는 고개만 살짝 들어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는 단순한 기술 습득 말고 더 큰 것을 노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벨키오르 님과 사제지간이라는 끈끈한 유대감으로 엮이고 싶습니다.”

“…….”

“안 되겠습니까?”

세계 최초로 드래곤 스승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두는 것이었다. 현 인류 중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 아닌가.

‘잘만 풀리면 콩고물을 왕창 얻어먹을 수 있을 거야.’

유하는 벨키오르에게 결코 특별한 존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이미 은새가 있지 않은가.

그가 원하는 건 벨키오르가 ‘딱하군. 제자라고 들인 게 이다지도 쓸모없다니.’ 하면서 마지못해 알려 줄 자잘한 지식이었다.

그런 지식이라도 그에게는 확실하게 도움이 될 테니까.

거래는 하나씩 주고받아야 하는 거지만 사제지간은 딱 잘라서 그걸 나눌 수 없다.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가 아닌 굳이 ‘스승이 되어 달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뭐든지 장기적으로 봐야지.’

그런 흑심을 숨이고 유하는 간절한 눈빛을 했다. 부디 이 방법이 먹히기를.

“…….”

한편 벨키오르는 희한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유하를 바라봤다. 몬텔라보다도 더 뻔뻔하고 당돌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한데.’

감이 좋은 벨키오르는 유하의 목적이 대충 짐작이 갔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로 묶이면 그는 유하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한다.

제자는 스승의 것을 받아먹되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위치이니 결국 유하에게 득이 되는 거래였다.

‘제법 머리를 썼어.’

인간 주제에 그를 상대로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하다니. 오랜만에 그의 흥미를 돋우는 일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제 내막은 들었고, 벨키오르의 결정만이 남았다.

“거절하지.”

“재고해 주시죠.”

벨키오르의 단호한 거절에도 유하는 굴하지 않았다. 그 뻔뻔함에 벨키오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당키나 한 말이라고 생각하나?”

“아예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벨키오르의 시린 눈빛을 유하는 담담히 받아 냈다.

냉각되는 분위기에 돌연 유하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은둔하는 강호는 심지가 바위보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고 우직하기가 대쪽 같으니까요.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막 떠나려던 유하가 ‘아.’ 하고 걸음을 멈춰 되돌아왔다.

“이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만.”

그가 품에서 비닐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벨키오르 앞에 내려놨다.

벨키오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유은새 인생샷 9종입니다.”

거래를 성사시키려면 뇌물은 챙겨 드려야지.

***

[모다온: 매니저한테 허락받았어요. 그럼 약속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요?]

어제 오후에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열어 보며 미리내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비록 미리내가 부탁한 일이었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왠지 순진한 사람 꼬드겨서 갈취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허락받았다는데 ‘아니에요.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할 수도 없어서 미리내는 약속 장소로 갔다.

모다온이 머무르는 호텔에 도착해 매니저에게 연락하자 오경애가 마중 나왔다.

어딘가 해탈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미리내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정말 제가 모다온 씨의 스킬을 전수받는 걸 허락하셨나요?”

“네. 다온 씨가 원하기도 했고, 최미리내 헌터의 인품은 저도 잘 아니까요.”

미리내와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온 오경애가 카드 키를 찍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다온 씨의 스킬이 현직 헌터 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잘된 일이지요. 다만 외부에는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째서인가요?”

“그날 다온 씨와 만나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다온 씨가 좀 맹한…… 아, 아니. 순진한 구석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연주회를 다녀서 머리가 꽃밭…… 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어떤 여파를 미칠지 감을 못 잡아요.”

“네.”

중간중간 삐끗하는 오경애의 말을 들으며 미리내는 쓰게 웃었다.

처음 보는 그녀에게 아재 개그를 치며 까르륵거리던 모다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경애가 해 준 설명도 들으니 외부에 비밀로 해 달라는 오경애의 말이 이해가 갔다.

모다온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접근할지 몰랐으므로.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렇다고 다온 씨가 아무한테나 호의적인 건 아니에요. 아마 그날 최미리내 헌터가 다온 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두 사람은 오경애가 가진 카드 키로 객실을 열고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모다온이 튕기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최미리내 헌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모다온 씨. 잘 지내셨어요?”

“그으럼요.”

모다온이 미리내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그 모습이 꼭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같았다.

하필 머리도 금발이라, 골든 리트리버를 연상하게 했다.

오경애는 멀찍이 떨어져 있고 모다온과 최미리내가 마주 보고 섰다.

“세 시간 후에 연주회 일정이 있어서 오래는 못 있어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최미리내 헌터라면 금방 스킬을 이해하실 거예요. 시작해 볼까요?”

“네.”

미리내의 수락에 모다온이 두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였다.

“일단 저를 공격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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