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말해.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마
[듀……. 오랜만이야.]
마르모르는 인사하면서도 주변을 경계했다. 쫑긋 선 귀가 주위의 소리를 빠짐없이 담아냈다.
극도로 불안해하는 모습에 듀가 마르모르를 달랬다.
[괜찮아, 나 혼자 왔어. 계속 이곳에 있었어?]
[아니. 타데아 님이 그렇게 되고 나서…… 계속 도망 다녔어. 금수만도 못한 놈들을 피해.]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면, 용살자들?]
[맞아. 타데아 님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어. 조용히 설원에서 지내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자들이 다 망쳤어.]
마르모르가 털을 부풀리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타데아에 대한 그리움,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키지 못한 자책감, 인간들에 대한 분노 등이 뒤섞여 쏟아졌다.
[울지 마, 마르모르…….]
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마르모르의 등을 쓸어내렸다.
주인을 잃어 본 경험이 없는 듀는 지금 마르모르가 느끼고 있을 절망이 얼마나 클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마르모르.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나와 함께 신역으로 가는 게 어때?]
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세계수 님은 너를 환영해 주실 거야.]
[내가 설원을 떠나 어떻게 살아가겠어.]
고개를 저은 마르모르가 젖은 눈으로 새하얀 언덕을 바라봤다.
[내게는 이곳이 고향이야. 타데아 님과 평생을 함께한.]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에 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요하지는 않을게. 그래도 마음 바뀌면 언제라도 나를 불러.]
마르모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듀는 망설이다가 조금 불편한 얘기를 꺼냈다.
[그자들이 타데아 님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분과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용살자들이 쳐들어왔어.]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모르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라도 타데아의 억울한 죽음을 알아주길 바라서였다.
[선두에 선 것은 인간도 신도 아닌 존재. 반쪽짜리 신. 인간들은 그자를 ‘하야트 님’이라고 불렀어.]
[하야트.]
듀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벨키오르에게 알릴 중요한 정보였다.
[용살자들이 찾아오자 타데아 님은 가장 먼저 나를 피신시키려고 하셨어. 하지만 안 가겠다고 버텼지.]
마르모르는 주인의 위험을 온몸으로 느꼈다. 제 주인의 강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죽어도 타데아 님 곁에서 죽고 싶었어. 하지만 타데아 님은 그걸 허락하지 않으셨지…….]
타데아는 틈을 노려 마르모르를 멀리 보냈다. 결국 홀로 떨어진 마르모르는 타데아가 없는 곳에서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타데아 님이 보고 싶어. 그분이 가시는 모습도 나는 보지 못했어…….]
[마르모르…….]
다시금 마르모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마르모르를 쳐다봤다.
눈물을 꾹 참은 마르모르가 부르르 고개를 털고선 말했다.
[듀, 내가 너를 부른 건 알려 줄 게 있어서야. 용살자들이 시작의 드래곤 님을 찾고 있어.]
[뭐? 벨키오르 님을?]
듀가 펄쩍 뛰었다. 우리 주인님을 노리는 건가?
듀가 예민하게 반응하자 마르모르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자들이 신역의 위치를 묻는 걸 들었어. 세계수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건지, 시작의 드래곤 님을 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유구하게 인간들이 노리는 대상이었다. 용사부터 악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그리고 그 세계수를 지키는 시작의 드래곤 벨키오르는 그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
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벨키오르 님은 현재 이 세계에 없어. 후계자님과 함께 외부 세계에 가 계셔.]
[외부 세계? 왜?]
[마음에 드는 인간 여자가 생겼거든.]
[……어? 정말이야?]
마르모르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여태 우울해했던 걸 잊고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벨키오르에 대한 소문은 마르모르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반려를 찾는 데 평생을 바친 드래곤.
하지만 그런 것에 비해 냉엄하고 결벽스러운 성격 탓에 누가 곁에 머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잘된…… 일인가? 그렇지?]
[맞아! 적어도 그 인간 여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벨키오르 님도 외롭지 않으실 테니까.]
[반려일까?]
[모르겠어. 하지만 가능성이 있겠지?]
[외부 세계의 인간과 연을 맺다니, 역시 시작의 드래곤 님은 비범하시구나.]
타데아의 죽음으로 줄곧 시름에 잠겨 있던 마르모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마르모르의 미소를 본 듀가 날개를 퍼덕이며 기뻐했다.
[마르모르, 언제나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해.]
헤어지기 전, 마르모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댄 듀가 말했다.
[세계수 님도 네 안부를 염려하셔.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응.]
조심스럽게 닿는 온기에 마르모르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얼마 만에 느끼는 다른 이의 온정일까.
타데아가 죽은 뒤로 이런 따뜻함은 느끼지 못했다. 그런 감정은 마르모르에게 사치였다.
하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친구 덕에 조금은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고마워. 또 봐.]
듀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세계수 님에게 오늘 들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한시바삐 가야 했다.
마르모르는 멀어지는 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침내 가고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마르모르가 뒤를 돌았다.
그런데.
“한발 늦었군.”
[……! 용살자!]
눈 밟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기척을 죽이고 지척까지 다가온 드래곤 슬레이어들이었다.
맨 앞에 선 장신의 사내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거칠게 자라난 보라색 머리카락, 그리고 살기가 깃든 붉은 눈동자.
하늘의 신 모아누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남자가 한 목걸이에서 선명한 신의 조각이 느껴졌다.
마르모르는 꿈에서도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타데아의 레어를 습격해 온 무도몰륜한 반쪽짜리 신, 하야트.
[타데아 님의 원수!]
“방금 떠난 가고일이 시작의 드래곤이 부리는 수족인가? 생각보다 이르게 꼬리를 잡을 수 있겠어.”
하야트의 얼굴에 비정한 미소가 어렸다. 듀가 날아간 방향으로 그의 시선이 돌아가자 마르모르가 몸집을 부풀렸다.
귀여운 눈토끼의 모습이던 마르모르는 몸집이 큰 털북숭이의 괴물로 화했다.
한때 북쪽 설산을 지배했던 마수, 예가티가 마르모르의 본모습이었다.
[크르르르!]
마르모르의 위협에 하야트가 픽, 하고 웃었다.
“내게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주인의 죽음으로도 깨닫는 게 없는 건가?”
[내 기필코 네놈의 사지육신을 갈가리 찢어발길 테다!]
“하야트 님,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어요?”
“예가티는 처음 보는데. 그저 그런 마수들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느낌이기는 하네.”
예가티의 등장에도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태평하게 수군댔다. 하야트는 자신만만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물러나 있어. 철저히 고문해서 아는 걸 다 토해 내게 해 주지.”
[크르르르!]
마르모르는 눈이 뒤집혀서 하야트에게 달려들었다. 마르모르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타데아 님, 타데아 님, 타데아 님!’
살육밖에 모르던 제게 살아가야 할 의미를 만들어 준 존재.
자비로움으로 자신의 허물마저 감싸 안아 준 드래곤. 그게 타데아였다.
타데아는 마르모르를 제 아이처럼 돌봐 주고, 사랑해 주었다. 마르모르 또한 부모처럼 그를 따랐다.
고립된 설산 낙원에 있어도 둘이라서 외롭지 않았다. 마르모르에게 타데아는 주인 이상이었다.
[크륵…… 크륵…….]
하얀 눈밭에 붉은 피가 낭자했다.
마르모르가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상대는 고룡마저 베어 넘긴 살육자였다. 마르모르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하야트가 쓰러진 마르모르의 목에 검날을 들이대고 협박했다.
“너는 시작의 드래곤이 있는 위치를 알겠지? 말해.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마.”
[허튼…… 소리!]
마르모르가 반항했다. 검날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줄줄 흘러도 마르모르는 개의치 않았다.
하야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니면 아까 본 가고일을 불러도 좋다. 그편이 낫겠군. 마수들 사이에 지킬 의리가 있나?”
하야트는 빙글빙글 웃으며 음험하게 속삭였다.
“잘 생각해. 네가 죽으면 설원의 드래곤이 슬퍼하겠군.”
마르모르가 으스러지게 이를 악물었다. 비열한 그 얼굴에 당장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어차피 살려 줄 생각 따윈 없으면서. 악마의 속삭임이 따로 없었다.
‘역시 이자는 시작의 드래곤 님을 노리고 있어!’
절대 알려 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듀를 부를 생각 따위 없었다.
‘듀, 아까 한 인사가 마지막 인사가 되겠구나.’
고마워, 나의 친구.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
마르모르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매서운 눈빛으로 하야트를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신랄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인간도 신도 되지 못한 존재여, 무고한 생명을 해친 죄로 너는 가장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겠구나. 인과율이 내리는 형벌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며 너는 벌레만도 못한 삶을 죽지 못해 이어 가겠지.]
“뚫린 입이라고!”
그것은 마치 영험한 신탁과도 같았다. 단순히 떠들어 대는 말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흥분한 하야트의 검이 마르모르의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출생에 관한 말은 하야트의 역린이었다.
피를 왈칵 쏟으면서도 마르모르는 입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비천하고 비천하도다.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네놈의 몸에 흐르는 피가 달라지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