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기묘한 인연
그들은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도다리와 하늘이는 특수 제작된 우리에 담겨 이동했다.
비행기에서부터 우리까지, 마수들이 고생이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만일의 사태란 중국이 습격해 오거나 갑작스럽게 던전 공략에 투입될 경우를 말했다.
은새와 벨키오르, 별과 봄을 태운 차는 런던에서 벗어나 소도시로 들어갔다.
골목에 작은 상점들이 즐비했다. 스쳐 지나가면서 본 가게 앞 유리창에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색색의 장식이 붙어 있었다.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가로수가 줄지어 선 인도에는 개와 산책하는 사람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이들이 보였다.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점심 식사를 하는 중년인도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를 구경하며 그렇게 도착한 한 저택. 겉보기에는 다른 집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은새와 벨키오르는 눈치챘다.
삼엄한 방호 시스템. 곳곳에 배치된 경호 인력까지. 스텔라 본은 영국에서 중요 인물로 취급되었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린다가 앞서서 대문을 열었다. 홍채 인식으로만 열리는 문을 통과하자 짙푸른 정원이 펼쳐졌다.
정원 안쪽에 고용인의 부축을 받으며 나와 있는 노년 여성이 보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스텔라가 고개를 돌렸다.
희뿌연 눈동자에는 은하수가 담겨 있었다. 여태 봐 온 인간들과 다른 생김새에 별이 움츠러들었다.
스텔라를 처음 본 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반응이었다.
[뉴나, 저 사람 이상해요…….]
“괜찮아, 별아. 안녕하셨어요, 스텔라 씨?”
“유은새 헌터. 어서 와요.”
마치 그녀일 줄 알았다는 것처럼 스텔라가 놀라지도 않고 빙긋 웃었다.
그녀는 시각을 거의 소실한 상태였다. 지팡이로 더듬더듬 짚어 은새 앞까지 왔다.
은새는 가만히 서서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 줬다. 나서서 그녀를 부축하지 않았다.
그게 실례인 걸 아는 것처럼.
“혹시 유은새 헌터 옆에 누가 있나요?”
은새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벨키오르와 눈을 마주쳤다.
벨키오르는 마법으로 인해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스텔라의 말에 그제야 린다와 고용인이 벨키오르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감지한 스텔라가 낮게 웃었다.
“후후. 다들 몰랐던 모양이군요.”
“저기, 마법 이능 헌터분이 계십니다. 하지만 스텔라 씨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장담드릴 수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아주 지고하고 영험한 분이시군요.”
은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드래곤인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었다.
은새가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의미로 벨키오르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뜻인 듯했다.
내심 안도한 은새가 스텔라에게 질문했다.
“스텔라 씨는 오늘 제가 이분과 함께 올 거라는 걸 아셨나요?”
“유은새 헌터의 신변에 변화가 있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계신 분께서 도움을 줬을 거라는 것도요.”
“와, 스텔라 씨는 여전하시네요.”
활짝 웃은 은새가 별과 봄을 벨키오르에게 맡기고 스텔라의 팔짱을 꼈다.
손녀 대하듯이 스텔라가 은새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생했다고, 잘 견뎠다고 말하는 듯했다.
“손님을 밖에 오래 세워 뒀군요. 안으로 들어가죠.”
스텔라가 앞장서서 손님들을 이끌었다. 그녀가 허락했기에 린다는 벨키오르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스텔라가 은새와 벨키오르를 데리고 간 곳은 천장이 온통 유리로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은새의 경호를 위해 따라온 박도윤 팀과는 잠시 떨어졌다.
낮이었기에 햇볕이 환하게 내리쬐었으나 밤에는 반짝이는 별로 가득 찰 게 자명했다.
린다와 은새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은 스텔라가 말문을 뗐다.
“새끼 드래곤과 춘티엔더야오칭을 새 마수로 들였다고요.”
“네. 별이랑 봄이에요.”
삐!
낯을 가리는 별과 달리 봄은 제 이름이 불리자 신나서 스텔라에게 날아갔다.
봄은 스텔라의 뺨에 제 머리를 비볐다. 스텔라가 후후, 웃으며 복슬복슬한 봄의 꼬리를 쓸어 주었다.
“기묘한 인연입니다. 원래라면 닿지 못할 존재와 태어나지 못했을 생명인데요.”
“…….”
은새의 표정이 굳었다. 스텔라는 빈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곧 천금(千金). 하늘의 이치를 이해하고 운명을 점지하는 천공오성(天空悟性, Prophet of the Stars)의 이능을 지녔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저것이 본래 별과 봄의 ‘예정된 운명’이라는 뜻이었다.
별과는 사는 세계가 달라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건 이해하지만 봄이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니. 가슴 아팠다.
“하지만 염려 마세요. 더 강한 운명이 덧씌워졌으니.”
“네에…….”
더 강한 운명이란 건 또 뭐지. 궁금증이 솟아올랐지만 은새는 질문할 수 없었다.
스텔라와 대화할 때 되묻는 건 금지였다. 그녀는 말할 수 있는 내용만 말했다.
물어서 답을 해 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진즉 그녀가 먼저 말해 줬을 것이었다.
가만히 입을 다문 은새를 보고 은은한 미소를 띤 스텔라가 먼 과거를 회상했다.
“유은새 헌터와 알게 된 지도 제법 됐군요.”
“그러네요.”
은새가 동조했다. S급 헌터로 각성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국의 초정을 받아 온 자리에서 스텔라와 처음 만났다.
초면임에도 살갑게 대해 주던 그녀는 은밀하게 은새의 위험을 예고해 주었다.
덕분에 은새는 큰 사고를 미연에 피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은새의 저주를 가장 먼저 알아챈 이이기도 했다.
스텔라는 은새에게 은인이자 든든한 상담가였다.
손을 뻗어 은새의 양손을 잡은 스텔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스텔라 씨! 그런 말은……!”
곁에 서 있던 린다가 기겁했다. 은새의 입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헌터 10명 가운데 1명으로 꼽히는 스텔라가 죽는다면 아마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다마다요.”
은새가 스텔라의 건강을 염려하는데 정작 그녀는 덤덤했다. 빙긋 웃은 스텔라가 은새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진귀한 능력을 얻어 천수를 누렸으니 더 욕심내서는 안 되지요. 제가 유은새 헌터를 부른 건,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뭐든 말씀하세요.”
은새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경청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텔라가 조심히 머리를 숙였다.
“이 세계를, 부탁합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은새가 반문했다. 스텔라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긋난 톱니바퀴 하나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군요.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어요. 두 번의 칼날. 별님들이 말씀하시길, 유은새 헌터에게 이 어둠을 헤쳐 나갈 빛이 보인다는군요.”
“제,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유은새 헌터에게는 충분히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스텔라의 고개가 살며시 벨키오르를 향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벨키오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드래곤은 결코 선의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거래’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 줄 모르고 감히 인간이 입에 올린단 말인가.
“건방지군.”
“스텔라 씨께 그런 말은 무례합니다!”
울컥해서 소리치는 린다를 무시하고 벨키오르가 흉흉한 눈빛을 쏘아 냈다. 세 사람 사이에 아슬아슬한 기류가 감돌았다.
은새가 손을 안절부절못했다.
“후후, 괜찮습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지고하신 존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하지만 저도 결코 쉬이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
벨키오르와 스텔라의 시선이 부딪쳤다. 정확히 자신이 있는 곳을 보는 그녀를 보며 벨키오르가 묘한 얼굴로 기운을 거두었다.
압박감이 사라진 것을 느낀 스텔라가 나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모처럼 오셨으니 푹 쉬다 가세요. 이곳은 어느 곳보다 안전하니까.”
스텔라가 피로한 낯빛을 했다. 다시 은새에게 고개를 고정한 그녀는 꽉 잡은 손을 토닥였다.
은새가 중국에 노려지고 있는 걸 아는 눈치였다. 그리고 춘티엔더야오칭의 부화가 불러올 미래도.
은새와 일행이 쉴 수 있게 고용인들이 방으로 안내했다. 은새의 뒤를 따라 나가는 벨키오르에게 린다가 끝까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 이능 헌터라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군요.”
불쾌해하는 린다에게 스텔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 저 둘이 드디어 만났구나. 우리에게는 천운이다.”
“천운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요? 대체 저 남자가 누구길래 그러십니까. 저는 저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내가 눈치채지 않았으면 아마 가는 날까지 존재를 몰랐겠지.”
“그 정도입니까? 마법 이능이 희귀하다지만 그다지 대단할 정도의 힘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텔라 씨에게 그런 태도라니…….”
당장이라도 벨키오르에게 따지러 갈 듯한 기세에 스텔라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말거라. 그래도 되는 분이시니.”
“‘분’이라니, 과분한 호칭입니다.”
단호한 린다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스텔라가 살며시 웃었다.
린다의 부축을 받아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서서 천장을 올려 봤다. 그녀의 희뿌연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이번에는 부디 늦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