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이대로는 안 돼
백찬민이 솔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일찍 좀 다니지? 느려 터져가지고.”
“뭐래. 속보 뜨자마자 날아온 거거든? 무슨 수를 쓴 거야?”
솔이 달려드는 마수의 머리를 불의 창으로 꿰뚫으며 눈꼬리를 세웠다.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는 백찬민을 보고 솔이 이를 갈았다.
그녀의 옆에 있던 미리내가 장판 버프를 걸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골드스타 길드에 장거리 이동 이능 헌터가 있었나?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이능을 가진 헌터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야?! 2차 웨이브가 온다!”
유하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마수를 향해 빛의 화살을 쏘아 댔다.
던전 브레이크는 한 차례로 끝나지 않는다. 보통 3차까지 웨이브가 진행되고 그 이후에는 던전 공략까지 마무리해야 했다.
솔은 백찬민과 으르렁거리는 걸 멈추고 마수에 집중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할 땐 하는 그녀였다.
솔의 눈에 암석 표피를 지닌 마수가 육중한 몸체를 끌고 기어오는 게 보였다.
“오, 스카닝! 손맛이 괜찮겠는데?”
스카닝은 주변의 무너진 건물 잔해를 집어삼키며 몸집을 더 키웠다. 헌터들이 힘겹게 스카닝의 진격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솔이 총알처럼 날아가서 이능을 실은 주먹으로 마수의 머리를 갈겼다.
캭! 캬륵캬륵!
강한 충격을 받은 스카닝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솔은 창과 주먹을 사용해 스카닝을 사방에서 타격했다.
그때마다 스카닝의 몸에서 암석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단단하기가 강옥에 비견되는 스카닝이지만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S급 헌터의 막무가내식 폭격에는 소용없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솔은 가장 연약한 부분부터 스카닝을 차근차근 깨부쉈다.
키야악!
위기감을 느낀 마수가 입을 크게 벌리며 솔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어딜!”
솔은 마수의 입에 불의 창을 꽂아 세우고, 몸부림치는 스카닝의 목구멍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잘 가라.”
불의 이능이 나선형을 그리며 쏘아졌다. 순식간에 스카닝의 몸을 집어삼켰다.
캬르르륵! 캬륵!
거세게 몸부림치던 스카닝이 쿵 쓰러졌다. 까맣게 탄 스카닝을 본 솔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퐁.
“캬! 좋아, 다음 간다!”
포션을 하나 들이켠 솔은 쏜살같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야, 인찬! 그쪽으로 갔어!”
“봤어! 이속 버프 부탁해, 미리내!”
“오케이!”
한편 유하와 인찬, 미리내는 메리아독을 상대하고 있었다. 메리아독은 지느러미를 물결처럼 움직여 공중을 부유하는 마수였다.
얼핏 커다란 뱀장어처럼 보이는 그것은 공기 중의 수분을 조종해 헌터들을 공격했다.
메리아독의 능력을 모른 채 유약한 생김새만 보고 덤볐던 그들은 살갗이 얼어붙어 동상에 걸리거나 마수가 뿜어낸 물방울에 사로잡혀 질식하는 신세가 되었다.
동상은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피부가 썩어들어 갔고, 물방울에 갇힌 사람들은 누가 꺼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익사했다.
“아, 저 물방울 진짜 성가시네!”
본체를 공격해야 했지만 계속 뿜어내는 물방울이 시야를 방해했다. 유하는 부단히 화살을 쏘며 물방울에 갇힌 이들을 구해 냈다.
뽀륵뽀륵.
“크윽! 이 녀석 숨결이 뭔데 이렇게 차가워. 얼굴이 꽁꽁 얼겠어!”
“기다려, 인찬아. 지금 디버프 걸게!”
인찬이 메리아독의 돌격을 막는 동안 미리내가 마수에게 디버프를 걸었다.
다시 한번 돌진하기 위해 입을 벌리던 메리아독의 시선이 미리내를 향했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게 그녀인 걸 아는 양.
뽀르르륵…….
돌진을 멈춘 메리아독이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했다. 순간, 메리아독의 형체가 사라졌다.
“어디 갔지?!”
메리아독의 꼬리를 쫓던 인찬이 당황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미리내도 깜짝 놀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메리아독이 그들의 뒤에서 스윽 나타났다.
뽀륵뽀륵.
달려드는 메리아독의 입에서 무언가 쏘아졌다. 정면에 있던 미리내가 미처 피하지 못했다.
“미리내야!”
유하가 미리내를 향해 침을 뱉은 메리아독의 몸에 화살을 꽂았다.
“윽.”
본능적으로 팔로 막았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맞은 미리내가 신음을 흘렸다. 끈적이는 액체가 전투복을 뚫고 흘러내렸다. 미리내의 피부가 타들어 갔다.
‘이건…… 산성 물질인가?’
방어 효과가 있는 전투복까지 쉽게 뚫을 정도라니. 일반 메리아독의 침과는 달랐다.
뽀륵뽀르륵.
“이 자식이!”
유하의 화살이 온몸에 도배된 메리아독이 다시 사라지려고 하자, 인찬이 방패로 수없이 가격했다.
평소 순박한 성정의 인찬이지만 그 또한 S급 헌터였고, 친구들을 몹시 아꼈다. 미리내를 다치게 한 마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걸로…… 끝이다!”
퍼억!
뽀르르륵.
인찬의 마지막 일격이 메리아독에게 타격을 입히고 휘청이던 메리아독이 끝내 쓰러졌다.
“최미리내! 괜찮아?”
메리아독이 멈춘 걸 확인한 유하가 빠르게 달려왔다. 미리내는 이를 악물고 괜찮은 척을 했다.
“어, 힐 하면 돼.”
“그래도 안 아픈 건 아니잖아. 으, 진짜 괜찮아?”
“이 정도야 뭘.”
미리내가 부상 부위를 이능으로 감쌌다.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시간이 지나자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당분간 이쪽 팔은 쓰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아직 뻐근한 팔을 내려다보며 미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돼.’
미리내가 벨키오르와 전투를 치렀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더 강한 적이 나타났을 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좀 더 친구들에게 도움이 돼야 했다.
미리내는 벨키오르를 떠올렸다.
‘도움을…….’
그녀는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분명 거래의 대가가 만만치 않다고 했어.’
강해지기 위해서 벨키오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나 혼자서 능력을 발전시키는 수밖에 없어.’
지금은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미리내는 자신에게 방어 버프를 걸며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2차 웨이브는 도천 길드의 가세로 수월하게 막아 낼 수 있었다. 잠시 짬이 생겼을 때 유하가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헌터관리본부에서 연락 왔어. 이번 던전 지형은 미로래.”
“미로? 빡세겠다. 등급도 높잖아.”
먼지 묻은 손을 털던 솔이 툴툴거렸다. 유하가 질문했다.
“유은새 어디래?”
“메신저 대답 없는 거 보니까 이동 중인 모양인데?”
“그럼 금방 오겠네. 3차 웨이브는 은새한테 맡기고 우리는 던전에 들어가자.”
“뭐? 은새 안 기다리고? 던전 구조가 미로면 안에서 은새랑 만나기 힘들 텐데.”
인찬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가뜩이나 일반 던전보다 마수가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은새가 없으면 제약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빨리 들어가서 던전 공략해 주는 게 저 사람들한테는 도움될걸.”
솔이 고개를 까딱했다. 지천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헌터들이 널려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힐끗 그들을 살핀 인찬이 미간을 좁히며 머뭇거렸다. 그때, 핸드폰을 품에 집어넣던 유하가 소리쳤다.
“야야, 골드스타 길드장 던전 들어가나 봐!”
“뭐? 그럼 우리도 안 갈 수 없지.”
앞서가는 백찬민을 보고 솔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유하와 미리내도 솔의 뒤를 따랐다.
“안 되는데…….”
인찬이 중얼거렸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
백찬민은 S+급 미로 던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인원을 점검했다. 아직 3차 웨이브가 남아 있었지만 도천 길드보다 먼저 던전을 선점하는 게 중요했다.
이번처럼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해 정식 경매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경우, 먼저 공략하는 쪽이 소유권을 가진다.
“길드장님, 이 인원으로 되겠습니까?”
육재희가 백찬민에게 의중을 확인했다. 미로 던전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각별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골드스타 길드의 공략 구성원은 대충 보기에도 밸런스가 좋았다.
검사 여덟, 창술사 둘, 모험가 셋, 저격수와 궁사 다섯, 탱커 일곱, 힐러 셋, 특수 스킬 보조계 둘.
그중에는 천창현,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용히 장비를 체크하는 천창현을 힐끔 바라본 육재희가 소곤거렸다.
“……저자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골드스타 길드에 들어간 후 천창현은 무서운 속도로 길드를 제패해 갔다.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뚝 떨어진 그를 배척하는 길드원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차근차근 응징해 가며 주변의 인정을 이끌어 냈다. 특히, 연구팀은 천창현을 거의 신처럼 숭배했다.
그가 공유한 상급 포션 제조법이 보급화 과정이 필요하긴 해도 진실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됐어. 이미 끝난 얘기 아니었나?”
백찬민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는 천창현의 행보를 눈여겨보되,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천창현은 마치 자신의 어릴 적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가진 건 없으면서 패기 넘치고 과감한 것이.
비록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었으나 천창현은 스스로가 한 말을 지키고 있었다. 도천을 이기게 해 주겠다는 말.
포션 제조법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도천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