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왠지 느낌이 좋아
벨키오르의 요리는 마법 같았다. 그가 마법을 썼다는 게 아니라, 관용적인 표현으로.
벨키오르가 요리를 하는 동안, 솔과 백화점에 갔을 때 쇼핑한 장난감으로 별과 놀아 주던 은새는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식탁으로 왔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이걸 전부 만드셨어요?”
대단히 호화스러웠다.
샐러드도 그냥 대충 찢은 양상추 샐러드가 아닌 훈제 연어와 캐비어, 올리브 비네그레뜨를 올린 -어디서 난 거지?- 특수 채소 샐러드였고, 수프는 베이컨을 곁들인 완두콩 크림수프 -생크림과 완두콩이 대체 어디서…….- 였다.
메인은 바질 페스토 드레싱을 뿌린 생선 요리였는데 낯선 향신료 냄새가 났고, 감귤 향이 나는 양고기와 블루치즈 폴렌타는 -이하 동문- 비주얼부터 압도적이었다.
아티초크를 곁들인 양갈비구이도 -…….- 먹음직한 냄새를 풍겼다.
“앉아라.”
“저기, 벨키오르 님. 제가 준비한 재료도 쓰신 거죠?”
“잘 찾아보면 있다.”
거의 벨키오르의 주머니에서 나온 재료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은새는 실망하지 않았다.
무엇으로 만들든 맛만 있으면 장땡이지.
별이에게 유아용 숟가락을 쥐여 주고 먹는 걸 지켜보던 은새가 벨키오르의 재촉에 완두콩 수프를 떠먹었다.
“음! 수프 너무 맛있어요!”
벨키오르가 진위를 살피듯 은새를 빤히 쳐다봤다. 풍성한 향과 맛에 이미 정신을 빼앗긴 은새는 그 시선을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짭조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담백해요! 어떻게 제 입맛을 딱 맞추셨지?”
순식간에 수프 한 그릇이 뚝딱 비워졌다. 명백한 진실이었다. 벨키오르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마법으로 은새의 그릇에 수프를 더 떠 줬다.
은새는 사양하지 않았다.
“샐러드도 굉장히 조화로워요! 훈제 연어랑 치커리 궁합이 괜찮네요. 게다가 어린잎 채소가 올리브 향을 더 돋워 주는 느낌?”
“그런가?”
“양고기 육질 장난 아니네요. 잡내가 하나도 안 나요. 이 생선구이에 쓰신 향신료는 뭐예요? 특이한데 자꾸 손이 가네요.”
“생선도 알베바라는 저쪽 세계의 물고기다. 독을 품은 생선인데, 잘만 요리하면 육지 고기보다 맛이 좋지.”
“호오. 어쩐지. 생선 살이 쫀득쫀득해요.”
은새는 본디 먹을 때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벨키오르의 요리를 먹으면 수다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만찬을 먹어 본 은새였다. 그러나 이렇게 ‘맛있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틈틈이 별을 챙겨 주면서도 은새는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음식은 조용히 빠르게 동이 났다.
은새가 부른 배를 문지르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를 표했다.
“벨키오르 님, 정말 잘 먹었어요. 거실에 앉아 계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금빛의 마력이 식탁 위를 휩쓸었다.
“어…….”
방금 식기 세척기가 할 일을 잃었다. 은새는 깨끗해진 그릇이 날아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걸 망연하게 바라봤다.
“그…… 디저트라도 드실래요?”
“뭐가 먹고 싶지?”
“아뇨, 저 말고 벨키오르 님이요!”
“아기와 거실에 가 있어라. 알아서 챙겨 갈 테니.”
은새는 별을 품에 안은 채 주방에서 쫓겨났다. 이거 괜찮은 걸까……? 집주인인데 하는 게 없었다.
“뉴나? 왜 그래요?”
“아니야…… 별아, 벨키오르 님 원래 저렇게 가정적이시니?”
“가정적……? 그게 모예요?”
“음. 요리 잘하고, 다정다감하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부탁하는 일 다 들어주고……?”
말하다 보니 은새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워? 슬슬 에어컨을 켜야 할 듯싶었다.
별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나는 뉴나가 해 준 게 더 조아요! 마시써!”
“그래, 고마워. 우리 별이, 마음씨가 곱구나.”
은새가 별을 안고 카펫 위를 굴렀다. 그녀가 간지럼을 태우자 별이 몸을 비틀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건 뭐지?”
디저트와 음료를 가지고 거실로 오던 벨키오르가 탁자 위에 놓인 연분홍색 알을 발견했다. 은새가 벌떡 일어나 쟁반을 받아 들고 대답했다.
“아, 의뢰 완수하고 다른 나라에서 양도받은 마수 알이에요.”
“마수 알?”
“네. 그런데 이능을 부여해도 도통 반응이 없어요. 사실 빈 게 아닐지 의심하고 있어요.”
“그건 아닐 거다.”
“네?”
벨키오르가 연분홍색 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살아 있군. 아주 깊이 잠들어 있어.”
“그게 보여요? 와, 다행이네요!”
“다행?”
“방법만 찾으면 깨어날 수 있잖아요. 어떤 마수일까?”
은새가 흑요석 같은 눈을 빛냈다. 벨키오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알을 태어나게 하고 싶은가?”
“네! 얘도 계속 이 상태로 있기 답답할 테고, 이 세상이 어떤지 보여 주고 싶어요.”
은새에게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었다. 때로는 슬프고 괴로워도, 희망은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별과 벨키오르를 만난 것처럼.
“방법을 알려 주길 원하나?”
“그러면 너무 감사하죠! 혹시 방법이 엄청 어렵나요? 제 저주를 풀 때처럼?”
벨키오르가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 분목 옆에 가져다 둬라. 아마 이 알이 태어나는 데 적합한 환경이 따로 있을 터인데, 이미 자리를 벗어났으니 생명력이 가득한 곳에 두면 효험이 있겠지.”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이 알은 던전에서 가지고 나온 것일 테니 그곳을 벗어나자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벨키오르가 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성에서 가져온 보석, 하나를 다오.”
“……! 그, 그거 뉴나 주려고 가져온 건데!”
몰래 챙긴 것인데, 들켰다는 생각에 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응? 별아, 벨키오르 님 허락 없이 뭐 가져왔어?”
“성에 많아요! 뉴나한테 주면 좋을 거 가타서…….”
“그래도 아빠 물건에 손대면 안 되지.”
은새가 엄하게 일렀다. 그녀는 벨키오르에게 대신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관없다. ‘장미의 숨결’이면 된다.”
별이 어쩔 수 없이 로즈쿼츠 목걸이 하나를 내놓았다. 벨키오르는 체인에 달린 보석을 산산조각 내서 은새에게 내밀었다.
“알에 흡수시켜라.”
“어떻게요?”
“가져다 대면 된다.”
은새가 보석 가루를 담은 양손을 알에 가까이 가져갔다. 파앗, 하고 보석에 서린 힘이 연기처럼 알에 스며들었다.
잠시 후, 은새의 손에 남은 건 빛바랜 돌멩이뿐이었다. 오오. 은새가 감탄을 흘렸다.
두 사람이 하는 걸 불안하게 바라보던 별이 슬그머니 은새의 옷깃을 쥐었다.
“뉴, 뉴나. 나 말고 다른 아기가 필요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별아.”
“하지만…….”
별이 입을 삐쭉거리며 알을 째려보았다. 은새가 별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만약 이 알에서 마수가 태어난다면 별이의 친구가 될 거야.”
“친구……?”
“그래. 별이가 힘들 때 옆에서 힘이 되어 주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는 친구. 그런 존재가 있으면 외롭지 않겠지?”
“외로워…….”
별은 은새를 만나기 전, 둥지에서 홀로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마음이 허하고, 춥고, 배고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환경적으로 별은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곳에 있었으나 늘 무언가를 갈망했다. 그게 외롭다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별의 걱정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뉴나가 나보다 쟤를 더 조아하면…….”
“별아, 나는 너를 좋아해.”
은새가 별과 코끝을 맞댔다. 가볍게 문지르면서 은새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별은 은새만의 이 포근한 분위기가 좋았다. 별이 은새의 목을 끌어안았다.
“별아, 나는 누굴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지 않아. 모두가 소중한걸.”
“…….”
“만약 그런 느낌이 들 때는 주위를 한번 둘러봐. 별이가 혼자니?”
별은 은새의 어깨너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마수들과 눈이 마주쳤다. 황새가 날개를 펼치며 까악, 울었다. ‘여길 봐, 우리가 있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볼우물이 파이도록 별이 활짝 웃었다.
“아니! 친구들이 마나요!”
“그래. 다 별이 친구들이야.”
은새가 별의 등을 토닥토닥했다. 그녀의 눈길에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났다.
“새 친구가 태어나면 같이 축하해 주자.”
“네!”
벨키오르는 턱을 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오만한 드래곤을 몇 마디 말로 이해시키는 게 신기했다.
‘진심이 닿았기 때문인가.’
종족이 다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벨키오르에게 은새는 불가사의한 영역에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이 나쁘지 않았다. 외려 궁금해졌다. 그녀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벨키오르의 조언을 받은 은새는 연분홍색 알의 위치를 옮겼다. 세계수 분목 옆에 방석을 깔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알을 두었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이능을 부여했다. 세계수의 은은한 빛과 은새의 이능을 쬔 알은 겉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 두근두근 기분 좋은 박동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나가 보면 알이 옆으로 굴러서 방석을 벗어나 있기도 했다.
‘왠지 느낌이 좋아.’
은새는 새 마수와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쯤 지났을까.
“뉴나, 뉴나! 알이 움직여요!”
“정말? 어서 보러 가자!”
마수들과 세계수 근처에서 놀던 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은새는 하던 걸 내던지고 뒤뜰로 나갔다.
“우와.”
정말, 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은새가 별을 안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의 눈에 기대감이 반짝반짝했다.
“오늘 알을 깨고 나오려나?”
“어떻게 생겼을까요? 하늘이처럼 크게 크와앙 울까요? 황새처럼 장난을 많이 칠지도 몰라요. ……혹시 드래곤은 아니겠죠?”
“아닐걸. 만약 그랬으면 벨키오르 님이 말해 주셨을걸?”
별은 새 친구가 드래곤만은 아니길 바랐다. 물론 자신보다 귀엽고 아름다운 드래곤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동족은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알은 깨지지 않았다. 잠시 후, 알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은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에이, 아쉽다. 오늘은 새 친구가 얼굴을 안 보여 줄 모양인가 봐.”
“아쉬워…….”
별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하지만 기다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다들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날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찌나 움직임이 거센지 알이 데굴데굴 방석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뽀각.
알에 금이 갔다. 그 부분부터 쩌적 벌어지더니 툭, 껍질이 떨어졌다.
삐- 삐!
털의 일부가 구불구불한 깃털처럼 생긴 분홍색 마수가 앙증맞은 첫울음을 토해 냈다.
귀는 토끼처럼 길쭉했고 우제류의 굽이 네 발에 달려 있었다. 길고 풍성한 꼬리가 물결처럼 너울거렸다.
“태어났군.”
힘의 파동을 느낀 벨키오르가 가장 먼저 밖으로 나왔다. 곧 집 전체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여럿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삐?
그 이름처럼 봄을 불러오는 마수.
중국의 상징, 춘티엔더야오칭이 태어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