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힘을 숨긴 드래곤
헌터들은 그런 벨키오르를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품 대하듯 멀찍이서 관찰했다.
그륵그륵그륵.
오물을 내뱉으며 마수 한 마리가 벨키오르에게 접근했다.
“으아아…… 저 녀석은!”
“으욱…….”
마수가 내뿜는 악취에 헌터들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늪의 재앙이라고 불리는 포일세티네였다.
끈적이는 액체가 전신을 뒤덮고, 정체 모를 덩어리들이 툭툭 떨어져 바닥을 더럽혔다.
모 애니메이션의 질퍽이를 닮았다며 한국 헌터들 사이에선 그리 불리기도 했다.
‘여기 마수들은 신기하군. 겁이 없는 건지, 지능이 부족한 건지.’
벨키오르가 다가온 포일세티네를 아무 표정 없이 관찰했다. 그의 세계에서 보통 마수들은 드래곤의 기척을 감지하면 접근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드래곤이 없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벨키오르에게도 상당수의 마수들이 몰려들었다.
벨키오르는 그 점을 흥미로워하면서 마력을 일으켰다.
삐삐!
포일세티네의 끔찍한 외양과 냄새 때문에 봄이 서럽게 울었다. 엄마, 엄마 어디 갔어? 이 아저씨랑 나만 두고 어디 갔어?
발버둥 치는 봄이 날아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은 벨키오르가 손을 휘둘렀다. 금빛 마력이 기형학적인 문양을 이루고 커다란 마법진이 허공에 새겨졌다.
곧 이글거리는 소용돌이 화염이 포일세티네를 덮쳤다.
그르르르륵!
포일세티네가 오물을 뱉으며 저항했다. 몸을 비틀 때마다 사방으로 오물 덩어리가 튀었다.
마수는 형체도 불분명한 진흙으로 된 손으로 성큼성큼 기어 왔다. 그대로 손을 들어 벨키오르를 짓누르려는 그때, 일순 신형이 사라진 그가 마수의 뒤에서 나타났다.
“가소롭군.”
포일세티네의 배 밑에서 푸른 불꽃이 치솟았다. 조금 전 소용돌이 불꽃보다 몇 배는 위력이 강한 마법이었다.
그라아아악!
타오르는 불꽃 기둥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주위에 탄내가 진동을 했다.
포일세티네는 바싹 익어 장인이 깨부순 도자기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마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마수의 잔해를 보고 헌터들이 경악했다.
“저 화력은 뭐야! 불 속성 마법사였어? 아니, 일반 원소 계열 이능 헌터들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A급? S급? 모르긴 몰라도 상급 헌터인 건 확실하다. 미국의 루번 패트랑 겨뤄도 안 지겠는데?”
“마법사 개멋있다……. 지금이라도 전직 가능?”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보다 저 마수가 저렇게 간단히 잡을 수 있는 거였어?”
벨키오르는 헌터들의 숙덕거림에서 몇 가지 단서를 잡아냈다. 이 정도의 마법에도 호들갑인가.
그가 불 마법을 사용한 건 단순히 마수와의 상성 때문이었다.
물과 흙으로 이루어진 몸이라면 불로 바싹 말리면 된다. 어떤 마수라도 약점은 반드시 있었다.
수많은 마수들을 상대해 온 벨키오르였다. 그걸 알아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벨키오르가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은 불의 마법만 사용해야겠군.’
다른 속성 마법을 사용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안 보고도 예상이 가능했다.
그도 젊었을 적 짧게 1, 2백 년 정도 인간 세계로 유희를 떠났던 적이 있다.
그때는 선대가 살아 있었다. 놀다 오라는 선대의 말에 인간 세계에 대한 상식 없이 인간들 사이로 뛰어든 벨키오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맨손으로 천지를 가르고 원소 마법을 마구잡이로 쓰니 정체가 금방 탄로 났다. 우습게도 마왕이라는 소리도 들어 보았다.
그때 먼저 유희를 떠났던 동족들에게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모른다. 선대도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혀를 쯧쯧 찼다.
그제야 벨키오르는 인간 마법사는 일반적으로 한 분야에서만 두각을 드러내고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자들이나 두 가지 이상의 원소를 다룰 줄 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유희는 짧고 굵게 끝났다. 아무리 인간을 흉내 내도 그의 특출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인간 세계로 발걸음을 끊었다.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벨키오르에게는 반려를 찾는 게 더 시급했다.
가끔 세계수를 노리고 영역을 침범하는 용사 일행을 상대해 준 게 그가 인간을 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인간 세계에서 수많은 문명이 생겨났다 사라질 때까지. 벨키오르는 인간과 인간 세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배운 게 있다면 인간들 틈에서 지나치게 튀면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경외받거나 배척당하거나.
벨키오르 입장에서는 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저리 찬탄을 자아낼 정도면 이 정도 수준으로 맞추는 게 행동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힘을 숨긴 드래곤이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벨키오르가 적정 수준을 유지한다고 해서 일반적인 불의 이능 헌터와 같은 급일 리 없었다.
어느새 또 튀어나온 마수들을 보고 그가 손을 휘저었다. 벨키오르의 금빛 마력이 유수처럼 흘렀다.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마법진에서 불꽃 화살이 새카맣게 쏘아졌다. 벨키오르를 향해 이를 드러내 보이던 마수들이 죄다 고슴도치가 되었다.
불꼬챙이에 꿰뚫린 마수들은 반항 한 번 못 해 보고 픽픽 쓰러졌다.
박도윤과 팀원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박도윤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팀원들은 난리가 났다.
“와, 저 사람 강한 거는 알았지만 S급 맞는 것 같은데?”
“정식 길드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나? 그러면 우리 길드 세계 랭킹 훌쩍 뛸 것 같은데.”
“야, 그랬다가 다른 길드들이 가만있겠냐? 지금도 도천 길드에 S급들 너무 몰려 있다고 국민 청원 올리는데.”
“그것들 되게 웃김. S급이라도 독립할 생각이 없으면 안 나가는 거지, 뭘 이래라 저래라야.”
투덜거리는 헌터들 뒤로 서호랑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불길을 두른 손으로 마수의 머리를 터트리는 벨키오르를 보며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절대 까불지 말아야겠다…….”
박도윤이 그런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는 생각이 많아졌다.
‘저자에 관해서 외부에 알려진 바는 없다. 하물며 이름조차도.’
저런 강자가 여태 유명해지지 않은 건 이상했다. 길드장님은 왜 그를 유은새 헌터 곁에 놔두는 거지?
‘저자는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지? 유은새 헌터는 그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박도윤은 벨키오르가 적으로 돌아섰을 때를 가정하고 소름이 끼쳤다.
중국이 언제 습격해 올지 모르는 마당에 그가 있다면 든든하기는 하겠지만 만약 중국 측에 설득당해 넘어간다면?
박도윤은 팀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벨키오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휘두르던 봉을 바닥에 찍어 세운 은새가 허리에 손을 얹고 주변을 돌아봤다.
“대강 정리됐나?”
그녀 주변으로 쓰러진 마수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질린 헌터들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한 은새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브가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남은 헌터만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들이 던전에 들어간 지 3시간……. 이미 거리는 상당히 멀어졌겠지만 뒤따라가야 해.’
“자네가 유은새 헌터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은새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조일수 헌터님. 그리고 고갑영 헌터님. 신재우 헌터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은새가 존경을 담아 1세대 헌터들에게 인사했다. 1세대 헌터란, 격변의 시대가 도래한 직후 활약한 헌터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조일수가 껄껄 웃었다.
“멀리서 지켜봤는데 자네 실력이 어마어마하더군. 티브이에서 자주 봤어. 도와주러 와 줘서 고마우이.”
“뭘요. 세 분에 비하면 좀 더 노력해야지요. 아직 창창하신데 좀 더 활동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예끼! 늙은이 학대일세. 그래도 그렇게 봐 주니 고맙군.”
고갑영이 멀리 빛나는 던전 입구를 보았다.
“이제 던전에 들어가는 건가?”
“네. 친구들은 먼저 들어갔고, 뒤따라가야죠.”
“조심하게. 늙으면 노파심만 늘어 가지고…….”
고갑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은새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감사합니다. 무사히 생환하도록 할게요.”
조일수와 1세대 헌터들이 자리를 뜨고 은새가 일행을 불러 모았다. 멀리 있던 벨키오르가 어느새 제일 먼저 은새의 곁에 나타났다.
삐-! 삐삐!
은새를 본 봄이가 그제야 벨키오르의 손에서 풀려나 삐삐 서러운 울음을 토했다. 은새가 품에 안겨 오는 봄을 부둥부둥 달랬다.
“우리 봄이 그랬어~ 나한테 오고 싶었는데 벨키오르 님이 못 가게 했어~”
은새가 눈짓으로 벨키오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가까이 있는 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봄이를 놓고 갈 수도 없고…….
떨어지지 않으려 품에 얼굴을 박은 봄을 보고 은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걱정을 눈치챈 별이 포르르 날아올랐다.
[뉴나! 봄이는 제가 데리고 누나 옆에 딱 붙어 다닐게여!]
“별아, 그래 줄 수 있어? 봄이가 아직 어려서 누가 옆에 있어 줘야 할 거 같은데.”
별이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저는 이미 베테랑이라구여!]
“그래. 별이만 믿을게.”
웃으며 말한 은새가 벨키오르에게 눈빛으로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신호를 전했다. 벨키오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팀장, 그리고 팀원님들. 이제 던전으로 입장합니다.”
“예!”
“들어서 아시겠지만 던전 지형은 미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은새는 별과 봄을 안고 던전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