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이미 우리에게 승기가 기운 게임이거든
‘숨 막혀.’
은새가 목을 틀어쥐었다. 꺽꺽거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어떻게든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끊어 내고 싶었다.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찰나 강한 힘이 그녀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은새가 허억, 하고 물에 빠졌다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거세게 들이마셨다.
“괜찮나?”
“베, 벨키오르 님…….”
벨키오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은새의 허리를 잡아 부축했다. 은새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자신은 대전 미로 던전에 들어왔고, 밴시와 고스트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밴시의 저주에 걸렸고…….
“아! 팀원들은?”
은새가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잔상에 갇힌 듯 박도윤과 팀원들이 멍해진 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저것은 처리했다.”
벨키오르가 가리킨 곳에는 무언가 불에 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밴시가 있던 자리였다. 고스트도 전부 처리한 듯 보이지 않았다.
[뉴나! 뉴나, 괜차나요? 너무 괴로워 보여써요.]
삐-삐!
포르르 날아온 별과 봄이 은새를 걱정했다. 은새가 아이들을 달랬다.
“나는 괜찮아. 너희는 무슨 일 없었어?”
[저는 괜차나요!]
삐삐!
별과 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새가 엘레나 킴의 옆에 있는 도다리와 하늘이를 살폈다.
걱정스러운 은새의 시선에 벨키오르가 말했다.
“그대의 마수들에게는 해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벨키오르 님, 팀원들의 저주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풀려날 테지만.”
밴시가 죽었기에 조금 기다리면 저절로 풀리겠지만 지금 팀원들에게는 잠시간의 저주도 힘든 듯 보였다.
한숨을 쉰 벨키오르가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끄윽, 끅…….”
“허억……!”
저주에 빠진 팀원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은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목을 옥죄었다.
벨키오르가 마력을 두른 손으로 그들의 등짝을 한 대씩 때렸다.
퍽! 퍽! 퍽!
“악!”
“팀장님, 너무 아파요!”
“하나님 아버지!”
벨키오르의 도움으로 그들은 저주에서 풀려났으나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후유증이 생각보다 길게 갔다.
은새가 끙끙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그들을 돌보고 있을 때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띠링!
[팀C, 유령의 집 2페이즈 통과 시간 3시간 5분 42초! (۶•̀ᴗ•́)۶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이제 끝난 거야?”
[헌터분들을 더욱 신나게, 재미있게 해 드릴 다음 스테이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건 됐고…….”
은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상 신나고 재미있는 스테이지는 사양이었다.
“윽, 하아…….”
그새 안색이 핼쑥해진 박도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은새가 얼른 다가갔다.
“도윤 팀장님, 움직일 수 있겠어요?”
“예…….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폐라뇨. 전혀요. 포션이라도 드세요.”
박도윤은 은새가 건네는 포션을 한 병 따 마시고는 팀원들에게도 마시게 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서호랑이 덜덜 떨면서 훌쩍였다.
“진짜 무서웠어요. 전에 들어갔던 메디아의 사막 던전의 보스몹이 뒤쫓아오는데…….”
“나는 예전에 폐허 던전 들어갔을 때 열흘 굶었던 환상이 보이더라.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주마등이 펼쳐지는 것 같더라니까.”
“너도? 나도.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덜컥 겁났잖아.”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은 은새가 벨키오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친근한 접촉에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은새는 눈치채지 못했다.
“벨키오르 님, 벨키오르 님은 알고 계셨죠?”
“무엇을?”
“밴시가 저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강하다는 거요.”
벨키오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새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다물었다.
애초에 그는 이 세계의 밴시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알지 못했고, 그가 나선 건 단순히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감사해요. 말없이 도와주셔서.”
은새는 다 안다는 듯 후후, 웃었다. 순전히 은새의 착각이었지만 벨키오르는 굳이 그 오해를 풀지 않았다.
저주에 삼켜져 괴로워하던 모습과 다른, 평소의 웃는 얼굴을 보고 벨키오르는 은새의 머리를 토닥였다.
갑작스러운 토닥임에 고개를 갸웃한 은새의 앞에 시스템 화면이 떴다.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으로 열쇠 카드가 지급됩니다!]
“왕! 왕이 되게 해 주세요!”
“유은새 헌터, 얼른 확인해 봐요!”
열쇠 카드가 은새의 손에서 빛났다. 보상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다음 스테이지 프리패스……?”
***
미리내 팀은 막 ‘꼬리잡기’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참이었다. ‘꼬리’에 해당하는 마수를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미리내의 책략으로 다른 스테이지보다는 수월하게 클리어할 수 있었다.
보상으로 열쇠 카드가 지급되었고, 솔이 두근두근한 얼굴로 보상을 열어 봤다.
“아싸, 이번에는 내가 왕!”
“골드스타의 점수를 빡빡 긁어 오자!”
“그런데 골드스타 길드 좀 잠잠하지 않아? 아, 은새가 들어온 건가?”
미리내가 입술을 매만졌다. 그녀는 시스템 창으로 각 팀의 점수를 확인했다.
[현재 스코어, A팀 359,000점! B팀 200,650점! C팀 570,510점입니다!]
“히엑, 은새네 팀은 뭔 짓을 했길래 이 점수야?!”
“뭐야. 잘하면 혼자서도 백만 점을 모을 수도 있겠는데?”
“우리가 꼴찌야. 그나마 골드스타가 은새네 팀을 견제해서 이 정도지.”
울적해하는 인찬의 말에도 미리내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팀이랑 C팀이랑 합쳐서 77만 점이네?”
“호오?”
“잘만 하면 골드스타한테 한 방 먹이고 끝낼 수 있겠어.”
“그러게.”
유하가 미리내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입꼬리를 싹 끌어올렸다. 솔만 뭔 소리인지 몰라 ‘뭐야, 뭔데. 왜 너희만 아는 건데? 나도 알려줘!’ 하고 난리 쳤다.
“일단 골드스타의 점수를 뺏어 오자.”
“나도 알려 달라고!”
“나중에. 도중에 은새네 팀이랑 만날 수도 있잖아.”
“점수 합산되나?”
“아마도.”
미리내와 유하가 소곤소곤 작전을 짰다. 졸지에 따돌림당한 솔이 씩씩댔지만 인찬이 옆에서 그런 솔을 달랬다.
“진정해, 솔아.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골드스타한테 한 방 먹인다는 거니까.”
“오, 그래? 그럼 지금까지 당했던 거 갚아 줄 수 있겠네!”
“맞아. 그러니까 미리내가 하라는 대로 하자.”
“좋아!”
금방 기분을 푼 솔을 보고 인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은 신나 하며 누구의 점수를 뺏어올지 골몰했다.
“미리내! 이번에는 누가 좋겠어?”
유하와 말을 끝낸 미리내가 팀A의 명단이 띄워진 시스템 창을 훑어봤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백찬민. 백찬민 길드장의 점수를 가져오자.”
“왜 백찬민 길드장이야?”
미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우리에게 승기가 기운 게임이거든.”
***
천창현은 시스템 창에 떠오른 팀별 점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팀B와 팀C는 같은 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같은 도천 길드의 길드원이었으니 한 팀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아직 백찬민 길드장은 모르지만 최미리내 부길드장은 결정적인 순간에 점수를 유은새 측에 양도할 거야. 아마 거기까지 계산하고 스테이지를 돌고 있겠지.’
시스템은 맨 처음에 ‘규칙’에 대해 설명할 때 ‘양도’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랜덤 보상이 나오는 열쇠 카드. 그중 ‘왕’이 되어 점수를 빼앗을 수 있는 보상.
‘왕’이 되어 점수를 빼앗는 게 가능하다면, 외려 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시스템상으로 반드시 한 번은 ‘양도’와 관련된 알림이 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골드스타 길드는 필패할 터.
“천창현 헌터, 다음은 어느 쪽으로 갑니까?”
하지만 역전의 기회는 있었다. 육재희의 질문에 천창현이 세 갈래 길 중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미로가 진행되면서 팀원들의 신뢰를 쌓은 천창현이었다. 그는 악독한 함정은 피해 갔으며 노력 대비 점수가 잘 나오는 스테이지로만 그들을 안내했다.
던전에 최적화된 스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모험가 속성 헌터들보다 더 빠르고 정확했으니 그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갈 수밖에.
“나머지 스테이지에는 뭐가 있지?”
백찬민이 시험하듯 천창현에게 질문했다. 마치 던전 내부에 관해 알고 있냐는 듯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천창현은 그의 의중을 짐작했다. 아마 자신에게 ‘예지’와 관련된 스킬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겠지.
오해를 사겠지만 굳이 말해 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 자신에게 더 이로웠으니까.
그러니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제일 좌측은 난도가 상당히 높을 겁니다. 하지만 실속은 없겠죠. 그리고 가운뎃길은…….”
눈동자를 굴리던 천창현의 시선이 가운뎃길에 멈췄다. 진득하게 길 안쪽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빛났다.
“누군가 죽지 않고서는 빠져나오기 힘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