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하지만 애가 있잖아?
벨키오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미처 몰랐다. 하지만 은근슬쩍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보다 그녀의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신선하기도 했다.
“그자를 다시 볼 일이 있나?”
“아마 없을 거예요.”
은새가 고개를 저었다. 활동 영역이 겹치는 것도 아니고, 헌터와 일반인이었다. 도천 그룹 창립 기념식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원래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 정도로 안면을 붉혔으면 어디선가 만나더라도 최인호가 은새를 무시할 공산이 컸다.
그런 타입은 자존심이 다치면 크게 화를 내니까. 물론 은새가 피해 볼 건 없었다.
“그런가.”
벨키오르는 다행스러움과 동시에 미약한 아쉬움을 느꼈다. 만약 그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더라면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줬을 텐데.
가볍게 혀를 찬 그가 불현듯 오종환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그는 벨키오르의 시선이 닿자 움찔거렸다. 날이 선 눈빛에 꿀꺽 침을 삼켰다.
“왜, 왜요? 형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혹 이런 일이 생기면 내게 알려 줄 수 있나?”
“네에? 벨키오르 님, 오종환 헌터에게 왜 그런 부탁을 하세요?”
갑작스러운 벨키오르의 행동에 은새가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서슴없이 다가오는 온기에 벨키오르가 멈칫했으나 한번 내린 결정을 무르지는 않았다.
묘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오종환이 과하게 눈을 반짝였다.
“이런 일이라면 어떤 거요? 누가 유은새 헌터한테 사심을 갖고 접근할 때요? 아니면 무례한 행동을 했을 때요?”
“둘 다.”
“아, 당연히 알려 드려야죠! 제가 또 이런 부탁은 거절하지 않거든요. 촉새처럼 물어다 드릴게요.”
“촉새가 좋은 뜻은 아닐 텐데…….”
오종환의 뒤에 있던 이예나가 혼잣말하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신만 빼고 진행되는 대화에 은새는 홀로 다급해졌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벨키오르가 자신을 과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왠지 부끄러웠다. 벨키오르의 눈에는 자신이 안 돌봐 주면 안 되는 미숙한 아이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은새가 급하게 벨키오르와 오종환 사이로 끼어들었다.
“벨키오르 님, 신경 써 주시는 건 고마운데 안 그러셔도 돼요.”
“은새. 그대가 앞가림쯤은 알아서 잘할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본인 일에만 그대가 안일하게 구는 것도 사실이다.”
“제가 언제 그랬어요…….”
“오오, 형님. 유은새 헌터를 아주 잘 파악하고 계시네요!”
보지 않아도 어쩜 그리 잘 아시는 거죠?
호들갑 떠는 오종환을 은새가 콧잔등을 찡그린 채 노려보았다. 그러나 별반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빠, 저두여! 저두 잘할 수 있어요!”
삐빗!
자신 있는 얼굴로 별이가 나서자 봄이도 자신도 하겠다고 벨키오르에게 달려들었다.
벨키오르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도 나쁘지 않겠지.”
봄이는 몰라도 별이는 잘할 것이다. 은새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별이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이들까지 가세하자 은새는 더 말리는 걸 포기했다. 살면서 최인호 같은 자가 아예 없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자신이 빠르게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은새는 속으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오종환이나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면 벨키오르에게도 말이 들어가지 않겠지.
한편 이예나와 엘레나 킴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분…… 유은새 헌터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지?’
‘응. 유은새 헌터는 눈치 못 챈 듯.’
세상 어떤 남자가 아무 사심 없이 저런 걸 부탁한단 말인가. 게다가 은새가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걸 알자마자 싸늘히 분노하던 태도.
어디로 보나 확실했다. 그녀들의 직감이 그린라이트를 맹렬히 울렸다.
이예나와 엘레나 킴은 냉정하게 벨키오르의 스펙을 따졌다. 은새에게 아무 남자나 갖다 붙일 수는 없었으니.
능력, 최상급.
체급, 최상급.
외모, 감히 비교 불가능한 신급.
‘하지만 애가 있잖아?’
커다란 결격 사유였다. 하지만 그 애가 은새를 잘 따르는데? 은새도 아이를 너무 좋아하고.
……그러면 상관없지 않을까?
골똘히 생각한 이예나가 결정을 내렸다.
‘나는 찬성.’
‘나도 찬성.’
그들은 나란히 앉은 은새와 벨키오르를 보며 설렘을 느꼈다. 유은새 헌터가 드디어 연애를 하는구나!
여태까지 스캔들은 여러 번 났었지만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은새였다.
마치 한 편의 두근두근 로맨스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예나와 엘레나 킴은 팝콘 대신 말린 바나나 칩을 입에 던져 넣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했다.
“누나, 나 졸려요…….”
별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은새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오래 버텼네.’
그녀는 별이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아이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벨키오르가 봄이를 챙겨 일어났다.
은새가 헌터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다들 이만 자러 가요. 밤이 늦었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유은새 헌터.”
“아침에 뵙겠습니다!”
“형님도 좋은 밤 되십쇼!”
“고마워요. 오늘 즐거웠어요. 다들 잘 자요.”
은새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벨키오르는 대답 없이 돌아섰다. 집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침실에 누이며 은새가 입을 열었다.
“오늘 즐거웠죠?”
“그래.”
“다음에 또 오늘처럼 놀아요.”
어둠 속에서 벨키오르의 금색 눈동자가 은새를 오롯이 담았다.
“그대가 원한다면.”
은새는 그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
“왕호연, 이 등신아 우리 망했어!”
퍽!
갑작스러운 통증에 왕호연이 눈을 떴다. 그는 지난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웅웅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왕호연이 성질을 냈다.
“뭐야, 양설. 왜 이래?”
“유은새가 빠져나갔어. 여론도 다 뒤집혔다고!”
양설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번역된 기사와 댓글이 떠 있었다.
왕호연이 느릿느릿 스크롤을 내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렇게 쉽게 빠져나간다고?”
“생각보다 유은새의 가드가 단단해. 진짜 범인을 잡는다고 난리야. 그래 봤자 못 잡을 테지만.”
양설이 팔짱을 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중국 청화 길드 소속인 그들은 얼마 전 막중한 임무를 띠고 한국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입국한 이래 유은새의 평판을 망가뜨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왕호연의 능력은 환술, 양설은 변용술이었다.
그들이 능력을 합친다면 작업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왕호연과 양설이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물꼬가 트여 유은새의 평판이 쭉쭉 떨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순식간에 여론이 뒤집히다니. 어쩐지 너무 쉽게 일이 풀린다 싶었다.
왕호연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아소 부길드장님께 연락 왔어?”
“어. 서두르래. 춘티엔더야오칭이 유은새의 마수라고 국제 사회에 인정받기 전에.”
양설이 엄지손톱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녀는 단순히 작전 실패라고 보기에는 극도로 불안해했다.
“이대로는 안 돼…….”
“…….”
“유길선 길드장님이 우리를 쓸모없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 절대로…….”
씹힌 엄지손톱이 달랑거렸다. 양설은 한쪽으로 모자라 다른 쪽 손도 가만두지 않았다.
피를 보기 전 왕호연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양설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를 대강 정돈하고 왕호연이 옷을 갈아입었다.
“다음 작전으로 들어가자.”
그를 따라 일어선 양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보내 버리겠어.”
***
“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쉰 미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현재 시뮬레이터 훈련실에 있었다.
도천 길드 A급들과 팀을 이루어 눈앞의 마수를 공략하는 데 집중했다.
“배진혁 헌터, 샤이호크의 약점은 뿔이에요! 녹두야, 흑야일색! 마수를 정신없게 만들어!”
“네!”
미리내의 지시로 김녹두가 이능을 발현했다. 흑야일색은 착란을 일으키는 정신계 스킬이었다.
어두운 연기 같은 그의 이능이 샤이호크를 덮쳤다.
정통으로 스킬을 맞은 마수가 휘청거렸다. 그 틈을 노려 배진혁이 일격으로 뿔을 날려 버렸다.
“한이영 헌터, 스플래시!”
미리내가 다시 한번 지시를 내렸다. 스플래시는 여러 대상을 동시에 공격하는 광역기였다.
스킬이 발동되자 미리내가 증폭을 사용해 위력을 상승시켰다.
무수한 빛 화살들이 공중에서 쏟아졌다. 샤이호크 주변에 있던 다른 마수들이 쓸려 나갔다.
“막타는 제가 칩니다!”
한이영의 바로 뒤에 있던 김수진이 ‘카이저의 칼날’을 개방했다. 길게 뻗은 이능이 샤이호크를 절단 냈다.
[25단계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셨습니다.]
시스템이 공략 성공 메시지를 띄웠고 헌터들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돌렸다.
미리내는 그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힐로 체력을 회복시켜 줬다. 그들이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부길드장님, 오늘 훈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같이 훈련해 주세요!”
“그래요. 들어가 봐요.”
미리내가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헌터들이 떠난 뒤 그녀는 공략 장면을 돌려보며 과연 효율적인 전투였는지를 냉철하게 따져 보았다.
‘여기서는 배진혁 헌터가 좀 더 깊게 파고들어 찔러도 됐을 것 같아. 한이영 헌터는 아직 합을 맞추는 게 어색하네. 녹두의 이 스킬은 잘만 활용하면…….’
개선 방향을 한가득 적은 파일을 미리내가 옆구리에 꼈다. 최근 그녀는 이런 식으로 길드 소속 헌터들의 전력 상승을 돕고 있었다.
“벌써 10시가 넘었네.”
기지개를 켜던 미리내가 어둠이 내린 창밖을 바라봤다. 낮에 훈련을 시작했건만 이미 밖은 깜깜했다. 훈련실에는 이제 그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피곤함을 느낀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이렇다 할 효과가 없는 것 같네.”
사실, 다른 헌터들의 훈련을 돕는 건 목적이 있어서였다.
미리내 본인이 강해질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 그러나 아직까지 큰 성과는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