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34)화 (34/190)

33화 – 괜한 걱정을 했군

“한국에서만 발생한 건가? 아니면 다른 나라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나?”

우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리내가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아직 초기라 다들 쉬쉬하겠지. 던전 이슈에 개방적인 국가도 있지만 대개 국익과 관련되어 있다 보니 어느 정도 폐쇄적인 성향을 띠니까.”

“흠.”

“그래도 이번 던전 기후 이상 현상이 국제 협회에 보고되었으니까, 아마 경각심은 생기지 않았을까?”

은새가 뺨을 긁적이다가 사실대로 고했다.

“아, 그거…… 별이가 한 거야.”

“뭐야?! 그런 거였어? 어쩐지!”

솔이 호들갑을 떨었다. 친구들이 당황했다.

“어린데 힘이 그 정도야?”

“드래곤 무섭다. 이 세계에 드래곤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아니, 없는 거 맞지?”

“마법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강한 거였어? 스킬 획득 문제만 해결되면 마법사가 각광받는 직군이 되겠는데.”

감탄과 호기심 어린 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인찬이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그런 큰 힘을 쓰고도 별이는 괜찮아?”

“몸 아픈 데는 없고, 외려 힘이 안정된 것 같아. 던전 리셋 현상이 거의 잦아들었잖아.”

은새가 활짝 웃었다.

던전 리셋 현상은 일주일을 채 넘기지 않았다. 길드들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부상자도 처음에서 크게 늘지 않았다.

별은 은새를 따라 던전을 두 곳 더 돌고 도다리를 제외한 마수들과 함께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솔이 희한하다는 눈빛을 했다.

“그건 그렇고, 별이 때문에라도 진즉 귀가했을 애가 왜 여태 남아있어?”

“그건…….”

은새가 말을 망설였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은 친구들이 즉각 귀를 기울였다.

“뭔데. 말해 봐.”

“……아기 이름을 함부로 지어서 벨키오르 님이 화가 나셨으면 어쩌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S급들의 청력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솔이 어이없어했다. 그녀가 파리 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야, 빨리 가라. 지금 가도 한밤중이겠네.”

“나는 진지하다고.”

은새가 뾰로통해졌다. 그녀를 달래듯 우리가 다정다감한 어조로 말했다.

“일주일 동안 집에 한 번도 안 가진 않았을 거 아니야?”

“응……. 집에 있는 마수들이 걱정돼서.”

“그때 말이라도 해 보지 그랬어.”

“그러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은새의 머리를 우리가 토닥였다. 미리내도 그녀를 꼭 안아 줬다.

“탐탁지는 않지만 이번엔 솔이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니까, 얼른 돌아가서 제대로 얘기해 봐.”

“길짱, 그거 무슨 뜻이냐.”

솔의 투정은 무시당했다.

“그리고 뭣보다 그 사람이, 아니 존재가 너에게 화를 내는 건 상상이 안 가서.”

묘하게 씁쓸함이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미리내와 유하뿐이었다.

잠시 생각한 은새는 씩씩하게 일어났다.

“알았어. 나 이만 갈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순식간에 기운을 차리고 사무실을 쓩 나가는 은새를 친구들이 황당하게 쳐다봤다.

솔이 쯧쯧, 혀를 찼다.

“쟤 분명 별이 보고 싶어서 가는 거다.”

“동감.”

“김유하, 네가 웬일로 내 의견에 동의하냐?”

“어이구, 그래서 좋았쪄요? 그랬쪄요?”

“야, 훈련실로 따라 와.”

“따라 오라면 내가 못 갈 줄 알아?”

솔과 유하는 티격태격하며 훈련실로 뛰어갔다. 우리와 미리내의 눈치를 본 인찬도 쓱 자리를 피했다.

미리내가 친구들이 사용한 컵을 정리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한우리, 우는 거 아니지?”

“아니야.”

우리의 표정이 복잡미묘했다. 미리내가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럼 됐어. 은새한테 가족이 생기는 건데 왜 그래, 인마.”

“길드장한테 인마라니…….”

은새는 격변의 시대에 가족을 전부 잃었다. 그리고 줄곧 혼자 살았다.

그녀가 가장 슬플 때, 힘들 때 옆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은새가 지금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잘 알았다. 드래곤이라는 낯선 존재를 받아들일 만큼.

“이게 맞는 거겠지.”

“글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이럴 땐 빈말로라도 맞는 거라고 해 줘.”

“그런 다정한 위로를 원했어?”

“어휴, 네가 냉정의 아이콘 최미리내인 걸 내가 잠시 잊었다.”

“우리 길짱, 그랬구나아~ 말을 하지~”

“너 솔이 닮아 가?”

그들은 가벼운 농담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었다.

***

“…….”

당차게 길드 건물을 나온 것과 다르게 은새는 집 앞에서 못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현관문을 열었다.

빠르게 거실을 지나는데 어둠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자기 집 들어오는데 밤손님처럼 들어오는 거지?”

“……! 베, 벨키오르 님. 아직 안 주무셨어요?”

은새가 민망함에 헤헤, 웃었다. 그에게 들킬 줄은 알았지만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은새가 어둠을 더듬어 거실 불을 켰다. 벨키오르가 거실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아니 왜, 시험 성적표 나온 날 엄마처럼 앉아 있는 거지…….

은새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잘못한 게 있는 그녀는 다소곳이 그의 앞에 가 섰다.

“다친 곳은?”

“없어요. 저 튼튼하잖아요.”

진실을 가늠하는 것처럼 금색 눈이 은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외출했다 돌아올 때마다 그는 같은 질문을 했다.

은새는 그때마다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늦었지? 마수들은 일찌감치 보내고.”

“저, 그게…… 아! 길드에 보고할 게 있어서요.”

벨키오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뭘 숨기는 거지?”

“……저기 별이, 아니지, 아기한테 들으셨어요?”

“별이?”

그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신비로운 하늘색 장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린 은새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그게…….”

그녀는 죄인의 심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은새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벨키오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아기한테 ‘별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고?”

“네, 네…… 요점만 짚어내는 능력이 탁월하시네요.”

“은새.”

“옙.”

은새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벨키오르가 한숨을 쉬더니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앗.”

소파에 오금이 닿았다. 그의 옆자리였다.

얼마 전, 그의 무릎에 앉혀졌던 기억이 떠올라 은새는 부끄러워졌다.

‘설마 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은새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기가 마음에 들어 하던가?”

“네? 네……. 어, 기뻐 보이던데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은새는 어안이 벙벙했다.

은새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 벨키오르는 설명을 시작했다.

“드래곤의 이름은 ‘힘’을 갖는다. 그래서 함부로 짓지 않아.”

“죄송해요…….”

은새가 바로 기가 죽었다.

“하지만 돌아온 아기에게 해가 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대의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겠지.”

“소망이요……?”

“드래곤에게는 아명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서 단언하기 어렵지만 아기는 그 이름을 그대의 ‘선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리송한 말이었다. 은새는 문득 호기심이 샘솟았다.

“그럼 벨키오르 님은 그 이름 전에 뭐라고 불리셨어요?”

“불리지 않았다.”

언젠가 들어 본 말이었다. 아기를 뭐라고 부르냐고 했을 때 그는 분명 ‘부르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벨키오르 님의 부모님? 은 부르셨을 거 아니에요.”

“……아기?”

“아기…….”

은새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를 떨며 끅끅거리는 그녀를 벨키오르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한참 후 발개진 얼굴로 은새가 고개를 들었다.

“하아……. 드래곤의 이름은 굉장한 뜻이 담겨 있겠죠?”

“아무래도 그런 편이다. 근본과 맞닿아 있으니. 근데 왜 웃은 거지?”

“그럼 벨키오르 님의 이름은, 아 이런 거 물으면 안 되나요? 실례인가요?”

“내 질문은 무시하는 건가?”

은새가 딴청을 피웠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벨키오르가 선선히 넘어가 줬다.

그 스스로도 그녀에게 무르다는 자각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에게만.

“언젠가, 그대가 내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알 수 있겠지.”

“와…… 궁금해요. 별이도 드래곤일 때의 모습 되게 예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벨키오르 님은 얼마나 멋질까요?”

벨키오르는 조금 기분이 기묘해졌다. 자연계 최강의 포식자. 그 타이틀만으로 그는 만물을 떨게 했다.

그런데 눈앞의 여인은 그를 무서워하기는커녕 외려 눈을 반짝였다.

그에 더해 조금……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으나 ‘흡족’이라는 감정과 닮아 있었다.

벨키오르는 알 수 없는 착잡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게 늦게까지 밖에서 버티고 있던 이유라고?”

“네…….”

“괜한 걱정을 했군. 내가 그대에게 화를 낼 리가 없지 않나.”

‘그 존재가 너에게 화를 내는 건 상상이 안 가서.’

우리의 예측이 정확했다. 순간적으로 은새는 가슴이 찡해졌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용을 보여 준다는 게 이다지도 기쁜 일이었나. S급이라는 이유로 늘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도 상의드리지 않고 제멋대로 정한 건 죄송해요.”

“그대는 죄송할 것도 많군.”

벨키오르가 어딘가 위축되어 보이는 은새의 옆머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그녀가 아기에게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쓰다듬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은새는 한동안 그의 쓰다듬을 받았다.

머리가 그의 손이 있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것도 모른 채로.

“‘별’이라는 건 밤하늘에 뜬 천체를 말하는 건가?”

“네! 여기는 지대가 높아서 별이 제법 잘 보이는 편이거든요. 아기의 눈이 저를 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니까, 항상 별 같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벨키오르는 다채로운 빛을 품은 은새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건 은새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 같은데.

“언제 날 좋을 때 별구경 하실래요?”

“그대가 원한다면.”

“아기도 보면 좋아할 텐데! 하지만 자야 하니까 안 되겠죠?”

“하루쯤 안 잔다고 드래곤은 아무렇지도 않다.”

“또, 또 그런 소리 하신다! 아기는 잘 자야……”

은새의 말을 벨키오르가 가로챘다.

“잘 자야 무럭무럭 자란다고?”

“어, 네. 어떻게 딱 맞히셨네요?”

은새가 푸스스 웃었다.

벨키오르는 대수롭지 않게 속으로 답했다. 그야, 그대가 한 말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저,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말이죠.”

긴장이 풀린 은새가 아기와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털어놨다. 벨키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호응해 줬다.

거실에서 밤늦도록 두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