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뭐야. 간단하네!
다음 스테이지 프리패스권을 얻은 은새와 일행은 탄탄대로였다.
그들이 다음으로 고른 장소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하마터면 목에 방울을 달고 마수들을 처치해야 했던 팀원들은 프리패스권이 사용됐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땅이 꺼지며 미끄럼틀이 나왔을 때는 당황했지만 곧 지름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일행들 앞에 또다시 선택지가 나타났다.
“세 갈래 길이네요.”
“이번에는 제 말 한번 믿어 보세요.”
팀원들이 고민하는 가운데 서호랑은 여전히 가운뎃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게임에서 본 열 가지의 사례를 들며 열성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을 들어 주던 은새가 푸스스 웃었다.
“그래요. 이렇게까지 하는데 가운뎃길로 가죠, 뭐.”
“유은새 헌터! 쟤 말 들었다가 뭐가 나올지 알고요.”
“어차피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요.”
어디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상당 시간이 흘렀으니 슬슬 바깥 공기가 그리웠다.
고민하던 다른 팀원들도 은새의 말에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갔다.
하지만 가운뎃길로 들어서기 무섭게 시스템 창이 경고등을 띄웠다.
[Warning! Warning! Warning!]
“뭔데? 무슨 일인데?”
“서호랑이 사고 쳤다!”
“끄아아악.”
빨간 경고창과 함께 울리는 경고음에 헌터들은 무기를 쥔 채 몸을 긴장시켰다. 뭐가 튀어나와도 대응할 수 있게.
[제물 스테이지에 진입하셨습니다! 제물이 될 3인(마수 포함)을 선정해 주십시오.]
“……뭐?”
“제물 스테이지?”
하지만 상상도 못 한 게 튀어나와 버렸다. 제물이라니. 그건 누군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스테이지가 나오다니. 팀원들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었다. 그동안 힘겹게 통과해 온 스테이지들이 차라리 나을 지경이었다.
몇몇 팀원들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여전히 시스템 창은 빨간 경고등을 켠 채였다.
분한 얼굴의 오종환이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차라리 마수 웨이브를 해!”
“이건, 이건 말도 안 돼요.”
엘레나 킴이 주먹을 꽉 쥔 채 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됐어요. 왜 우리가 시스템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하고 있죠?”
단호한 얼굴의 엘레나 킴의 말에 팀원들이 동조했다.
“맞아! 여긴 ‘던전’이잖아요! 시스템의 존재 자체가 함정이었다면요?”
“제물로 삼아서 뭐 할 건데요. 시스템에 융합이라도 한대요?”
“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 그런 판타지 소설 nnn개 봤어요.”
“서호랑 너는 입 좀 다물어.”
“어쨌든 여기서 시스템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수 없어요!”
팀원들이 이를 갈며 무기를 들어 올리자 경고창이 떴다.
[만약 시스템의 ‘규칙’을 위반할 시, 무작위로 제물이 선정됩니다.]
“…….”
적막이 내려앉았다. 끓어올랐던 사기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헌터들이 짠 것처럼 하나같이 울상을 하고 은새를 쳐다봤다.
이걸 어째야 하냐는 눈빛에 은새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과거, 비슷한 유형의 던전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침착했다.
‘제물 스테이지라. 누가 남아야 이 팀에 이득일까?’
은새가 팀원들을 둘러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헌터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서호랑은 지은 죄가 있어서 자신이 제물로 선정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시스템은 제물 선택 후에 남은 제물들이 어떻게 된다고 그 내용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 정리를 끝낸 은새가 말했다.
“시스템의 규칙을 지키는 게 좋겠어요.”
“예?! 하지만 유은새 헌터! 시스템을 믿을 수 없을뿐더러, 제물로 남겨진 이나 떠나는 이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아무리 유은새 헌터라고 해도 이런 결정은……!”
“흥분하지 마세요. 남는 사람은…….”
팀원들을 둘러본 은새가 찡그리듯 웃었다.
“저와 벨키오르 님, 그리고 도다리예요.”
“……예?”
생각지도 못한 은새의 선택에 멍하니 있던 팀원들이 깜짝 놀라 반발했다.
“어째서요? 어째서예요, 유은새 헌터!”
“차라리 그냥 제가 남을게요!”
서호랑이 눈물, 콧물 흘리며 외쳤다. 그는 자신 같은 것보다 은새가 더 길드에 중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죽는 건 무섭지만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니 자신이 책임져야 마땅했다. 그런 생각이 어린 얼굴에서 보여 은새가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한 거니까 걱정 말아요. 자, 어서 가세요. 별이와 봄이, 하늘이를 잘 부탁해요.”
“유은새 헌터!”
[뉴나!]
삐삐!
은새를 말리는 팀원들 사이로 별과 봄이 빠르게 날아와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은새는 허공을 향해 외칠 뿐이었다.
“시스템, 제물이 될 자는 ‘유은새’와 ‘조룡 마수’, 그리고 이분이야.”
[확인했습니다.]
은새와 벨키오르, 도다리를 남긴 채 헌터들 앞에 투명한 벽이 생겼다. 팀원들이 벽을 없애려 했지만 물리적인 공격은 물론 스킬 능력까지 듣지 않았다.
은새와 떨어진 별과 봄이 울음을 터트렸다.
[뉴나! 가기 시러요! 아빠!]
삐-삐!
“유은새 헌터! 그러지 마세요. 제가 길드장님을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괜찮으니까 먼저 가요. 미리내 팀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은새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떠나는 자들은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강제로 아이들과 하늘이, 헌터들이 다른 공간으로 이전되고 셋만 남게 되었을 때 은새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상의 없이 이런 결정을 내려서 화나신 건 아니죠?”
“전혀. 그랬으면 말했겠지. 그런데……. 왜 이 구성원으로 남겼지?”
“이 구성원이라면 무슨 일이 터져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벨키오르는 은새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녀는 포기한 것도, 겁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한 의지로 반짝이고 있었다.
“자, 시스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
시스템은 한동안 침묵했다.
[제물을 선정하는 데 걸린 시간 3분 12초.]
그때 경고등이 켜졌다.
[Warning! Warning! Warning!]
[몬스터 웨이브가 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영원히 던전 안을 헤매게 됩니다.]
“뭐야. 간단하네!”
은새가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벨키오르 또한 금빛 마력을 거세게 일으켰다. 도다리가 꾸우! 하고 긴 울음을 토해 냈다.
“제가 말씀드렸죠? 이 구성원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괜찮을 거라고!”
은새가 베일 카라스의 봉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한편 은새와 벨키오르, 도다리를 남기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 온 일행의 분위기는 처참했다.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팀원, 입술을 깨물며 머리끝까지 오른 분함을 참는 팀원 등. 박도윤마저 눈물을 참느라 눈동자가 벌게졌다.
잠시 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이예나가 씩씩거리며 다가와 서호랑의 머리를 콱 쥐어박았다.
“서호랑, 너 다시는 나대지 마!”
“네……. 으헝, 유은새 헌터…….”
서호랑은 거의 통곡 수준이었다. 그는 온몸의 수분을 밖으로 배출하려는 것처럼 울어 젖혔다.
갑작스럽게 보호자들과 떨어지게 된 별과 봄이 경기를 일으키듯 울다가 그를 보고 당황해서 눈물을 그쳤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자 별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가 있으니까 누나는 괜찮을 거야.’
하지만 자신을 떼어 놓는 은새의 모습이 떠올라 걸핏하면 눈물이 났다. 그새 눈가가 글썽글썽해진 별을 보고 엘레나 킴이 달래 줬다.
봄은 은새와 떨어지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분홍색의 풍성한 꼬리도 축 늘어졌고 울음소리도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삐-삐.
엄마아, 하고 은새를 찾는 목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별이 봄의 등을 두드렸다.
[봄이, 걱정 마! 뉴나는 좀 이쓰면 돌아올 거야!]
삐……?
봄이 그게 정말이냐는 듯 돌아보았다. 별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뉴나는 세고, 울 아빠는 더 세니까 분명히 아무 일 없을 거야! ‘먼저 가 있으라’고 했으니까 금방 우리를 뒤따라올 거야!]
별이 당차게 봄을 위로했다. 이럴 때 보면 별이 봄보다 연장자(?)인 태가 났다.
삐삐!
은새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봄도 기운을 차렸다. 장하다는 듯 하늘이가 크릉, 낮은 소리를 내며 아이들의 얼굴을 핥아 줬다.
하지만 헌터들이 문제였다. 아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기운 차리는 동안 박도윤과 팀원들은 자꾸만 은새와 헤어질 당시를 곱씹었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는지,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곳에 남은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