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63)화 (63/190)

62화 – 신도 인간도 되지 못한 반푼이

벨키오르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부름을 받고 잠시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그를 휘감은 마력이 걷혔을 때 울창한 숲과 그 한가운데 자리한 푸른빛을 내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위그드라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위그드라실. 무슨 일이지?”

[벨키오르, 왔구나. 아기와 은새는 어떻게 지내니?]

세계수가 그를 보고 반갑다는 듯 가지를 흔들었다.

“잘 지낸다. 아기한테는 ‘별’이라는 이름도 생겼어. 진명은 아니지만 성룡이 될 때까지 그 이름을 쓰겠다더군. 은새는…….”

벨키오르가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현재 그녀는 가까운 지인의 죽음으로 상심한 상태였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런대로 지내고 있다.”

[다행이네. 다른 게 아니라 비술의 드래곤이 벨키오르 너를 반드시 만나야겠다고 해서 불렀어.]

“산체스가?”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동족이 자신을 찾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가 ‘음.’ 하고 걱정스러운 소리를 냈다.

[설원의 드래곤 쪽에 문제가 생겼나 봐.]

“타데아에게?”

오랜만에 떠올린 이름이었다. 설원의 드래곤, 타데아는 나이가 많은 고룡으로 벨키오르보다도 수천 년을 더 산 존재였다.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연락이 올 정도의 문제라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산체스의 레어에 다녀오지.”

[다녀와.]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마력을 일으켜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한 벨키오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화산 지대였다.

고약한 유황 냄새를 맡으며 그는 산체스가 정성스럽게 설치했을 함정을 하나씩 파훼해 갔다.

왠지 함정의 강도가 올라간 것 같은데. 일전에 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레어의 입구까지 도달한 그가 머리를 기울였다.

“산체스.”

오늘도 산발을 하고 잠에 취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산체스는 멀끔한 행색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라는 것 하나 없이 산체스는 그를 타박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벨키오르, 너는 내가 부른 게 언제인데 뭐 하다 이제 나타나?”

“오, 친우여. 오랜만에 보는군!”

산체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벨키오르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몬텔라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하하하! 나만 보면 구겨지는 그 얼굴!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네!”

밀밭을 연상시키는 금발과 저녁놀처럼 보이는 주홍색 눈동자. 호방하게 껄껄거리는 그는 풍요의 드래곤이었다.

산체스와 쿵짝이 맞아 벨키오르를 자주 놀려먹었다. 그래서 벨키오르는 그들이 함께 있을 때 만나기 거북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몬텔라는 히죽거리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어떤가? 그토록 고대하던 반려를 만난 심경은?”

벨키오르가 산체스를 노려보았다. 분명 그녀가 몬텔라에게 말한 게 틀림없었다. 산체스는 혀를 날름 내밀고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산체스가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반려랑 잘 지내고 있어? 하긴, 저쪽 세계에서 통 돌아오질 않는 걸 보니까 두말하면 입 아프겠네. 각인은 했니?”

“…….”

“뭐야! 아직도 각인을 안 했어?! 이게 무슨 일이야. 너 무슨 문제 있니?”

대답 없는 벨키오르의 모습에 산체스가 깜짝 놀라며 가까이 다가와 그의 몸을 살폈다. 벨키오르가 좁아 든 미간을 꾹 눌렀다.

“그녀는 반려가 아니다.”

“얘, 너 아직도 그 소리 하고 있니? 너 빼고 다 알아! 이제 그만 인정해라.”

“맞네, 친우여. 네 반려는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나? 인간의 시간은 덧없이 흐르니 빨리 잡아야 한다네. 얼른 각인하고 옆에 꽁꽁 묶어 두게나.”

참으로 편견 없는 드래곤들이었다. 동족의 반려가 인간이라는데 그렇게 쉽게 인정할 수 있나?

아무튼 벨키오르는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자고 온 게 아니었다. 그가 단호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왜 부른 거지?”

낄낄거리며 벨키오르를 놀리는 데 진심이던 산체스와 몬텔라가 시선을 맞췄다. 그들은 얼굴의 장난기를 지워 내고 진중한 표정을 했다.

산체스가 말했다.

“타데아가 죽었어.”

“……타데아가?”

벨키오르가 느릿하게 설원의 드래곤의 이름을 불렀다. 타데아는 1년 내내 눈이 내리는 북 대륙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었다.

몇 남지 않은 고룡이다 보니 그의 죽음이 놀랍지는 않았다.

“자연으로 돌아갔나?”

“드래곤 슬레이어한테 죽임을 당했어.”

“치욕스럽군.”

벨키오르가 표정을 한껏 구겼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 성난 기색이 어른거렸다.

드래곤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죽임을 당하면 시체가 뿔뿔이 해체되어 죽어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

이 땅을 수천 년이나 지켜 온 고룡이 그런 죽임을 당하다니.

이상한 건 약 천여 년 동안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 빠진 고룡이라고 해도 맥없이 사냥당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근래 인간 중에 ‘운명’을 타고난 자가 있던가?”

드래곤 슬레이어는 두 종류로 나뉘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광룡(狂龍)을 죽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검을 잡은 자와 용살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

후자는 보통 드래곤의 수가 너무 많아 세계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자연의 섭리로 저절로 생겨났다. 그 경우 드래곤들은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산체스가 마법으로 약초 차를 끓여 벨키오르 앞에 내놓았다. 독하기도 하고 향긋하기도 한 오묘한 냄새가 났다.

차에는 손도 안 대고 벨키오르가 눈빛으로 산체스를 재촉했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에 말했었지? 반신 드래곤 슬레이어.”

“그래.”

“그자가 인간 학살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어.”

“학살자들?”

“인간 세계에서 이름 좀 떨친다는 칼잡이들. 용살자의 운명은 내려오지 않았어. 아케이아에게 물어본 거라 확실해.”

벨키오르는 녹색 빛이 도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탁의 드래곤 아케이아가 말했으면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들이 왜 타데아를 노린 거지?”

무엇을 위해? 하필 고룡인 설원의 드래곤을 죽인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나도 직접 본 게 아니라 모르겠는데 반신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아.”

산체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녀는 손톱이 길게 자란 손을 뚜둑, 뚜둑 꺾었다.

“어디서 신도 인간도 되지 못한 반푼이가 감히 드래곤 무서운 줄 모르고. 내 앞에 나타나면 갈가리 찢어 버릴 거야!”

성을 내는 산체스를 두고 벨키오르가 몬텔라에게 물었다.

“몬텔라, 그자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인간 세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네. 영웅 행세를 하는 모양이던데.”

“그게 무슨 소리지?”

“인간들과 몰려다니면서 마물 잡고, 전쟁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자의 어미가 요르테움 제국의 귀족이라나 뭐라나.”

귀족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신분 따위 드래곤과 하등 관련이 없었으니까.

단지 어떠한 배경으로 배짱을 부리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인간과 정을 맺은 그 신은 누구지?”

“하늘의 신 모아누.”

몬텔라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 양반이 별일이지? 안 그런가?”

“신들이 변덕을 부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벨키오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체스가 루비 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래곤들의 수다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가게?”

“더 할 말이 남았나?”

“하하하! 반려 곁을 한시도 떠나 있고 싶지 않은가 보군! 청춘일세.”

벨키오르는 몬텔라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레어를 나가기 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타데아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나?”

“살 만큼 살았으니까.”

기껍게 죽었다는 뜻이었다. 친했던 자도 아닌데 벨키오르는 조금 씁쓸해졌다.

“하여튼 너도 세상 돌아가는 얘기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세계수는 언제나 인간들이 노리니까. 또 소식 들어오면 말 남길게. 그럼 민첩한 하루!”

산체스와 몬텔라의 희한한 배웅을 받으며 벨키오르가 세계수가 있는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위그드라실이 즉시 물어왔다.

[비술의 드래곤이 왜 불렀니?]

“타데아가 죽었다는군.”

[……그렇구나.]

위그드라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벨키오르보단 설원의 드래곤과 친분이 있어 생각이 많은 듯했다.

세계수를 두고 벨키오르가 마력을 펼쳤다. 금빛 마력이 ‘문’을 만들었고 그 너머에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듀.”

[네, 벨키오르 님! 부르셨어요?]

벨키오르의 수족이자 가고일 족인 듀였다. 듀는 오랜만에 부름을 받아 신난 상태였다.

“당분간 이곳에 와 있어라.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네가 문지기 노릇을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세요!]

듀는 산책하러 가자는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벨키오르는 그런 듀를 내버려 둔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인간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 무슨 일 있으면 불러라.”

[그럴게.]

세계수의 대답에 벨키오르가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가니? 아기와 은새에게 안부 전해 줘.]

벨키오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세계를 뛰어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