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단순히 방패 역할이라도 좋아
“어……. 제게요?”
모다온이 눈을 끔벅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현직 헌터가 제게 이능 관련으로 조언을 청하다니.
살짝 당황하는 듯한 그녀를 보고 미리내가 말했다.
“모다온 씨는 버퍼인 동시에 혼자서 던전을 공략할 만큼 강한 헌터시죠.”
“부끄러운 말씀이네요.”
“저는 힐러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동료들을 서포트하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음……. 동료분들이 그러라고 하시던가요?”
“아니요. 순전히 제 의지예요.”
미리내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모다온은 미리내의 진심을 느꼈다.
그녀가 입술을 매만졌다. S급 헌터인 만큼 미리내는 웬만한 스킬은 다 가지고 있을 터였다. 가만히 생각하던 모다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알고 싶으세요?”
“모다온 씨의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이라는 회피기와 ‘맞은 만큼 덜 아프다’라는 피해를 치유로 전환하는 스킬을 전수받고 싶어요.”
“아, 그거요.”
모다온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어렵지 않죠. 좋아요.”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건가요? 그런 건 기업 비밀로 치부되는데요.”
말이 전수받겠다는 것이지, 스킬을 카피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라도 더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경쟁하는 헌터들에게는 예민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되레 미리내가 모다온을 걱정했다. 하지만 모다온은 해맑게 말했다.
“고유 능력이라면 전수가 어렵겠지만 스킬인걸요. 저만 그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 사람…… 호구인가?
미리내는 아연실색했다. 모다온에게서 뭐라도 얻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찾아왔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쉽게 허락하는 것 같은데. 미리내가 무게를 잡고 얘기했다.
“모다온 씨, 다시 잘 생각해 보세요. 자기 밑천을 선뜻 내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미리내 헌터가 제 스킬을 이로운 일에 써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
“아닌가요?”
말이 안 통한다. 모다온이 의외로 고단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미리내는 일단 자리를 뜨기로 결정했다.
이러다 어영부영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제 용건은 전달했으니 매니저님과 상의해 보고 결정해 주세요. 절대, 혼자서 결정하지 말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알겠어요. 그런데 저 혹시…….”
말끝을 흐리는 모다온을 미리내가 차분히 응시했다. 역시 속셈이 따로 있었나?
뭐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곧 모다온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식물이 뭔지 아세요?”
“네?”
“뷰티풀이에요. 하하하!”
미리내는 일순 멍해졌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그녀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모다온은 신이 나서 종알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큰 콩은?”
“……설마.”
“홍콩이에요! 재미있죠?”
“하, 하하…….”
“또, 또요. 산타클로스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아세요?”
“…….”
“등산! 산타니까요!”
미리내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때아닌 아재 개그란 말인가.
그녀의 머릿속에 모다온이 유명인인 것치고 신비주의를 고수한다는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이래서…….’
본 모습을 꼭꼭 숨기는 이유가 있었어. 모다온이 이런 걸 좋아한다는 게 알려지면 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리내는 담당 매니저의 고충을 이해했다. 그녀는 매니저의 정신 건강을 위해 못 들은 척을 하기로 했다.
그편이 미리내 본인에게도 이로울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리내가 모다온에게 말했다.
“연락처는 매니저님한테 있으니까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기다릴게요.”
“벌써요? 아쉽다…….”
정말로 아쉬운 듯 모다온이 팔자 눈썹을 했다. 그러다 곧 ‘바쁘신 분을 오래 붙잡아 두면 안 되겠죠.’라며 미련을 털어 내듯 말했다.
정말로 바쁜 사람은 자기 아닌가?
미리내가 다시 한번 당황했으나 모다온은 벌써 그녀와 작별할 준비를 마쳤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살펴 가세요~”
모다온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네, 그럼…….”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 미리내가 어설프게 인사하며 대기실을 나섰다.
***
“어서 오세요, 카페 르 블럼입니다!”
일을 마친 인찬은 길드 근처 카페에 왔다.
그는 아이스 초코 라떼를 한 잔 시키고 창가의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주변에서 그를 알아보고 알은체를 해 왔다.
“서인찬 헌터시죠? 팬이에요!”
“같이 사진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예, 찍어 드릴게요.”
인찬은 적당히 응수해 주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하는 건 별로 없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기사 뜬 거 있는지 읽어 보고 개인 SNS에 달린 댓글 확인하고.
단톡방에 올라온 시답잖은 소리에 대충 답해 주고.
바쁜 척 손가락을 움직이던 인찬은 행여 누가 말을 걸어올세라 이어폰을 꼈다.
요즘 인기 있는 걸 그룹 노래를 틀어 놓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쪼오옥. 초코 라떼의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맴돌았다.
‘강해지기 위한 노력이라.’
인찬은 지난번에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를 며칠째 곱씹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도천 크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한국 헌터 랭킹 1위 한우리. 도천의 두뇌 최미리내.
화염 계열의 독보적인 일인자 남궁솔. 누구나 탐내는 원거리 딜러 김유하.
그리고 세계 유일의 몬스터 테이머 유은새.
그들은 S급 헌터라는 위명답게 강했고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 그들이 ‘강함’에 대해 고민하는 게 의외였다.
“나야말로 더 발전해야 하는데.”
인찬이 빨대로 초코 라떼를 휘휘 저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실 그들 사이에 낀 자신은 조금 부족했다. 능력 면에서나 성격 측면에서나.
S급이라고 다 같은 S급이 아니다.
태생 S급인 그들과 다르게 인찬은 A급에서 훈련을 거듭해 등급이 상승한 케이스였다.
인찬은 친구들과 있을 때 가끔 본인 스스로도 모자람을 느꼈다.
그는 친구들보다 이능 활용도도 떨어졌고, 헌터로서의 자질 또한 부족했다.
능력을 객관적인 수치로 표시할 수 있다면 친구들은 100이고 자신은 80쯤 되지 않을까.
‘내가 부족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가끔 뒤에서 사람들이 저를 보고 ‘친구 잘 둬서 호강하네.’라고 수군거리는 걸 알고 있었다.
맞는 소리였기에 인찬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멋진 친구들이었고 이런 이들을 어디서 또 만날까 싶었다.
물론 인찬은 우리와 미리내, 솔, 유하, 은새가 S급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친한 친구들이기 때문에 곁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즐거웠기 때문에.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지.’
쪼로로록.
어느새 초코 라떼가 바닥을 드러냈다. 인찬은 아쉽게 빈 잔을 옆에 내려놨다.
친구들은 점차 강해지고, 또 더 강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자신만 그대로라니. 민폐가 따로 없었다.
적어도 따라가는 시늉은 해야지.
‘미리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만약에 우리 힘만으로 공략 불가능한 던전이 나타나면 어떡해?]
SSS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높은 난도의 던전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인찬은 다른 것보다도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고 싶었다.
적어도 그들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죽지 않게 하고 싶었다.
‘단순한 방패 역할이라도 좋아. 내 힘을 더 발전시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가 주머니에서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거기 적힌 이름을 손으로 매만졌다.
S급 헌터 길아연.
5년 전까지 존재했던 세화 길드의 길드장이자 ‘함락의 수호자’로 불렸던 이였다.
인찬 이전에 가장 유명했던 탱커였다. 지금은 프리랜서 헌터로 활동하고 있지만.
‘부산이라.’
인찬이 다이얼 화면에서 열한 자리 숫자를 꾹꾹 눌렀다.
***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신역.
벨키오르와 아기가 자리를 비운 이곳에, 그의 수족인 듀가 와 있었다.
듀는 벨키오르의 명령을 받고 신역을 대신 지키고 있었다.
풀밭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듀는 피오오, 하고 우는 산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뭐!]
듀는 부리나케 세계수에게 달려갔다. 동물들의 안식처가 돼 주던 세계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니?]
[세계수 님, 세계수 님! 저 잠시 지상에 내려갔다 와도 될까요?]
[왜?]
[그게, 타데아 님의 수족이었던 마르모르를 찾았어요!]
[……마르모르를?]
세계수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타데아는 얼마 전 죽음을 맞이한 설원의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마르모르는 타데아의 곁을 늘 지키고 있던 수족이었다. 극악무도한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손에서 마르모르가 살아남았다는 게 놀라웠다.
세계수는 흔쾌히 허락했다.
[다녀오렴. 마르모르에게 그날 타데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물어봤으면 좋겠구나.]
[네!]
세계수의 허락을 받은 듀는 날아서 신역을 벗어났다. 산새가 알려 준 곳까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타데아의 레어와 멀지 않은 극지방. 눈이 소복이 쌓인 그곳에 듀가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여기가 맞는데? 어디 있지?]
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힘을 개방하며 잠시 기다리니 두 귀가 쫑긋한 하얀 솜뭉치 같은 게 구르듯이 뛰어나왔다.
듀가 반색하며 마르모르를 맞았다.
[마르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