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고독한 순례자의 십자가
우우우우.
고스트들이 벨키오르의 접근을 눈치채고 위협을 했다. 그는 귀찮은 파리 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가소롭다.”
벨키오르가 고스트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원래라면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고스트이지만 상대는 드래곤이었다.
손에 마력을 담아 힘을 주자 고스트의 머리가 터질 듯이 찌그러졌다.
우우! 우!
고스트가 몸부림을 쳤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펑!
벨키오르의 힘에 짜부라진 고스트가 기어코 소멸했다. 곧 다른 고스트들도 같은 방법으로 소멸됐다.
펑, 펑!
마치 풍선을 터트리는 것처럼 하나하나 소멸되는 고스트들. 은새와 일행은 손쉽게 고스트를 제거하는 벨키오르를 보고 아연해졌다. 서호랑이 딸꾹질을 했다.
삐삐!
“안 돼, 봄아.”
은새의 품에 안겨서 덜덜 떨고 있던 봄이 재미있어 보였던 듯, 벨키오르에게 가려고 했다. 박도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은새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 유은새 헌터. 원래 마법사는 언데드 몬스터를 맨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저분만 가능할걸요?”
“역시 그렇죠?”
저분이 같은 팀이라, 적이 아니라서 참 다행입니다. 박도윤은 안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우우우…….
이제 고스트는 겁을 먹고 벨키오르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고스트들이 벨키오르의 서늘한 시선에 후다닥 도망갔다.
그는 금색 눈동자로 저 멀리 달아난 고스트들을 슥 바라보고 밴시에게로 갔다.
후우우…….
흐느껴 울고 있던 밴시가 스윽 고개를 들었다. 벨키오르가 마력을 손에 두르고 서 있었다. 침입자를 경계하는 밴시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캬악!
밴시가 벨키오르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그가 간단한 동작으로 공격을 피했다. 밴시와 벨키오르 사이에 몇 번의 공방이 오갔다.
은새와 일행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신호하면 언제든지 투입될 수 있도록.
“이, 이번에도 간단히 소멸시킬까요?”
박도윤의 뒤에 숨어 있던 서호랑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예나가 혀를 쯧 찼다.
“서호랑, 너는 저게 쉬워 보이니?”
“아니요! 얼마나 대단한지 아니까 궁금해서요.”
보통 언데드 몬스터 중에서도 고스트와 밴시는 물리력이 통하지 않아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래서 반드시 성 속성의 스킬을 가진 헌터가 동행하거나 성수, 성물 같은 아이템을 잔뜩 구비해야 했다.
그러나 벨키오르는 맨손으로 고스트와 밴시를 상대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력으로 상대하고 있었지만 팀원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린애를 상대하듯 밴시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벨키오르를 보는 팀원들의 얼굴에 경외가 서렸다. 누구도 여기서 벨키오르가 밴시에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은새만이 벨키오르를 걱정했다.
‘벨키오르 님이 왜 직접 나서신 걸까?’
그동안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밴시의 ‘죽음의 비명’이 위험하다곤 해도…….
그가 직접 나설 정도면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은새는 긴장한 얼굴로 벨키오르와 밴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였다.
캬아악!
벨키오르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자 잔뜩 약이 오른 밴시가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점점 커진 기운은 밴시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더니 불쑥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고스트와는 다른 생김새의 그것들은 벨키오르를 에워싸고 불길한 울음을 토해 냈다. 은새가 다급하게 외쳤다.
“벨키오르 님!”
은새가 일행들을 돌아봤다.
“저게 뭐예요?!”
“모르겠어요!”
“저거…… 정령 아니에요? 헌터TV에서 본 것 같아요!”
“뭐, 정령? 밴시가 정령을 불러내?”
이 세계에도 흔하지는 않지만 정령술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언데드 몬스터 ‘밴시’가 정령을 불러낸 건 처음이었다.
밴시가 어둠 속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둠 정령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덮쳐 오는 정령들에 벨키오르는 마치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불꽃을 일으켰다.
은새와 일행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성스러운 기운이 서린 성화였다.
“간교한 재주를 부리는구나.”
그의 뒤로 성화가 부채처럼 펼쳐졌다. 벨키오르는 밤을 불러와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어둠 정령들을 하나씩 태웠다.
끼이이익!
끼기긱!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어둠 정령이 소멸했다. 만약 은새와 일행이 그것들을 상대했으면 여기서 꽤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저게 정령이냐, 악령이지…….”
“딱히 다를 것도 없네.”
한창 벨키오르의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띠링!
[팀A의 왕이 팀C의 마수1(조룡)의 점수를 스틸했습니다!]
“뭐? 골드스타 이 자식들이!”
“점수 뺏기면 이런 기분이구나. 전쟁이다, 어디 마주치기만 해 봐라.”
“근데 왜 우리가 아니라 도다리의 점수를 가져간 거지? 하물며 유은새 헌터나 팀장님도 있는데.”
박도윤이 잠시 생각해 보고 답했다.
“개개인의 점수보다 비교적 안정적이니까. 도다리가 전투에서 빠질 리도 없고, 유은새 헌터나 나는 혹시 머리 써서 다른 팀원들한테 공적을 양보했을 수도 있잖아. 우리가 백찬민 길드장이나 육재희 부길드장의 점수를 안 빼앗은 것처럼.”
오종환이 박수를 치며 팀원들을 격려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저분이……! 계시니까요!”
여러 쌍의 눈동자가 벨키오르를 향했다. 밴시의 공격을 막으면서도 그걸 느꼈는지 벨키오르가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이 왜 나섰는지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구는 꼴이 우스웠다.
캬아아!
그때 밴시가 필드를 전개했다. 벨키오르에게 겁을 먹고 구석으로 도망갔던 고스트들이 광폭해졌다.
우우우! 우우!
고스트들의 눈빛이 달라진 걸 헌터들이 기민하게 눈치챘다. 눈에 붉은빛 이채가 도는 고스트들은 밴시의 조종을 받는 것처럼 벨키오르와 일행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성수를 바른 무기로 그것들을 상대하던 이들이 이상함을 느꼈다.
“뭐야! 왜 강해진 거지?”
“저만 그렇게 느낀 거 아니죠? 밴시한테 고스트를 사역하는 스킬이 있던가요?!”
“그럴 리가. 저 밴시가 여러모로 특이해.”
각성한 고스트들은 매섭게 그들을 몰아붙였다.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마수이다 보니 점점 은새와 일행의 몸에 잔상처가 늘었다.
“이대로는 안 끝나.”
입술을 깨문 박도윤이 성 속성 아이템을 소환했다. ‘고독한 순례자의 십자가’라는 아이템이었다.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건 박도윤의 눈동자가 일순 금빛으로 빛났다. 곧 그의 몸과 무기에 성스러운 기운이 넘쳐흘렀다.
“더럽고 천한 것들이 사방에 깔렸구나. 이 몸에 손대지 마라!”
달려드는 고스트들을 보고 외치는 그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와. 군림 팀장님 나왔다.”
“오랜만이다, 저 도도한 모습.”
팀원들이 오오, 탄성을 내뱉었다. 박도윤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속으로 그는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고독한 순례자의 십자가’는 강한 성 속성 아이템이지만 일시적으로 그의 인격이 달라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박도윤이 무기를 휘두르자 고스트가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심판을 내려 주마! 신께서 나를 보살피시는 한, 사특한 존재가 내 앞길을 막을 수 없다!”
그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힘이 더욱더 강해졌다. 어쩐지 박도윤의 말투에 비례해 그 힘이 커지는 듯 보였다.
멋진 모습이었지만 평소의 박도윤과는 차이가 너무 났다. 팀원들은 땅을 구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심, 판……. 크크크…….”
“야, 너희…… 박, 팀장님 너무 놀리지 마라.”
“이예나, 너도 가리고 있는 손 내려.”
“저는! 안 웃었씀다!”
“서호랑, 숨은 쉬는 거지?”
저 모습은 언제 봐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팀원들이 배꼽 빠지게 웃는 동안 박도윤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무기를 휘둘렀다.
차가운 표정과 다르게 박도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밴시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벨키오르는 봐주는 것 없이 밴시를 몰아붙였고, 헌터들은 성 속성 아이템을 사용해 광폭해진 고스트를 상대했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린 밴시가 최후의 공격을 했다. ‘죽음의 비명’이라고도 불리는 ‘통곡’ 스킬이었다.
꺄아아악!
그에 대비하고 있던 헌터들이 실드를 전개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도래했다.
실드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저주 디버프에 걸린 것이다. 헌터들이 당황했다.
“아니, 어떻게?!”
“팀장님, 저 어지러워요…….”
“윽, 머리가…….”
박도윤과 팀원들이 차례로 비틀거렸다. 밴시의 저주가 그들을 덮쳤다.
“아…….”
저주 내성이 있는 은새 또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이 물밀듯이 덮쳐 왔다.
‘엄마! 아빠! 은혁아!’
무너진 건물,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포획된 마수가 몸부림쳤다. 은새의 가족들이 아직 잡히지 못한 마수들 사이에 있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제 가족을 살려 주세요.’
은새가 출동한 군인에게 매달렸으나 그는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 상황에서 군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 안다. 하지만 가족을 구하지 못한 은새는 비통함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유은새 헌터,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까? 이럴수록 시간만 지체될 뿐입니다.’
‘살아서 나가고 싶지 않습니까?’
중동 국가에 납치당했을 때.
‘은새야, 우린 괜찮아.’
‘누구한테도 절대 굴복하지 마. 너는 우리의 자존심이야.’
친구들이 타국의 위협을 받았을 때.
‘유은새 헌터, 당신이라도 나가십시오.’
‘살아남으세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팀이 몰살 위기에 놓였을 때.
마치 주마등 같았다. 다만 행복했던 기억은 없고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만 선명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