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두더지 잡기
친구들이 시스템에 농락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은새는 팀원들과 미로의 함정을 차례로 격파하고 있었다.
풀숲 사이로 날아온 화살을 피해 마수의 목을 부러뜨린 오종환이 일행을 쳐다봤다. 은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걸로 개인 점수 모두 3천 점이죠?”
은새 일행은 개개인의 점수 차가 크지 않도록 서로 비슷하게 점수를 쌓는 중이었다. 어느 누가 왕에게 지목이 되어도 빼앗기는 점수가 일정하도록.
“저는 2,980점입니다!”
서호랑이 당당히 손을 번쩍 들었다. 박도윤이 수치스러워하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다들 점수를 잘 채우고 있었는데 혼자만 20점이 모자라다니.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막내지만 오늘따라 특히 그랬다. 그가 은새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유은새 헌터.”
“괜찮아요. 도윤 팀장이 죄송할 일이 아닌걸요. 그럼 다음에 나오는 마수는 서호랑 헌터가 잡는 걸로 하죠. 그보다.”
은새가 벽으로 둘러싸인 주변을 돌아보았다. 널려 있는 마수의 시체들을 확인한 그녀가 들고 있던 봉을 한 번 털고서 말했다.
“S+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쉽지 않아요?”
“앗, 유은새 헌터 안 돼요!”
“네?”
“그거 플래그……!”
서호랑이 또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플래그? 은새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시스템 창이 떠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띠링!
[몸풀기는 잘하셨나요? 지금까지 긴장하셨을 헌터분들을 위한 워밍업이었습니다!]
“아아, 역시…….”
약속된 플래그가 발동되자 서호랑이 좌절했다.
은새는 서호랑의 반응과 시스템 창에 뜬 ‘워밍업’이라는 단어를 보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했다.
“이럴 줄 알았어요. 유은새 헌터,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보스몹 죽이고 ‘해치웠나?’ 하는 것처럼요. 반전이 일어나는 마법의 주문이라고요!”
“그,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펄쩍 뛰는 서호랑을 달래며 은새가 등을 토닥였다. 잠시 로딩 중이던 시스템 화면에 곧 새로운 문자가 떠올랐다.
양쪽으로 갈라진 화살표. 덤덤히 화면을 보는 팀원들에게 시스템이 물었다.
[헌터분들의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뭔 차이가 있어?”
[그건 직접 경험해 보시는 게 좋겠죠!٩(๑>∀<๑)۶]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박도윤과 팀원들이 은새를 쳐다봤다.
은새는 고민하다가 오른쪽 길을 골랐다. 그녀의 뒤를 따라 팀원들이 신중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진 코너를 돌자, 바닥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모래벌판이 나타났다.
여긴…… 뭐 하는 데지? 조금 전까지 지겹게 튀어나오던 마수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일행들 앞에 시스템 화면이 떴다.
[스테이지B를 고르셨군요! 이곳의 테마는…… 두구두구두구. 두더지 잡기입니다!]
“뭐?”
“두더지 잡기?”
은새와 일행이 똑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여기서 무슨 두더지 잡기를 해?
의아해하는 그때 땅에 진동이 울렸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은새가 별과 봄을 끌어안으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또 던전 이상 현상인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비할 수 있게 준비했다. 긴장감을 갖고 땅을 바라보는데 곧 구멍 속에서 쇽! 하고 민머리 마수가 튀어나왔다.
크기는 대략 4~5m 정도. 정말 두더지처럼 생긴 마수였다. 두더지 잡기라고 했으니까.
“그냥 다 죽이면 되는 건가?”
생각보다 크기가 컸지만 문제없었다. 은새가 오른쪽 뒤에 있던 이예나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눈짓을 받은 이예나가 이능으로 망치 모양을 만들어 마수의 머리를 내려쳤다.
끼끼!
방어력이 높은 마수인 듯, 그것은 별 타격 없이 구멍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띠링!
[<붉은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팀 점수 500점 감점!]
“뭐?!”
“이거 무슨 규칙이 있나 본데요?”
황당한 표정을 한 이예나가 망치를 거두며 말했다. 은새가 새로 튀어나온 녀석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가까이 있던 박도윤이 검기를 날렸다. 마수의 민머리에 상처가 났다. 곧 뿅! 하고 마수가 사라졌다.
[<갈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팀 점수 100점 획득!]
“500점 뺏어 가고 꼴랑 100점 주냐? 치사한 시스템!”
서호랑이 우우, 야유하며 엄지손가락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가 불만을 말해도 민머리 마수는 계속 튀어나왔다.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마수를 보고 은새가 눈을 깜빡였다. 와, 정말 두더지 잡기네. 오랜만에 하는 게임 같은 느낌에 어쩐지 조금 재밌어졌다.
“일단 빨간색을 피해서 갈색만 잡으면 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구멍을 쇽쇽 드나드는 마수를 은새와 팀원들이 하나둘 잡았다. 꽤 점수를 쌓았다고 생각할 무렵. 새로운 색의 슬라보스가 나타났다.
끼끼!
갈색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은 흰색 슬라보스였다.
“저거 잡아도 괜찮을까요?!”
“일단 뭔지는 알아야 하니까 잡아 보죠!”
“그러다가 지금까지 쌓은 점수 날리면……!”
박도윤이 걱정했으나 은새가 베일 카라스의 봉으로 마수의 머리를 콩 찍었다.
뿅! 하고 흰색 마수가 사라졌다. 저건 점수를 어떻게 줄지. 긴장감이 흘렀다. 곧 새로운 시스템 화면이 떴다.
띠링!
[<흰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특별 보너스 10,000점!]
그 순간,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생각했다. 흰색은 무조건 잡는다.
그 밖에도 보라색, 노란색 등의 마수가 등장했다. 팀원들은 정신없이 마수들을 잡았다.
그럴 때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의문이 점차 커져 갔다. 던전에 와서 두더지 잡기 게임이라니.
하지만 이곳은 ‘던전’이었다. 정말 한가롭게 오락이나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자, 적응되셨나요? 이제 본 게임이 들어가겠습니다. 속도를 올려, 올려!٩(๑•̀ㅂ•́)و]
“본 게임?!”
은새와 일행들은 당황했다. 지금까지는 연습 게임에 불과했다니.
정말로 슬라보스가 정신없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두세 마리가 솟아오르기도 하고 0.5초도 안 되는 사이에 나왔다 들어가는 경우가 생겼다.
본능적으로 색에 상관없이 마수를 때려잡던 헌터들은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울상을 지었다.
정신없이 시스템 창이 올라갔다.
[<갈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팀 점수 100점 획득!]
[<갈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팀 점수 100점 획득!]
[<붉은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팀 점수 500점 감점!]
[<보라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전원 동체 시력 능력치 하락!]
…
[<흰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특별 보너스 10,000점!]
[<노란색 슬라보스>를 잡았습니다! 전원 민첩성 상승!]
“으아아! 이제 그만!”
서호랑이 눈을 꾹 감고 막 튀어나온 마수를 때리려고 했을 때였다.
“저건 안 돼!”
가까이서 마수를 잡던 이예나와 오종환이 양쪽에서 서호랑을 급히 붙잡았다.
잔상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진 슬라보스는 얼핏 보라색으로 보이는 ‘검은색’이었다.
“뭐, 뭐예요?”
“살았다. 저건 딱 봐도 불길해. 페널티나, 하여튼 엄청 안 좋은 거였을 거야.”
“너 힘든 건 알지만 눈은 뜨고 해라.”
“예…… 죄송합니다.”
두 사람에게 혼난 서호랑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검은색을 잡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들은 몰랐지만 미리네 팀이 이곳을 지날 때 솔이 검은색 슬라보스를 잡아 점수 리셋을 당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마수들이 나오는 속도에 팀원들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 악랄한 시스템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Warning! Warning! Warning!]
[몬스터 웨이브가 다가옵니다! 열심히 살아남아 보자구요!]
지금까지 구멍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했던 슬라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갈색, 붉은색, 보라색, 노란색, 흰색…….
여태 점수판에 지나지 않았던 마수들의 역습은 헌터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잠깐만, 저거 방어력 개쎈 거 아니었어?!”
“한 마리 잡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텐데 저렇게 한 번에 몰려들면……!”
일행이 우왕좌왕하자 그때까지 한 발 물러서서 관전하고 있던 벨키오르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불길이 한 올, 한 올 겹쳐 아름다운 피닉스가 탄생했다. 피닉스는 긴 꼬리를 늘어뜨린 채 하늘을 날아올라 길게 포효했다.
끼엑-!
피닉스가 일대를 집어삼킬 불길을 뱉어 냈다. 그럴 때마다 슬라보스가 도로 구멍으로 숨거나 까맣게 타 죽었다.
머릿수가 모여 있으니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켜켜이 넘어갔다. 아무리 방어력이 강해도, 그보다 더 강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 던전에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어…….”
“…….”
벨키오르 덕분에 마수들이 전멸하자 팀원들이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이거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에 팀원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은새가 팀원들을 대신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벨키오르 님 덕분에 수월하게 끝났네요!”
[아빠, 아빠가 최고예여!]
삐삐!
별과 봄이 벨키오르 근처로 날아가 신나 하며 주변을 뱅뱅 돌았다. 벨키오르는 무심하게 다시 팔짱을 끼었다.
은새는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벨키오르의 존재는 치트 키나 다름없었다. 지금처럼 그가 조금씩 도와주기만 하더라도 앞으로의 공략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러다 우리가 팀전 1등 하는 거 아니야? 웃는 은새 앞에 시스템 화면이 떴다.
띠링!
[……( ;°Д°) 스테이지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랜덤 보상이 담긴 <열쇠 카드>가 지급됩니다!]
시스템도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도 곧 정신 차리고 할 일을 했다. 은새의 앞에 열쇠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가 나타났다.
보상을 확인한 은새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