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친구들이 화를 내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자 은새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은새가 하하, 소리 내어 웃으니 그들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됐어. 나는 괜찮아. 그보다 다들 슬슬 배 안 고파? 여기 음식 맛있다.”
“뭐가 제일 맛있는데?”
“이거랑 이거. 그리고 또 이거. 버터 슈림프 아보카도 부르스게타도 맛있어.”
“오, 그럼 먹어 봐야지.”
은새의 추천에 언제 그랬냐는 듯 흉흉한 기색을 없애고 S급들은 핑거푸드를 만찬처럼 먹었다. 그들은 샴페인이 든 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별은 은새가 손에 쥐여 준 까망베르 사과 샌드위치를 냠냠 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아까 그 인간한테 복수한 건 비밀로 해야지.’
별이 히죽 웃었다.
***
한편 연회장을 벗어난 최인호는 타이를 거칠게 풀며 차에 올랐다.
그는 K그룹 회장이 나이 예순에 얻은 늦둥이 차남으로 떠받듦만 받고 자랐다. 그래서 오늘 일을 대단히 모욕적으로 느꼈다.
그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앞좌석을 발로 뻥뻥 찼다.
“유은새 미친 거 아니야? 이 나를 적으로 돌려? 하!”
태어나서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유명한 헌터라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그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얼굴 좀 반반해서 어울려 주려고 했더니 그런 식으로 나를 물 먹이다니……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최인호는 K미디어라는 언론 매체의 대표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면 당장 내일 나가는 뉴스의 어조가 달라졌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걸 그는 잘했다. 이미 그런 식으로 보내 버린 연예인들이 제법 있었다.
“서민 출신 주제에 S급 헌터라고 잰체하기는. 누가 유은새더러 성격 좋다고 했어? 싸가지 대박 없던데. 그런 식으로 꼭 부모 없는 티를 내요. 어차피 실력은 그저 그렇고 마수 빨이면서!”
최인호가 분에 겨워 손잡이를 내려쳤다. 아오!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운전기사와 비서는 그의 눈치만 봤다.
최인호가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두드렸다.
“반드시 복수해 주겠어.”
그는 의기양양하게 문자를 작성했다. 아무리 유은새가 잘나가는 S급 헌터라도 태생적 재벌인 자신에게는 상대가 안 됐다.
까놓고 말해 유은새는 조실부모한 고아 아닌가? 배경이라고 할 것도 없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그게 그녀의 자산이자 권력이 되는 건 아니었다. 유은새는 팬이 많은 만큼 안티도 많았다.
헌터? 신흥 귀족? 하, 웃기는 소리. 사람의 출신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바꿀 수 없다.
“그냥 한번 데리고 놀아 보려고 했는데 감히…….”
최미리내나 남궁솔은 예뻤지만 최인호가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똑똑하고 기가 센.
그나마 순해 보이는 유은새가 제격이었건만 그녀는 자신을 모욕했다.
이제껏 그의 영향력에 꼬리 치며 접근해 오는 여자들이나, 슬슬 기는 사람들만 상대해 본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도천 그룹 한 회장이 조금 총애한다고 그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 봤자 한 회장한테는 막내아들의 친구일 뿐이잖아!”
씩씩거리며 문자를 작성하는 손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유은새 관련 기사 어조 싹 뜯어고쳐’, ‘유은새 학폭이나 병력 없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와’, ‘우리랑 관련 있는 너튜버 중에 논란 가장 크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섭외해’라는 등의 내용을 장문으로 써 내려갔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은 최인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막 메시지 발송을 하려던 그때.
“어!”
“김 기사, 왜 그래?”
운전기사의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사이드미러로 흉측하게 생긴 마수들이 쿵쿵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졸도할 듯이 기겁했다.
“마수, 마수가! 뒤에!”
“마수?! 서울 한복판에 마수가 왜……!”
끼이익, 쾅!
운전기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가 급정거를 했다. 앞차를 세게 들이박은 충격으로 앞좌석 에어백이 터졌다.
운전기사와 비서는 그대로 기절하고,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있던 최인호도 차가 급정거하면서 창문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었다.
보내지 못한 메시지가 깨진 핸드폰 액정 위로 깜빡였다.
그러나 도로를 점거했던 마수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중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이들이 도심에서 마수를 목격했다고 주장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
도천 그룹 창립 기념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각. 어둠이 내렸어도 명동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금일 던전 공략을 마치고 휴가를 나온 헌터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하하! 그래서 그때 ‘속전속결’로 그놈의 뒤로 접근해서 이능파로…….”
그때 누군가 남자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남자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뭐야? 어깨를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어? 야, 야. 저 사람 ……아니야?”
“뭐? 진짜?”
헌터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들은 지나쳐 간 사람의 뒤를 쫓았다. 어쩌면 만나기 힘든 우상을 길거리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였다.
그들이 쫓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인영이 휙,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헌터들도 부리나케 그곳으로 갔다.
“이봐요, 당신!”
“……뭐야.”
까칠하고 낮은 목소리. 매서운 눈빛에 헌터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야, 그 사람 맞아?”
“어, 어…… 맞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되게…….”
까칠하시네. 왠지 분위기도 날카롭고. 우리가 때를 잘못 맞춘 거 아냐? 그들은 기가 죽어서 움츠러들었다.
“아, 아니. 어깨를 부딪쳤으면 사과를 하셔야죠…….”
“사과?”
상대가 피식 웃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그러자 한 헌터가 욱했다.
“아니, 아무리 그쪽이 잘나가는 S급 헌터라도 예의는……!”
퍽.
“악!”
예의 운운하던 헌터가 상대에게 맞고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와 같이 있던 다른 헌터들이 기겁했다.
“어어, 야!”
“헉, 괜찮아?”
갑자기 주먹을 날린 인영이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마치 먹잇감을 문 포식자처럼 스산한 미소를 지은 상대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게 사과를 바라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봐.”
“뭐, 뭐야! 당신 미쳤어? 갑자기 왜 주먹질을!”
“내가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아. 그러니 대신 좀 맞아 줘야겠어.”
“억!”
상대가 빠른 속도로 헌터들에게 달려들었다. 민첩한 움직임에 헌터들은 반항 한번 못 해 보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골목에서는 구타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
[헌터뉴스K] 몬스터 테이머 유은새, 헌터 폭행?
어젯밤 10시 30분경, 명동 거리에서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백아 길드의 길드원들로, 그들은 도천 길드의 유은새 헌터가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들은 ‘어깨를 부딪친 것에 대해 사과를 받으려고 했을 뿐’이라며, 그가 자신들을 골목길로 유인해 이 같은 일을 벌였다고 전했다.
경찰은 유은새 헌터를 참고인으로 소환해…….
“이 기사 뭐야. 무슨 이딴 찌라시가 다 있어?”
다음날 길드 사무실로 출근한 우리는 뉴스 포털에 뜬 기사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요새 은새와 관련된 헛소문이 돈다지만 이건 과했다.
당장 법무팀을 소환하려는 찰나 미리내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다급하게 질문했다.
“우리야, 은새 기사 봤어?”
“어. 무슨 이딴 기사가 다 있어? 그 시간에 은새뿐만 아니라 우리도 창립 기념식에 있었는데 무슨 헛소리…….”
“그게 이상해. 피해자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미리내가 그를 재촉했다.
“일단 경찰서로 가자. 가서 직접 얘기를 들어 봐야겠어.”
***
은새는 강원도 집에 있다가 경찰 소환 연락을 받고 입을 헤, 벌렸다. 살면서 온갖 일을 경험한 그녀지만 폭행 사건 참고인으로 불린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의심을 담아 질문했다.
“저기, 이거 보이스피싱 아니죠?”
-예, 아닙니다. 그럼 금일 2시까지 관할 경찰서로 출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뚝.
은새는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쳐다보고 또 멍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람. 일단 우리나 미리내한테 전화해 봐야 하나?
전화벨이 울렸을 때부터 은새를 보고 있던 벨키오르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누구를 때렸다고 참고인 조사를 오라는데…… 그게 참.”
자신이 누굴 때렸다니. 실수로라도 그런 적 없었다.
멋쩍어진 은새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아닐 거예요. 뭔가 착오가 있겠죠.”
그녀는 외출 준비를 하며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득달같이 받았다.
-은새야, 너 괜찮아?
“응? 아, 설마 나 참고인 조사하러 오라는 거 너도 알아?”
-기사 났어. 나랑 미리내가 먼저 가서 피해자들과 얘기해 볼게.
“아니야,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내 일이니 내가 직접 가야지.”
우리의 걱정이 무색하게 은새는 하하, 웃었다. 멀쩡한 은새의 목소리에 한숨을 쉰 우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냐, 뭔가 상황이 좀 이상해서 나랑 미리내가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래? 알았어, 곧 갈게. 이따 보자.”
-응, 조심해서 와.
은새가 전화를 끊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