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우리 팀 힐러가 미쳤어요
시뮬레이터실을 나오며 미리내가 중얼거렸다. 기실 그녀의 포지션은 힐러였다. 게다가 S급.
공략에 나선 팀원들을 죽지 않게 하고 적절한 오더를 내리는 것만으로 그녀는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리내는 부족함을 느꼈다. 계기가 된 것은 벨키오르와의 만남과 대전 미로 던전이었다.
특히 후자에서 미리내는 능력 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다. 처음 겪는 까다로운 스테이지와 골드 스타 팀의 계략.
아무리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지만 상대측에 수를 읽힌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자신은 친구들을, 길드원들을 책임지는 입장이었다. 부족함을 깨닫고도 정체되어 있을 수 없었다.
‘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대비해야 해.’
지난번과 같은 무력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나거나, 돌파하기 어려운 상황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그 해답을 찾고 싶었다.
“아, 개운하다.”
미리내는 샤워실로 가 씻고 나왔다. 자택으로 돌아가기에는 늦은 시간이라 길드에 마련된 수면실로 향했다.
그녀는 잠들기 전 핸드폰으로 기사를 서치했다. 길드에 도움 되는 자료 위주로 찾아보고 있는데 그때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시아헌터] 이능 플루터니스트 모다온, ‘한여름 밤의 음악회’ 개최 위해 한국으로 입국
“모다온……? 모다온 씨가 입국한다고?”
미리내가 누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스크롤을 빠르게 내렸다.
“진짜네.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거의 2년 만인가?”
모다온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악기’로 마수를 사냥하는 헌터였다. 원래 플루터니스트였던 그녀는 각성하고도 연주를 그만두지 않았다.
대신 버퍼로서 공략팀에 참가했다. 그녀는 이능을 실은 연주로 아군의 회복력을 증가시키고 능력을 증폭하며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어찌 보면 힐러와 역할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유 능력, ‘환영 극장’은 버퍼가 아니어도 혼자서 던전 하나쯤 격파가 가능했다.
미리내는 시야가 환해지는 걸 느꼈다.
힐러는 아니지만 힐러와 비슷한 능력을 다루면서 독보적인 위치에 선 자.
이능 자체도 강하고 스킬 활용에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헌터.
혹시 모다온을 만나면 강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일까?
미리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락처 목록을 뒤져 이곳저곳에 전화했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한국 1위 길드 부길드장의 연락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최미리내입니다. 혹시 모다온 씨와 자리를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활동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시간에 천창현은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가로등이 줄지어 선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의 얼굴은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했다.
그때 핸드폰 불빛이 깜박였다. 천창현이 화면을 터치하자 끼고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창현 헌터, 타깃이 지금 막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계속 지켜봐 주세요.”
통화한 상대는 천창현이 부리는 불법 헌터였다. 골드 스타 길드의 눈을 피해 그는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불법 헌터들이 하는 일은 주로 누군가의 감시, 도청, 협박, 암살 등이 주를 이뤘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천창현은 복잡한 도심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타깃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천창현이 낡은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보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공간.
“이만 가 보세요. 수고비는 넉넉하게 넣었어요.”
천창현이 남자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것을 챙긴 남자는 말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창현은 주변에 CCTV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볍게 벽을 박차고 올랐다. 6층 603호.
여름이라 창문이 열려 있었다. 잠겨 있어도 따고 들어갔을 테지만.
천창현이 기척을 죽이고 집 안에 들어섰다. 그는 방에서 곯아떨어진 타깃을 발견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남성. 그는 오늘 낮에 각성한 파릇파릇한 헌터였다.
팔자 좋게 늘어져 자고 있는 남자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천창현이 그자의 목을 졸랐다.
“크헉! 누, 누구…….”
“…….”
천창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타깃이 잠에서 깨 버둥거렸다.
“컥, 크억…….”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도 천창현은 멈추지 않았다. 외려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허, 허억…….”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남자의 눈이 뒤집혔다. 오그라들었던 팔과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마침내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천창현은 맥이 뛰는지 확인했다. 타깃이 확실하게 죽었다고 판단되자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서 짙은 검붉은색 이능이 흘러나왔다.
“B급 헌터 곽현성. 스킬 ‘체인 블래스터’ 잘 받아 간다.”
***
“야, 이거 과자 맛있다. 신상인가?”
“나 주스 좀 더 줘.”
“야야! 그거 내가 찜해 놨었어!”
오랜만에 도천 길드 S급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콜라와 사이다, 그리고 과자 봉지를 늘어놓고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었다.
“여기가 너희들 놀이터냐. 다른 데 가서 좀 놀아라.”
또 사무실이 점거당한 우리만이 불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그도 어울려 놀았다.
그때 소리를 작게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금일 금성 그룹은 제조 포션의 해외 수출을 확정하는 한편…….]
솔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제조 포션 얘기 지긋지긋하다. 우리도 뭐 터트릴 거 없어? 연구팀 불러올까?”
“솔이 너 연구팀 좀 그만 괴롭혀. 너 때문에 연구팀원들이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진다고.”
우리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솔을 붙잡았다. 솔이 어리둥절해했다.
“에엥? 그게 왜 내 탓이야? 여름 타나 보지. 삼계탕이라도 사 먹여.”
“여름을 타긴. 네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눈치 주니까 그렇지.”
“눈치 준 거 아니거든? 나는 격려한 거야!”
“간부가 찾아오는데 퍽이나 힘이 나겠다. 우리는 그걸 꼰대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하지만 그럼 어떡해. 골드 스타가 잘나가는 거 꼴도 보기 싫은데.”
솔이 종이컵을 질겅질겅 씹었다. 옆에서 유하가 ‘네가 염소야? 종이 말고 과자 먹어.’ 하면서 문어 모양 과자를 솔의 입에 한가득 쑤셔 넣었다.
“읍, 읍! 우웩, 김유하 너 죽을래?”
“챙겨 줘도 난리네.”
유하와 솔이 티격태격했다. 그 꼴을 보며 우리가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하여튼 자중해. 포션 연구는 텄고, 던전 식물을 이용한 희귀병 치료제 개발로 가닥을 잡았으니까.”
“쳇. 어디서 제조 포션 부작용 사례 안 터지나?”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그렇게 외치는 솔을 친구들이 아연하게 바라봤다.
“심보 좀 곱게 써라.”
“남궁솔 인성 보소.”
“사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 우리 빼고 다 망했으면 좋겠다.”
친구들의 비난을 가볍게 넘기며 솔이 주스를 들이켰다.
[다음 소식입니다. 이능 플루터니스트 모다온 씨가 금일 오전 10시경 입국했습니다. 3주간 진행되는 ‘한여름 밤의 음악회’를 위해 약 2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모다온 씨는…….]
때마침 알맞은 화제가 흘러나오자 미리내가 서두를 열었다.
“얘들아 나, 모다온 씨를 만나 보려고.”
“응? 왜? 팬이야?”
은새가 의외라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인맥 넓기로 소문 난 미리내라서 모다온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모다온이 연간 일정이 꽉 짜인 유명인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미리내가 자처해서 누굴 만난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은새의 질문에 미리내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팬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모다온 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무슨 도움?”
“음……. 내 이능을 발전시킬 방법이 없는지 확인해 보려고.”
“모다온 씨한테 버퍼 스킬이라도 배우려는 거야?”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내 전투 방식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솔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과자 가루를 입가에 묻힌 채로 솔이 떠들었다.
“엥? 미리내 너 힐러에서 딜러로 전향하려고?”
“아니야. 힐러라도 활용하는 스킬에 따라 기여도가 달라지잖아? 좀 더 다채롭게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해서.”
“결론은 강해지고 싶다는 거 아니야?”
긴 설명에서 유하가 핵심을 찔렀다. 미리내가 멋쩍게 긍정했다.
“맞아.”
“세상에, 마상에. 우리 팀 힐러가 미쳤어요. 지금도 차고 넘치는데 나서서 스펙 증진이라니?”
“설마 미리내 너 요새 길드 소속 A급들이랑 팀 짜서 훈련하는 거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고. 겸사겸사.”
사실 맞았지만 미리내는 친구들의 호들갑에 애써 진실을 감추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본 은새가 선뜻 머리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 나도 계속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푸훕, 은새 너는 왜?”
우리가 당황하며 마시던 콜라를 뱉었다.
“에구, 더러워. 길짱, 먹을 것을 질질 흘리면 어떡해. 턱받이 해 줄까?”
“남궁솔, 꺼져. 휴지는 내놓고.”
우리가 솔이 낄낄대며 내민 화장지를 가로챘다. 그는 입가를 닦고 은새의 대답을 기다렸다.
종이컵을 쥔 채로 생각하던 은새가 담담히 말했다.
“그냥. 지금 상황에 너무 안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유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는 ‘얘 드래곤한테 빠져서 강해지려고 하는 거다!’라고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