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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76)화 (76/190)

75화 - 저 인기 없어요

바비큐 파티는 슬슬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맛있게 먹고 난 뒤 아이스박스에는 고기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치열했던 먹부림에 주변이 엉망이었다. 헌터들이 뒷정리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벨키오르가 마법으로 뚝딱 해치웠다.

새것처럼 깨끗해진 그릇과 철판을 붙잡고 헌터들이 솜사탕 씻은 너구리 같은 얼굴을 했다.

배도 채웠겠다, 그들은 별 구경을 하며 돗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은새도 벨키오르 옆에서 아이들과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별아, 봄아. 안 졸려?”

“하나두 안 졸려여.”

삐빗!

별과 봄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은새가 그런 아이들의 등을 쓸어내렸다.

“졸리면 언제든지 말해. 억지로 참지 말고.”

“네에.”

별은 히히 웃으며 은새의 무릎에 얼굴을 폭 묻었다. 포근한 은새의 향기가 맡아졌다.

‘누나랑 함께인 이 순간이 너무 좋아.’

별은 되도록 오래 깨어 있을 생각이었다. 누나가 먼저 자러 가자고 하기 전까지 버텨야지.

어리광을 부리는 별이를 쳐다보던 벨키오르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건 뭐였지?”

“네? 아, 수박씨 뱉기요? 그거 그냥 게임이에요. 조금 보기 웃겼죠.”

벨키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인간들이 갑자기 막 시끄러워지더니 과일 씨를 얼굴에 붙이고 바보같이 낄낄대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실속 없는 일에 열광하는 모습이 한심하기도 했다. 은새가 그 사이에 끼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왜 그런 걸 하는 거지?”

“재미있으니까요? 벨키오르 님 세상에서는 그런 거 안 해요?”

“일단 동족들이 하는 걸 본 적은 없다.”

“하하, 하긴. 그렇게 예쁘고 멋지신 분들이 그런 걸 할 것 같지는 않아요.”

은새는 산체스를 떠올렸다. 그런 기품 있고 우아한 분이 수박씨 뱉기라니.

애초에 벨키오르가 사는 세계에 수박씨 뱉는 놀이가 있으려나.

“하지만 내기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하지.”

“예를 들면요?”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을 수 있나. 신들에게 들키지 않고 천계의 꽃을 몇 송이나 꺾어 올 수 있나. 고룡의 코털을 뽑아 온다든가. 산을 들어서 옮긴다든가. 그런 것.”

은새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정말요? 장난꾸러기 같아요. 의외네요.”

벨키오르는 말을 아꼈다. 실제로 보면 그런 귀여운 단어로 칭할 수 없을 텐데.

특히 천계의 꽃을 꺾어 오는 건 위험한 행동이었다. 걸리면 육신이 속박당하는 걸로 끝나지 않으니까.

“드래곤들도 그런 내기를 하는군요. 재밌겠어요.”

“긴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유희도 필요하니까.”

“얼마나 긴 생일지 저는 상상도 안 가요.”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억겁의 세월이지.”

“그렇군요.”

은새는 벨키오르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해 봤다. 그 긴 세월 동안 혹시 외롭지는 않았을까.

벨키오르에게 ‘외로움’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그리 즐겁게 지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은새와 벨키오르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헌터들 쪽에서 소란이 들렸다. 오종환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 맞다니까!”

“누가 아니래? 그냥 믿을 수 없다는 거지. 패리스 리, 아내도 있는 사람 아니야?”

“어, 5년 전에 할리우드 배우랑 결혼했어. 그러니까 염치가 없다는 거지.”

툴툴거리는 오종환에게 은새가 질문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유은새 헌터. 예전에 ‘흔들리는 절벽’ 던전으로 파견 나갔을 때 미국인 헌터 패리스 리가 엄청 추저분하게 굴었었죠? 제 말이 맞죠?”

아, 그때 그 남자인가. 은새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오종환은 열변을 토해 냈다.

“공략 내내 패리스 리가 유은새 헌터한테 같잖은 플러팅이나 하고 한물간 벽치기 같은 거 하고, 자꾸 유은새 헌터를 우리한테서 빼돌리려고 했다고. 길드장님이 되게 짜증 냈었는데.”

“패리스 리 젠틀한 이미지라 좋아했는데, 진짜 깬다.”

“역시 유은새 헌터예요!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군요!”

“서호랑, 너 몰랐냐? 해외 유명 헌터들 중에서 유은새 헌터를 이상형으로 꼽은 사람 되게 많아.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고 SNS에 글도 올리고.”

은새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맞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개인 SNS를 통해 연락해 오는 해외 유명 헌터들이 많았으니까.

엘레나 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은새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도천 그룹 창립 기념식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김유하 헌터한테 들었는데 K미디어 대표가 유은새 헌터한테 집적대다가 혼쭐이 났다고요.”

유하야……. 은새가 속으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없는 그가 대답할 리 만무했다.

은새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유은새 헌터도 피곤하겠네요. K미디어 대표면 K그룹 차남 최인호 말하는 거죠? 듣기로 되게 무례하고 안하무인이라던데. 제 친구가 최인호 회사 경호팀으로 일한 적 있는데 진짜 인성 나가리래요.”

“와,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면 힘드셨겠어요. 욕보셨네요.”

“그게 무슨 말이지?”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벨키오르가 질문했다. 그는 패리스 리의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살짝 기분이 나빠진 상태였다.

도통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는 벨키오르가 나서자 은새와 헌터들이 눈을 깜박였다.

오종환이 이때다 싶어 벨키오르의 옆으로 가 종알거렸다.

그는 미로 던전에서 벨키오르의 도움을 받은 뒤로 그에게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지켜보니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그게 말이죠, 형님. 유은새 헌터가 남녀 가릴 것 없이 인기 많은 건 알고 계시죠?”

형님?

처음 듣는 기이한 호칭에 벨키오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오종환의 말을 막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의 뒷부분이 신경 쓰였다.

은새가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아니에요, 벨키오르 님. 저 인기 없어요.”

“겸손하시기는. 제가 없는 소리를 했나요? 사실인걸.”

“맞아요! 유은새 헌터 인기 엄청 많아요!”

눈치 없이 서호랑이 끼어들었다. 엘레나 킴이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이예나가 오종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그는 그저 킬킬거렸다.

“하여튼, 가끔 있어요. 주제도 모르고 유은새 헌터한테 껄떡대는 놈들이. 그 최인호라는 자식도 그래요. 제가 김유하 헌터한테 들었는데 유은새 헌터한테 수작 부리다가 안 되니까 소리를 질렀다지 뭐예요?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오종환 헌터…….”

은새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벨키오르가 나지막하게 별을 불렀다.

“별.”

“네, 아빠!”

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자세히 보고 들었을 것이다.

“그자가 정확히 뭐라고 했지?”

“벨키오르 님, 별일 아니었어요. 별아, 아니야. 그런 거 말 안 해도 돼.”

당황한 은새가 별의 말을 막자 벨키오르가 전음을 보냈다.

[말해라.]

[움……. 나두 그때 기분 나빴어요. 누나 막 무시했어. 누나랑 친한 인간들한테도 나쁜 말 했어!]

[어떻게?]

[누나보고 자꾸 밥 먹자고 그러구. 누나가 싫다고 했는데 막 소리치고 누나 때리려고도 했어요!]

별이는 파티장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아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벨키오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종내에 이르러 은새에게 손까지 올렸다는 말을 듣고 그의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은새에게 접근한 남자가 있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저조했다. 하지만 이내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은새를 모욕한 자가 있다는 사실에 벨키오르가 서늘히 분노했다. 어째서…….

‘어째서 나에게 한 마디도 안 했지?’

은새는 사소한 일도 자신에게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

전날 밤에 어떤 꿈을 꾸었는지, 낮에 무슨 일을 하면 좋겠다든지, 밤에는 뭘 먹고 싶다든지.

시시콜콜하게 뭐든 얘기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그녀의 별일 아닌 이야기를 듣는 걸 익숙하게 즐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째서.

평소와 같은 사소한 일도 아니었는데 왜 자신에게 얘기하지 않았지?

그의 시선이 은새에게로 향했다.

“은새.”

“네, 네?”

은새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벨키오르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기분이 저조해진 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왜 내게 숨겼지?”

벨키오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은새가 우물쭈물했다.

“어……. 숨긴 건 아니고요. 좋은 얘기가 아니라서 말을 안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진짜 별일 아니었어요. 저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사실이었다. 은새는 이미 그 일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었다.

그녀는 안 좋은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세상에 행복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일로 심력을 소모한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

벨키오르가 눈가를 찌푸렸다. 은새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저기, 혼자 가지 않았는데요. 친구들이랑 같이 갔어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은새가 눈동자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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