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뻗어 오는 음모
벨키오르는 준비된 재료와 레시피를 떠올리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박력분과 아몬드 파우더를 체 치고, 포마드된 버터에 설탕과 노른자, 소금을 넣었다.
재료들을 다 잘 섞어 주고 마법으로 휴지시켰다. 발효된 반죽을 꺼내 밀대로 펴고 틀에 넣었다. 180도로 예열한 오븐에 넣고 굽는 동안 벨키오르는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설탕과 노른자, 우유, 바닐라빈으로 베이스를 만든 후 바나나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다 됐으니 먹어라.”
“너무 예뻐요……. 냄새도 좋고.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
말은 그렇게 해도 은새는 스푼을 멈추지 않았다. 바나나 아이스크림의 향이 향긋했다. 뒤이어 벨키오르가 오븐에서 꺼내 준 파이도 고소하고 달콤해 입맛을 돋우었다.
이제 완전히 기분이 나아졌는지 디저트를 먹는 내내 은새는 생글생글 웃었다.
“아 잘 먹었다. 설거지 제가 할게요!”
“됐어.”
벨키오르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식탁에 있던 빈 그릇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덕분에 은새는 솜사탕 씻는 라쿤이 되었다. 뭐라도 하려던 손이 허망하게 허공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정말 먹기만 했다. 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번 이렇게 챙겨 주시는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떡해요.”
“…….”
울상 짓는 은새를 힐끔 본 벨키오르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줬다. 은새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대는 잘 먹어 주기만 하면 돼.”
“어…….”
“별은 밥투정이 심하니.”
“아, 아. 그래서요?”
별이 밥투정을 말하는 거였구나. 나는 또…….
은새는 순간 벨키오르가 자신을 걱정해 줬다고 착각한 게 부끄러웠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 빨개지는 은새를 벨키오르가 의아한 눈빛으로 봤다.
“몸이 안 좋은가?”
“아뇨! 그, 잠시만 계세요. 별이랑 봄이 잘 자고 있는지 보고 올게요.”
은새는 도망을 택했다. 벨키오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이들이 잠든 방에 들어와 은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험해.’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그런데 마음을 연 벨키오르는 아이들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 다정했다.
‘자각은 하고 계실까?’
본인의 행동이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 자신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겠지.’
은새는 시무룩해졌다. 벨키오르는 큰 뜻 없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우리 사이는 뭘까?’
은새가 잠든 별과 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벨키오르가 자신에게 해 주었듯이.
“같이 밥 먹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자고,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상의하고…….”
은새의 머릿속에 깨달음이 스쳤다. 그래, 이 관계는.
은새는 주먹을 꼭 쥐고 다짐했다.
“가족끼리 이러면 안 되지!”
벨키오르가 들었으면 기가 찼을 말이었다. 가족? 어째서 그게 가족이냐면서. 그러나 은새는 벨키오르의 생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어.”
상대가 그럴 생각이 없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종족도 달랐다.
자신은, 인간 같은 건 벨키오르에게 한낱 스쳐 지나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벨키오르 님은 너무 다정해…….”
아이들이 내뱉는 색색거림이 은새의 우중충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포근한 분위기에 은새도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어느새 곯아떨어진 은새를 조용히 방으로 들어온 벨키오르가 발견했다.
“잘 자라.”
그는 은새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
“여기가 한국이야?”
사투리가 조금 섞인 중국어. 개성 강한 외모를 가진 남자와 여자가 공항을 둘러보았다.
일반 관광객처럼 보이는 그들은 청화 길드의 유길선 길드장이 파견한 왕호연과 양설이었다.
선글라스를 쓴 왕호연이 지역 특산물 상점 앞에서 기웃거리는 양설을 잡아다가 옆에 세웠다. 귀여운 생김새가 돋보이는 양설이 짜증을 냈다.
“왜 이래? 시간도 많은데 구경 좀 하자.”
“너는 우리가 놀러 온 줄 알아?”
“할 일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도 되잖아.”
“속 편해서 좋겠다. 큰 임무를 앞에 두고…….”
왕호연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긴장한 그의 얼굴을 본 양설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이 쫄보야. 너랑 내가 있는데 실패할 리 있겠어? 답답한 짓 좀 그만해.”
그녀가 왕호연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맞은 부위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양설!”
“낄낄, 이마 안 깨졌냐?”
“너 방 키 압수야. 밖에서 박스 깔고 자.”
“미쳤냐고. 이 몸은 호텔 로열 스위트룸 아니면 잠을 못 잔다고. 야!”
양설의 말을 무시한 채 왕호연은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양설이 부리나케 그의 뒤를 쫓아갔다.
왕호연과 양설은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서울의 하늘은 잿빛이었고 도로를 가득 채운 차들로 인해서 공기가 좋지 않았다.
던전이 터지고, 주력 에너지원이 마석으로 바뀌어도 이런 건 변하지 않았다.
“여기나 중국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다.”
“그러네. 그래도 좀 특이한 것들이 보이는데.”
양설이 흥미가 자글자글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 미소에 왕호연이 불길함을 느끼고 움찔했다.
“조금 둘러볼까?”
“사전 조사야, 사전 조사.”
왕호연은 양설에게 그들이 놀러 온 게 아니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왔다는 걸 주입했다.
“그래, 사전 조사.”
하지만 양설에게는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높이 땋아서 묶은 머리를 팔랑거리며 사방팔방 돌아다녔다.
왕호연이 그녀의 뒤를 힘겹게 따라다녔다.
“어! 저기 맛있어 보여!”
“너 밥 먹은 지 30분도 안 지났어!”
“어디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데?”
마라탕 가게 앞에서 양설이 코를 킁킁댔다. 그녀는 한국까지 침투한 자국의 문화에 고양감을 느꼈다.
눈을 빛내며 마라탕 가게로 들어가려는 양설을 왕호연이 가까스로 막았다. 양설이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라탕 가게 앞을 벗어난 그녀의 입에는 한국식 닭꼬치가 물려 있었다.
겨우 양설을 진정시킨 왕호연이 그녀와 함께 사전 조사에 착수했다. 그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한국인 헌터와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무기, 아이템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왕호연과 양설은 조금 놀랐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확연히 다른 점들이 보였다.
“수준이 대단한데?”
“한국은 격변의 시대에 빨리 적응한 편이니까. 헌터들의 무력도 상당하고.”
“그래도 우리가 더 강해.”
양설이 자부심에 차 말했다. 자신들은 중국의 손꼽히는 청화 길드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특수한 이능 덕분이었지만, 그런 이능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로도 대우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특별 임무를 받았다. 양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하늘을 올려다본 왕호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호텔을 나올 때는 중천에 떠 있었는데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묻힌 양설이 짝, 박수를 쳤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유은새에 대해 조사해 볼까?”
왕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
“유은새 헌터다!”
누군가 도천 길드 건물로 들어오는 은새를 보고 외쳤다. 은새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멋쩍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줬다.
“꺄! 유은새 헌터, 오늘도 멋지세요!”
“언니, 오늘은 하늘이 없어요? 별이랑 봄이 너무 귀여워요!”
“고마워요.”
은새가 배시시 웃었다. 별과 봄이의 칭찬을 듣는 것은 언제나 기뻤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별과 봄이 자신들 얘기를 하는 걸 알고 좋아했다.
그 모습을 도천 길드 헌터지원팀 소속 B급 헌터 김유빈이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연예인의 팬처럼 은새를 졸졸 쫓아다니는 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웃긴다. 쟤네 왜 저래? 자존심도 없나.”
그녀는 프랜차이즈 커피를 빨대로 쪽 들이마셨다. 쪼르륵. 어느새 다 마셨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표정을 찡그린 김유빈은 빈 테이크아웃 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벽에 기대 은새를 눈으로 좇았다. 비꼬는 말이 흘러나왔다.
“S급 헌터라 좋겠네. 누구는 각성할 때부터 S급이고, 누구는 B급이고.”
김유빈은 원래 공략팀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던전에서 마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고 현장에서 은퇴했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마수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았다. 그래서 은새와 그녀의 마수들을 좋게 볼 수 없었다. 비록 테이밍되어 있다고 해도.
“유은새가 뭐라고 저렇게 열광을 하지? 저 여자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물론 S급 헌터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유난이지 않나? 연예인도 아닌데.
“김유빈, 너 또 삐딱한 생각 하고 있지?”
씩씩대고 있는데 옆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김유빈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봤다가 누군지 알아보고 눈꼬리를 세웠다.
“서현진.”
“유은새 헌터 출근했네. 길드장님 호출인가?”
“알 바야?”
김유빈이 투덜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서현진이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한숨을 쉰 그녀가 말했다.
“유은새 헌터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는 왜 맨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내가 언제?”
“언제나. 항상. 방금도 그랬지?”
“너 능력 썼어?”
서현진의 능력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이었다. 뭘 이런 일로 능력을 써.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네 표정에 다 쓰여 있네요.”
“…….”
김유빈이 서현진을 노려보고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못 쫓아오게 걸음을 빨리했다.
“야, 나 떼어 놓고 가냐? 같이 가. 팀장님 호출 왔어.”
“따라오든가 말든가.”
김유빈과 서현진은 헌터지원팀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