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돌잡이 때 수박씨를 잡았습니다
벨키오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는 박도윤과 팀원들이 먹던 걸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걸 느꼈다.
“그대나 챙겨라.”
“에이, 맛있게 쌌어요. 드셔 보세요.”
“…….”
“안 드실 거예요? 저 팔 빠지는데?”
은새가 천연덕스럽게 엄살을 피웠다. 그녀의 재촉에 벨키오르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적당한 크기로 싼 쌈은 그의 입에 쏙 들어갔다. 은새가 눈을 반짝거렸다.
“맛있죠!”
벨키오르는 조용히 입에 든 것을 씹었다. 고기와 채소와 쌈장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독특한 맛이 났다.
솔직히 맛있는 줄 모르겠으나 은새가 그렇다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웃은 은새가 또 쌈을 쌌다. 그리고 몇 번이나 벨키오르의 입에 집어넣었다.
잘 받아먹는 그를 보며 은새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음식물을 삼킨 벨키오르가 질문했다.
“그대는 먹었나?”
“애들 챙겨 주면서 먹고 있어요.”
벨키오르는 잘 익은 꼬치를 은새에게 쥐여 주었다.
“애들만 챙기지 말고 그대부터 먹어.”
“제법 많이 먹었는데. 그래도 사양하지는 않을게요.”
양념이 잘 된 닭고기를 호호 식혀 입에 넣자 풍부한 육즙이 새어 나왔다.
파 향과 어우러져 잡내도 나지 않았고 특유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마치 처음 먹는 것처럼 은새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어쩜 고기가 이렇게 질기지도 않고 부드럽죠? 벨키오르 님은 요리 천재 같아요.”
“굽기만 했을 뿐인데 별소리를 다 듣는군.”
“이런 건 비법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경지예요. 진짜 맛있다.”
은새는 연신 감탄하며 꼬치를 집어 먹었다. 잘 먹는 그녀를 보는 벨키오르의 눈동자에 다정한 빛이 어렸다.
꼬치를 뒤집는 그의 손길이 어느새 점점 빨라졌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은새가 별이와 봄이에게 질문했다.
“얘들아, 우리 디저트 뭐 먹을까?”
“시원하고 달콤한 거요!”
“참, 수박 있는데. 수박 먹을래?”
“네!”
삐빗!
별이와 봄이가 머리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은새는 주방으로 가 수박 다섯 통을 들고 나왔다.
양 옆구리에 끼고 탑처럼 쌓아 거의 묘기에 가까웠다.
고기를 먹던 서호랑이 얼른 뛰어가 세 통을 대신 들었다.
“어이쿠, 유은새 헌터! 제가 하겠습니다!”
“저기까지만 날라다 줘요. 고마워요.”
“이 정도로 뭘요. 팍팍 부려 먹으십시오!”
서호랑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수박을 나른 은새는 칼로 큼직큼직하게 썰어 식사를 거의 마친 마수들과 헌터들에게 나눠 줬다.
별이와 봄이의 몫은 한 입 크기로 작게 잘라 그릇에 담았다.
“더 있으니까 부족하면 말해요.”
“예!”
벨키오르에게도 자른 수박을 건네고 은새는 그의 옆에 앉았다.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을 모두가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한창 먹는 중에 은새는 서호랑이 따발총처럼 수박씨를 뱉는 걸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수박을 먹다 보면 꼭 하게 되는 내기가 있다. 수박씨 이마에 붙이기.
은새와 같은 생각을 한 오종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대결 한번 하지? 누가 누가 이마에 수박씨 많이 붙이나~”
“에이 우리는 헌터라 그런 거 너무 쉽지.”
“당연히 업그레이드 버전이지. 수박씨 뱉어서 모양 만들기. 못 알아보면 탈락.”
“오~ 머리 좀 썼는데. 그래도 쉽지 않아?”
이예나가 얕보듯 말하자 오종환이 울컥했다.
“수박씨 뱉기가 쉬워? 장난이야?”
“왜 이래요, 아저씨. 좋아. 하자, 하자. 유은새 헌터도 같이 하시죠!”
“저도요?”
아이들에게 수박을 먹여 주던 은새의 눈이 동그래졌다. 음, 재밌겠네. 은새는 순순히 내기를 받아들였다.
“좋아요.”
“오, 좋습니다!”
“자, 자. 이런 내기에는 보상이 있어야지. 뭐 걸까?”
“유은새 헌터의 애장품!”
엘레나 킴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은새는 어리둥절해졌다.
“내 애장품이요? 너무 약하지 않나?”
“좋다, 좋아. 난 유은새 헌터가 쓰던 거라면 뭐든 좋아.”
“유은새 헌터, 부담 가지지 마세요. 팬들에게 선물 준다고 생각하세요.”
“근데 그러면 유은새 헌터는 내기에 참여하는 의미가 없는 거 아니야?”
“유은새 헌터가 우승하면 우리가 가진 돈 다 털어서 선물해 드려야지. 어때요?”
은새가 턱을 매만졌다. 가벼운 내기라고 해도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음. 그래도 아무거나 줄 순 없죠. 이건 어때요?”
은새가 아공간에서 아이템을 하나 꺼냈다. 귀걸이 한 쌍이었다. 유니섹스한 디자인이라 누구나 사용 가능했다.
“바벨로니아의 기적. 100초 동안 무적이 되는 아이템이에요. 어떤 물리 공격, 정신계 공격도 안 통하고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해요.”
“……! 그걸 주신다고요?”
“아니, 저희는 그냥 약소한 걸 바란 건데요. 손수건이나 아끼는 머그컵 같은…….”
“그런 건 좀 변태 같지 않아?”
“변태라니! 순수한 내 팬심을!”
오종환과 엘레나 킴이 투덕거리는 걸 보고 은새가 빙긋이 웃었다.
“에이, 그래도 내기인데 상품이 좋아야죠. 그럼 저는 참가 안 하고 심판할게요.”
“그래요. 아, 의욕 넘친다! 기필코 우승하고야 말겠어!”
“화려하고 정교한 모양이면 가산점 주실 거죠?”
“네에. 대신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어야 해요.”
“물론이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헌터들이 눈을 반짝이며 승부욕을 드러냈다.
수박씨 이마에 붙이기가 어쩌다 행위 예술이 되었나. 은새는 허허 웃었다.
헌터들은 수박을 빠른 속도로 먹어 치우며 씨를 장전했다. 그리고 순서를 정했다.
“첫 번째 선수, 입장합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박도윤이 머쓱해하며 걸어 나왔다. 원래 그는 이 유치한 내기에 끼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은새 헌터가 상품을 내걸지 않았나. 아이템이 좋든 아니든 박도윤은 참가했을 것이다.
은새의 애장품이라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서호랑의 구호에 맞춰 정신을 가다듬은 박도윤이 수박씨를 뱉었다. 한 발, 한 발 신중했다.
“끝났습니다.”
“그럼 확인해 볼까요?”
박도윤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도천’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일일 사회자를 맡은 서호랑과 이예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 박 팀장님~ 길드에 대한 애사심을 수박씨로 표현했어요!”
“대단합니다. 이 자리에 한우리 길드장님이 있었으면 크게 감동하셨을 거예요.”
“그럼 유은새 헌터, 점수 주시죠!”
은새가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처럼 뜸을 들였다.
“제 점수는요…….”
“두구두구두구.”
“80점입니다.”
“예?! 생각보다 낮은데 점수 산정 기준이 뭡니까?”
예상보다 짠 점수에 헌터들이 놀랐다. 은새는 차분히 설명했다.
“정자로 쓴 것처럼 반듯하고 깨끗하지만 창의성이 부족해요. 하지만 애사심을 높이 쳐 가산점 드렸습니다.”
“가산점을 받고 80점이라니. 이거, 어렵겠는데요. 다음 선수 입장하세요!”
박도윤이 묘하게 처진 어깨를 하고서 들어갔다. 곧이어 준비하고 있던 엘레나 킴이 나왔다. 그녀는 입을 우물거리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톡, 톡, 톡. 하늘 높이 날아간 수박씨가 엘레나 킴의 얼굴에 떨어졌다.
“다 하셨나요? 그럼 보여 주시죠.”
“저는 유은새 헌터에 대한 제 마음을 표현해 봤습니다.”
엘레나 킴의 이마에는 하트가 있었다. 은새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제 점수는요…… 80점입니다.”
“아니, 어떻게! 아부와 아첨이 통하지 않는 유은새 헌터입니다. 유은새 헌터, 감상 말씀해 주시죠.”
“마음은 잘 받았습니다. 다만 하트를 꽉 채웠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아~ 아쉽습니다. 90점의 벽을 넘기 어렵네요. 그럼 다음 선수!”
세 번째로 나온 오종환은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씨를 뱉었다. 그리고 수박씨로 얼굴을 뒤덮었다.
“저는 창의성을 발휘해 추상화를 그려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오…… 난해합니다, 난해해요. 유은새 헌터, 점수는요?”
“탈락. 탈락이에요. 뭘 그렸는지 전혀 못 알아보겠잖아요.”
“크으, 발상은 좋았으나 룰에서 벗어나 실격 처리되었습니다!”
“아~ 아쉽다.”
다음은 이예나였다. 이예나도 자신 있게 수박씨를 뱉었다. 정해 놓은 위치에 씨가 톡톡 내려앉았다.
“오오오.”
“안정적인 자세.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것 같은데요. 공개해 주시죠!”
이예나가 고개를 들어 은새를 바라봤다. 그녀의 이마에는 검은 장미 한 송이가 있었다.
은새가 감탄했다.
“99점 드리겠습니다. 창의성, 정교함 모두 완벽하네요.”
“99점 나왔습니다! 현재 1위입니다! 과연 서호랑 선수, 이예나 선수의 독주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서호랑이 스스로를 소개하며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자신 있게 씨를 뱉어 별 모양을 만들었다.
별이가 좋아했지만 결국 참신함과 정교함에서 밀려 86점으로 패배. 이예나의 승리였다.
“축하해요. 부디 잘 써 주시기를 바라요.”
은새가 ‘바벨로니아의 기적’을 이예나에게 전달했다. 이예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서호랑이 숟가락 마이크를 그녀에게 건넸다.
“승리의 비결이 뭔가요?”
이예나는 세상을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돌잡이 때 수박씨를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