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본격적인 헌터의 밤이 시작되기도 전에 은새를 중심으로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기자들은 그녀를 취재하려고 아우성을 쳤고, 각각의 이유로 모인 헌터들은 망연한 표정을 했다.
‘조금 미안하네.’
은새가 뒷목을 쓸었다. 아무리 봄이를 소개하기 위해 연 파티라고 해도 헌터들에게 이 자리는 큰 기회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가고 나면 본무대라고 할 수 있는 길드 설명회와 스카우트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분위기도 그들 위주로 돌아가겠지. 은새는 1부만 참석하기로 했기에 끝나면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공식적인 기사는 내일 아침, 각 신문사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점점 격렬해지는 분위기에 도천 실무팀 팀장 김윤희 헌터와 한국 헌터 협회 경호팀 팀장 심재범 헌터가 기자들을 중재했다.
퇴실 조치를 하겠다는 경고에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질문을 멈추었다. 그러나 은새와 봄이를 향한 플래시 세례는 멈추지 않았다.
아마 사진이라도 찍어 올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은새가 생각났다는 듯 벨키오르에게 물었다.
“참, 벨키오르 님. 사진 찍혀도 괜찮아요? 인식 저하 마법이 카메라에도 작용할까요?”
“반짝이는 저것 말인가? 상관없다. 흐릿하게 나오겠지.”
초점이 어긋난 것처럼 나오려나? 하지만 사진 전부가 그렇게 나오면 분명 말이 나올 터였다.
그리고 은새의 예상대로 기자들이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올린 사진을 확인한 네티즌들은 왜 저곳만 뿌옇게 나오느냐고 소란이 일었다.
유은새의 휘광에 생기를 뺏겼다는 둥, 귀신이 찍힌 거라는 둥 오만 추측이 오가는 것도 모른 채 은새는 마수들과 함께 화려한 쇼를 연출했다.
이번에는 황새와 백합이도 빠지지 않았다. 황새는 그동안 숨겨 왔던 끼를 마음껏 방출했고, 백합이는 단단해지는 아름다운 비늘로 여성 헌터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나두 멋진 거, 대단한 거 할 쑤 있는데!]
별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마수들을 보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럼 별이야, 반딧불이처럼 작은 빛을 뿌려 줄 수 있어?”
[네! 해 보께요!]
별의 개나리색 마력이 약동했다. 파앗! 연회 홀과 야외 파티장에 하얀 빛무리가 쏟아졌다.
연말에 거리를 나가면 일루미네이션으로 볼 법한 광경이었다.
“이게 뭐야? 누가 한 거야? 예쁘다…….”
“김유하 헌터 아닐까? 빛 이능을 이 정도로 세밀하게 다룰 수 있는 건 김유하 헌터밖에 없잖아.”
사람들이 와인색 정장을 차려입은 유하를 쳐다봤다. 그는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김유하 헌터가 아니라고?
“어? 그럼 누가…….”
“신인이나 일반 헌터들은 불가능할 텐데…….”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두리번거리며 혹시 모를 다른 빛 이능 헌터를 찾는 그들을 보며 별이 앞발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히히. 내가 했는데!]
“맞아~ 우리 별이가 했는데.”
둘은 정답게 귓속말을 했다. 은새와 다니며 제법 힘 조절을 할 수 있게 된 별이었다.
가볍게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새는 봄이가 어디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깜짝 놀랐다.
“앗, 봄이 잠들었네요. 제가 들까요?”
이미 잘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봄이는 졸린 듯 벨키오르에게 안겨 고롱고롱 잠에 빠져 있었다.
참으로 겁 없는 하룻강아지였다. 드래곤의 품에 안겨 잠들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그의 인식 저하 마법 덕분에 봄이도 잘 때만큼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벨키오르가 힐끔 봄이를 내려다봤다. 은새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느낀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됐다. 파티를 즐기도록.”
그 말을 남긴 채 벨키오르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어디 가세요?”
당황한 은새가 그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친구들이 그녀를 부른 게 먼저였다.
“유은새애!”
솔이 멀리서 크게 소리쳤다. 소원이라던 LED를 뺏기고 평범하게 우아한 노란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당당해 보였고, 아름다웠다.
우르르 몰려오는 친구들을 보고 은새가 손을 흔들었다.
“다들 좋은 밤.”
“이 시간에 밖에서 유은새를 보다니 감개무량…….”
“시끄러워. 오버하지 마, 김유하.”
소매에 눈물을 찍어 내는 척을 하는 유하에게 미리내가 웃으며 촌철살인을 날렸다. 친구들은 은새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온전히 집중될 수 있게 늦게 입장한 참이었다.
가슴에 굵은 진주 장식을 단 무릎까지 오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미리내가 은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잿빛 머리를 한쪽으로 모아 내려 유려한 목선이 드러났다.
미리내가 허리를 살짝 숙여 은새의 귀에 속삭였다.
“저기, 저쪽으로 간 사람 벨키오르 님이지?”
“어? 어떻게 알아봤어?”
아무도 못 알아봤는데. 놀라는 은새를 보고 미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도무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네 곁에 있길래. 네가 아무나 근처에 다가오게 할 리 없잖아.”
“아, 그런 거야?”
은새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친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곁을 주지 않으니. 그래도 단정적으로 확신하는 미리내의 말이 웃겼다.
벨키오르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던 미리내가 감탄했다.
“마법으로 이런 것까지 할 수 있구나. 정말 대단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 뭐 좀 먹었어? 마수들 챙긴다고 또 아무것도 안 먹었지.”
“아~ 깜빡했어.”
“내가 때 되면 식사하는 습관 들이라고 했잖아. 너 나중에 나이 먹어서 어쩌려고 그래.”
“음, 괜찮아.”
요즘은 다르다. 벨키오르가 하도 잘 챙겨 먹여서 배고픈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다.
미리내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은새가 품 안에 있는 별에게 질문했다.
“별아, 뭐 먹고 싶어? 여기 맛있는 거 많아.”
[움, 달콤한 거 먹고 시퍼요.]
“그래! 그럼 디저트 먹자!”
“유은새, 밥을 먹으라고!”
이곳은 호텔이니, 원한다면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뭐든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은새는 케이크와 마카롱, 젤리, 아이스크림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별에게 마음껏 먹였다. 별은 행복해하며 단것을 만끽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는지 은새를 통해서 알게 된 별이었다.
두 사람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벨키오르는 잠든 봄을 안고 한쪽 벽에 기대서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별에게 이것저것 권하며 기뻐하는 은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별이 입가에 초콜릿을 묻히자 은새가 얼른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 줬다. 정작 그런 그녀의 입술에도 생크림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친구라는 여자가 타박하며 냅킨을 건네줬다. 은새는 배시시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저렇게 좋을까.’
벨키오르는 아까 전 은새가 호텔 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을 곱씹었다. 드래곤으로서 그는 미적 감각이 탁월했고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왕을 홀려 나라를 망하게 한 경국지색도 만나 보았다. 실은 유희를 떠난 동족이었지만.
하지만 이번만큼 동요한 것은 처음이었다. 순간 심장이 찌릿했을 정도로.
‘반려…….’
반려의 인은 아직 잠잠했다. 그러니 은새는 반려가 아니다. 하지만 자꾸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복잡한 심경에 슬쩍 고개를 돌린 벨키오르의 눈에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그자는 온통 시커먼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은새에게 듣기로 헌터라는 족속은 원래 옷차림이 특이하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 벨키오르와 아기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아무도 그의 옷차림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기묘한 자군.’
기운이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정확히 어떤 게 다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느낌.
남자를 둘러싼 알 수 없는 기운이 어쩐지 주변과 충돌하는 게 보였다. 경계의 일그러짐.
가만히 남자를 지켜보던 벨키오르는 봄이를 다시 고쳐 안고 은새와 별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봤다.
‘……괜찮겠지.’
뭔가 움직이려는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기묘하다고 해도 그저 인간이었다.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곧 벨키오르는 그자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
벨키오르가 발견한 남자, 천창현은 도천 그룹과 한국 헌터 협회가 주최한 헌터의 밤에 참석해 제 눈으로 직접 유은새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유은새가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거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이 시점이라면 몸 상태가 나빠질 대로 나빠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시점에 ‘은가시나무 던전’ 보스의 저주가 악화되어 죽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몸 상태가 나쁘긴커녕 좋아 보였다.
게다가 드래곤이라는 새로운 마수. 그리고…….
‘춘티엔더야오칭까지!’
천창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가 변했다. 손끝에서부터 서늘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그는 급히 연회 홀에서 벗어나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과거가 바뀌었다면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달라져야 했다. 세웠던 계획을 변경해야 할지도 몰랐다.
‘여러 가지로 틀어졌군.’
시간이 별로 없었다.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면 그가 이용할 장기 말들이 필요했다.
호텔을 빠져나온 그가 망설임 없이 향한 곳은 골드스타 길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