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오, 중국 놈들 또 이러네!”
우리가 에이패드를 책상에 내던졌다. 꺼지지 않은 화면에는 중국에서 만든 너튜브 영상이 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중국어가 우리의 귀를 어지럽혔다.
[춘티엔더야오칭은 영원한 중국의 상징이죠. 괜히 화타의 신수로 불리는 게 아니에요.]
[유은새 헌터가 춘티엔더야오칭 부화에 성공해서 기뻐요. 그녀는 중국의 영웅이죠. 오, 그녀는 한국인 아니냐고요?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유은새 헌터는 중국 친화적이고 거의 명예 중국인이나 다름없는데.]
[보세요, 한국 헌터들과 있을 때와 달리 유은새 헌터가 편안해 보이죠?]
[(은새가 해외 파견 갔을 때 중국 헌터들과 같이 찍은 사진)]
[한국 헌터들은 유은새 헌터를 억압하고 있어요. 특히 도천 길드가. 저희 눈에는 보여요.]
[유은새 헌터! 우리 중국은 당신과 춘티엔더야오칭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우리가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두드려 영상을 정지시켰다. 징글징글한 감정이 치솟았다.
“얘네는 선동과 날조 빼면 남는 게 뭐야? 명예 중국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런다고 은새 국적이 달라져?”
문제는 이런 영상이 좀비처럼 증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그들의 압박에도 한국 정부와 한국 헌터 협회, 도천 길드가 굴복하지 않자 자국의 유명 헌터나 연예인들, 정치인들을 이용해 영상을 찍어 내기 시작했다.
주로 ‘춘티엔더야오칭=중국의 상징’임을 내세우거나 은새가 중국 친화적인 헌터임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신고를 먹여도 각설이처럼 돌아오는 영상들 때문에 우리가 화를 안 내는 날이 없었다.
“이런 영상이 1억 뷰나 되다니.”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골머리를 싸맸다.
무시가 답이지만 또 가만히 있으면 호구 잡혀서 더 교묘하고 자극적인 영상들을 뿌려 댈지 몰랐다.
이러다 어느 순간 은새를 중국인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그런 영상이 있어서 도천 길드 법무팀에서 대응 중이었다.
“짜증 나니까 우리도 영상 하나 만들어? 좀 있으면 추석이니까 은새 한복 입히고 봄이랑 태극기 앞에서 명절 인사라도 하게 해?”
……꽤 괜찮은 생각인데?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전투적으로 기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부술 듯이 두드리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길드장님.”
“어. 들어와.”
우리의 비서가 사무실을 가로질러 왔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는데, 최근 저희 길드 주식과 관련해 해외 시장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주식?”
우리가 비서가 내민 에이패드를 확인했다. 스크롤을 내리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라임 사모펀드? 벌써 4.1%나 먹었어? 로엘 여기는 3%. TCI 인베스트먼트 1.7%. 이 세 곳이 눈에 띄는 곳이야?”
“네. 세 곳 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투자사인데 꽤 공격적으로 저희 주식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금의 출처가 불명확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에이패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방금 전 봤던 영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거 중국 아니야?”
“자세히 조사해 보라고 할까요?”
“하동연 부장한테 말해서 이 세 곳 파 보라고 해. 변동 사항 있으면 바로 알려 주고.”
“네.”
비서가 나간 뒤 긴 한숨을 내쉰 우리가 책상에 꾸물꾸물 늘어졌다.
“길드장 해 먹기 힘들다…….”
우리는 새삼 도천 그룹이라는 대기업을 이끄는 아버지와 형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일개 길드조차 이끌어 가기 힘든데.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는 벌떡 일어나 쓰다만 기획서를 마저 작성했다.
그래, 중국이든 어디든 덤벼 보라 그러지. 우리 도천 길드를 건드리면 아주 주옥 되는 거야.
우리의 눈에 오랜만에 투지가 타올랐다. 타닥타닥 타자 치는 소리가 한참 동안 사무실을 울렸다.
***
은새가 외출한 사이 별이와 봄이는 마당에 나와 있었다.
벨키오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별이 허리에 오동통한 손을 얹고 말했다.
“봄이, 얼른 힘을 사용해 봐!”
삐?
봄이 순진무구하게 머리를 갸웃했다. 흙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봄이의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렸다.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별이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너 아직 능력을 제대로 못 쓰자나. 누나가 필요할 때 나처럼 도움이 돼야지!”
그간 별이는 봄이를 훈련시키려고 벼르고 있었다.
집에서 막내라고, 아기라고 너무 부둥부둥만 받아 능력을 개화한 이후 발전이 없는 봄이었다.
은새는 ‘크고 난 뒤에 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별이의 생각은 달랐다.
마수는 새끼라도 마냥 약하지 않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릴 때부터 생존본능이 발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봄이는 야생에 내던져 놓으면 하루도 못 버티고 삑삑 울기만 할 것이다.
별이는 봄이가 걱정됐다. 마수는 마수다워야지.
무엇보다 언제까지고 은새가 봄이를 지켜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누나는 인간이니까 우리가 지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강해져야 해!
이런 생각의 흐름으로 별이는 봄이의 선생님을 자처했다.
“잘 들어 바. 혹시 누나가 다쳐서 못 움직이게 되면 어떡할 거야?”
삐빗!
봄이가 펄쩍 뛰었다. 봄이에게 은새는 든든한 보호자이자 보금자리였다.
그런 그녀가 맥없이 다친다는 게 봄이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물론 누나는 강해서 쉽게 안 다칠 테지만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음.’ 하고 별이가 예시를 덧붙였다.
“구래, 예전에 누나를 따라갔던 곳에서 언데드 몬스터를 만났었지? 끔찍하게 생긴 마수들. 걔들이 누나를 끌고 가면 어떡해?”
삐, 삐빗, 삐!
봄이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언데드 몬스터는 봄이의 머릿속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불쾌한 냄새가 나고 흉측하게 생긴 괴물들.
만약 은새가 그 무서운 마수들에게 끌려간다면…….
봄이는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삐…….
“어어, 울지 말구!”
별이가 봄이를 끌어안아 달랬다. 봄이를 토닥이던 별이 별안간 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힘을 키워야 해. 약한 채로는 누나를 지킬 수 업써!”
삐!
봄이가 의욕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네 발로 우뚝 선 봄이는 별이를 재촉했다.
뭐부터 하면 돼? 어떻게 하면 돼?
적극적인 태도에 별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섬주섬 미리 가져다 놓은 식물 백과사전을 펼쳤다.
“일단! 여기 나와 있는 것들을 자라나게 해 보자. 너는 할 쑤 있어.”
삐이!
“봐 봐!”
아이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별이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팡팡 내리쳤다.
“이거, ‘금작화’! 약초래. 효능은 자음(滋陰), 화…… 혈(和血)? 건비(健脾)? 래.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나한테 도움이 될 거야.”
삐?
“자, 이 꽃으로 마당을 가득 채우는 거야!”
별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봄이를 쳐다봤다. 봄이는 책과 별이를 번갈아 보다가 끄응, 하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봄이의 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
별이 크게 실망했다.
“너 왜 못 해? 그럼 이건? ‘금장초’라는 거야. 지해(止咳), 화담(化痰), 청열(淸熱)…… 음, 해독의 효능이 있대.”
한자로 쓰인 단어의 뜻을 아이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봄이는 사진을 뚫어지게 보면서 똑같이 생긴 것을 자라나게 하려고 용을 썼다.
삐! 삐!
그러나 기운만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별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왜 안 되지? 이러케 하는 게 아닌가?”
그때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벨키오르가 조언했다.
“현시점에서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기는 어려울 테니, 먼저 꽃의 마수가 의욕을 가지고 목적을 떠올리면 그에 걸맞은 식물이 자랄 거다.”
“구래요? 봄아, 아빠 말대루 한번 해 보자!”
삐!
봄이는 현재 느끼는 감정을 담아 이능을 뿜어냈다. 분홍색 아지랑이가 마당을 뒤엎자 봄바람처럼 따뜻한 온풍이 불어왔다.
잔디만 있었던 땅에서 새싹이 하나둘 솟아났다. 싱그러운 푸른 잎이 결실을 맺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모양도 향기도 다른 색색의 꽃들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봄이가 달려들어 꽃들을 옴뇸뇸 다 먹어 치웠다. 별이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봄이 너…… 배고팠어?”
삐빗!
해맑게 대답한 봄이는 신나게 만찬을 즐겼다. 별이가 ‘으이구!’ 하면서 옆에 같이 앉아 꽃구경을 했다.
그러다 호기심이 솟은 듯 꽃 한 송이를 따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은새가 봤으면 말렸겠지만 벨키오르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몸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원래 어릴 때는 아무거나 입에 넣고 그런 것이다.
놀고 있는 별과 봄을 무심히 지켜보던 벨키오르가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에 시선을 옮겨 울타리 밖을 바라봤다.
‘누군가 왔군.’
잠시 뒤 자동차 한 대가 은새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 이는 유하였다.
마당으로 들어온 유하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벨키오르를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