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죽 쒀서 드래곤 줬네
유하는 길드 휴게실에 늘어져 있다가 친한 길드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김녹두: 유하 형! 지금 훈련실에 유은새 헌터 왔어요.]
다른 팀이지만 종종 같이 던전 공략을 나가는 길드원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유하가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했다.
[김유하: 은새가? 걔가 훈련실엔 웬일이지.]
[김녹두: 기세가 어마어마해요. 28단계부터 해서 지금 29단계 돌파했어요.]
[김녹두: 어, 쉬지 않고 30단계까지 하시려는 모양인데요? 조금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
유하가 눈을 의심했다. 유은새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훈련을 한다고? 멈췄던 그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김유하: 너 사람 잘못 본 거 아님? 유은새가 그럴 애가 아닌데.]
[김녹두: 아녜요! 유은새 헌터 맞아요. (사진)]
김녹두가 보낸 사진을 유하가 확대해 봤다. 유은새가…… 맞네?
그녀가 훈련실에 갔다는 것도 놀랍지만 28, 29, 30단계를 혼자서 강행군으로 돌파하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30단계는 SS등급 던전 난도에 비견된다. 반려 마수들과 함께라면 모를까 은새 혼자서는 버거울 것이다.
사진상으로 보이는 은새의 얼굴에 땀이 흠뻑 맺혀 있었다. 유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김유하: 지금 갈게. 아직도 진행 중?]
[김녹두: 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은새는 또 왜 이럴까……. 다년간의 경험으로 아무 일 없이 그녀가 그럴 리 없다는 걸 눈치챈 유하였다.
휴게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탄 유하는 5층에서 내렸다.
시뮬레이터 훈련실에 들어선 유하는 헌터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한 걸 보고 혀를 쯧 찼다. 분명 유은새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무섭게 집중한 얼굴이 보였다. 은새는 석룡과 교전 중이었다.
유하를 발견한 헌터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형! 여기요!”
서호랑과 비슷한 나이의 김녹두였다. 유하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김녹두, 쟤 왜 저래?”
“모르겠어요. 아까 29단계에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신 게 보였는데 포션 마시고 바로 30단계 넘어가시더라고요.”
“뭐? 쟤가 큰일 나려고.”
김유하는 한창 전투가 치러지고 있는 필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안에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유은새, 너 왜 몸을 혹사시키고 있냐?”
“어…… 유하야! 잠시만!”
석룡이 갸가갸각 울부짖으며 날아올랐다. 용으로 분류되는 마수 중에서도 전투에 특히 능한 석룡이었다.
은새는 베일 카라스의 봉을 세로로 세워 석룡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뒤로 밀리는 은새를 보며 유하가 소리쳤다.
“어차피 너 혼자 못 깨! 포기하고 나와.”
“……싫어!”
은새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얘가 왜 이러지? 유하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윽…….”
결국 뒤로 밀려난 은새가 베일 카라스의 봉을 바닥에 쳐 반동으로 날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석룡의 머리 위에서 공격했다.
“유은새! 고집부리지 말고 그만하라니까!”
“…….”
“쟤가 진짜 뭘 잘못 먹었나.”
이후로 그가 몇 번이나 포기를 종용했으나 은새는 고집스럽게 전투를 이어 갔다. 몇 번 공격에 성공했지만 석룡을 처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아, 후우…….”
숨을 몰아쉬는 은새의 다리가 부들거렸다. 체력이 한계까지 몰린 게 눈에 보였다.
한숨을 푹 쉰 유하가 결국 손을 들었다.
“알겠어, 도와줄 테니까 잠시 멈춰!”
“…….”
“유은새!”
은새가 마지못해 훈련을 중지시켰다. 석룡의 움직임이 멈추자마자 은새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다가가 유하가 포션을 건넸다. 은새는 포션을 받아들기만 하고 그대로 있었다.
기운이 달려 포션도 못 마실 만큼 은새는 지쳐 있었다. 유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냥. 훈련하는 거잖아.”
“너답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지.”
“…….”
은새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유하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또 혼자 속으로 끙끙대는구만.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것은 고민이 있을 때 하는 은새 특유의 버릇이었다.
유하는 은새의 손에서 포션을 뺏어 대신 뚜껑을 열어 줬다. 다시 포션을 받은 은새가 느릿느릿 포션을 마셨다.
그러나 한번 바닥난 체력이 금방 충전될 리 없었다. 은새가 흐물흐물 바닥에 녹아내렸다.
“힘들어 죽겠다…….”
“이어서 못 하겠지? 씻고 나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유하가 은새를 일으켜 세웠다. 은새가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먹으면 토할 것 같은데.”
“S급의 위장을 얕보지 마.”
유하가 등을 떠밀며 닦달했다. 은새는 어쩔 수 없이 씻으러 들어갔다.
잠시 후, 머리를 덜 말린 상태의 은새가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깔끔 떨기의 일인자인 유하가 ‘으.’ 하더니 수건을 찾아와 은새의 머리를 벅벅 털었다.
“아야, 아야.”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머리 잘 말려야지.”
“내버려 두면 말라…….”
“머리 말릴 힘도 없는 거겠지. 이거나 먹고 있어.”
유하가 은새에게 뚱땡이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훈련실 한편에 비치되어 있는 간식 냉장고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에게 머리를 맡긴 채 은새는 빨대로 콕 찍어 바나나 우유를 쭉 들이켰다.
“후아.”
단게 들어가니 좀 살 것 같았다. 만족스러운 숨을 내쉰 은새가 유하를 돌아봤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어?”
“훈련실을 너 혼자 썼냐? 녹두가 연락했어.”
“그렇구나.”
A급 헌터 김녹두는 은새도 아는 사람이었다. 도천 내에서 마당발로 유명한 헌터였다.
머리가 대충 마른 것 같자 그녀가 질문했다.
“밥 뭐 먹으러 갈 거야?”
“뭐 먹고 싶은데?”
“음…… 삼계탕.”
“좋지. 우리 잘 가는 곳으로 가자.”
그들은 길드를 나와 유하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20분 정도 가니 삼계탕 전문점이 나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사장님의 환대를 받으며 유하와 은새는 개인실로 들어갔다. 주문을 마치고 잠시 기다리니 뜨끈한 국물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삼계탕이 나왔다.
밥 먹으면 토할 것 같다던 은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맛있겠다!”
“어련하시겠어. 먹자.”
그럴 줄 알았다면서 유하가 익숙하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넸다.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닭 한 마리씩을 뚝딱 먹어 치웠다.
유하가 말한 대로 S급 위장은 대단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와 양갱을 함께 먹는데, 유하가 문득 질문했다.
“그래서 아까 왜 그랬던 건데?”
“음. 그냥 넘어가는 거 아니었어?”
양갱을 포크로 찍어 한 입 먹은 은새가 곤란한 기색을 했다. 유하가 코웃음 치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잔소리해도 밥 먹이고 하려고 미뤄 둔 거지. 말해 봐.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고.”
은새가 말을 망설였다. 유하는 잠자코 기다려 줬다.
침묵이 길어지자 은새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면서도 조금 부끄러웠다.
“……강해지고 싶어서.”
“푸흡, 갑자기?!”
유하가 커피를 내뿜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유은새가 ‘강함’을 논하다니.
S급 헌터로 각성한 이후 줄곧 유일무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닌 그녀였다. 그나 다른 친구들이 능력 개발이나 훈련을 할 때 그녀는 마수들을 단련시켰다.
“그럴 만한 일이라고는, 어. 설마 너…… 벨키오르 님 때문에?”
“…….”
은새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가 탄식했다. 왜 그분은 이 세계에 와 여러 S급들의 열망에 불을 지핀단 말인가.
‘뭔가 일이 있었나 본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하가 본격적으로 들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자세히 말해 봐. 네가 별거 아닌 일로 이러지는 않을 거 아니야.”
“어, 부끄러운데.”
“허, 참. 우리 사이에 부끄러울 게 남았냐? 나는 네가 3년 전 크리스마스에 술 취해서 벌인 짓도 기억하고 있음.”
“그걸 아직도 안 잊었어?!”
은새의 얼굴이 빨개졌다. 당시 힘든 일이 연달아 터져서 그녀가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술에 잔뜩 취해 ‘산타 하뷰지, 선물은 탈출 버튼으로 쥬세요…….’라고 중얼거리며 안주로 나온 얼린 홍시를 초인종처럼 띵동띵동 눌렀다.
물론 그녀의 손과 옷이 멀쩡했을 리 없었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덜 창피했을 텐데 홍시 위로 그대로 머리를 박고 잠들었다.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그날 일은 ‘유은새 얼굴로 홍시 먹은 사건’으로 불렸다. 그때가 생각나 유하가 키득거렸다.
“그걸 어떻게 잊어? 하여튼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음, 그게 대전 던전에서 제물 스테이지 얘기했었잖아. 그때 벨키오르 님을 보고 내가 느낀 게 많거든?”
은새가 테이블 위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애매했다.
“벨키오르 님한테는 계속 도움을 받았으니까 필요할 때 내가 힘이 돼 드리고 싶은데, 지금 이대로는 어려우니까.”
정리하자면 그랬다. 벨키오르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그래서 강해지고 싶은 거야.”
“뭐……? 네가 왜.”
그 드래곤은 네 도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유하의 기가 막힌다는 반응에 은새가 발끈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어? 벨키오르 님을 위기에서 구해 드린다거나!”
“야, 야…… 유은새, 너 꿈도 크다.”
유하는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거처럼 기겁했다.
“애당초 그 드래곤이 위험한 상황이면 우린 뼈도 못 추릴걸?”
“그렇…… 겠지만! 내 이능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몬스터 테이밍이? 그냥 벨키오르가 몇 대 쥐어박으면 어떤 마수든 고분고분해질 것 같은데.
그때 유하의 머릿속에 번쩍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쟤 그 드래곤 좋아하는 거 아니야?’
힘이 되어 주고 싶다. 도와주고 싶다. 은새의 입에서 쉬이 나올 말이 아니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이외에는 생각보다 무관심한 그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았다. 스스로 자각했는지는 몰라도.
‘한우리 죽 쒀서 드래곤 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