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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22)화 (22/190)

21화 – 이세계 첫 방문

호언장담했던 대로 산체스는 오래 걸리지 않아 벨키오르를 불렀다. 세계수를 돌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벨키오르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했다.

“제대로 한 것 맞나?”

“날 어떻게 보고! 나 비술의 드래곤이야! 됐으니 인간 여자나 데리고 와.”

“……꼭 그녀가 있어야 가능한가?”

벨키오르는 탐탁지 않았다. 산체스가 궁금해서 불러오라는 게 자명해 보였다.

“그런 말 할 시간에 얼른 데려오겠다. 아라크네의 저주가 시시각각으로 신체를 좀먹고 있을 텐데 가엾지도 않니?”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릴 하지.”

가탈을 부리면서도 벨키오르는 가엾지 않냐는 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기운으로 진행을 상당히 늦춘 것은 사실이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은새에게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간다.”

“저, 저. 반려 생기니까 싹퉁머리가 더 없어지는구만. 야! 고맙다고도 안 하냐!”

아니라고 말하기도 지쳐 그는 산체스의 말을 무시했다. 화산 지대를 벗어나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푸른빛이 감도는 나무 표면에 손을 얹고 벨키오르가 말했다.

“그 인간 여자를 이곳에 데려오려고 해.”

[어머, 벌써 소개해 주는 거니? 몸단장이라도 해야 할까.]

가지를 흔들며 세계수가 수선을 떨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진 벨키오르가 이마를 짚었다.

“……그냥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오는 거다. 뭣보다 그녀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래. 그토록 기다린 반려이니 신중해질 만도 하지.]

“부탁이니 그녀에게 그런 소린 하지 마.”

[얼른 다녀오렴. 오랜만에 아기도 보고 싶구나.]

세계수가 후후 웃었다. 벨키오르는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은새가 있는 세계로 이동했다.

벨키오르는 은새의 집 뒤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기척을 느낀 마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다가와서 머리를 비비는 거대한 털뭉치의 머리를 대강 쓰다듬어 주고 벨키오르는 걸음을 옮겼다.

집 안에서 은새와 아기의 기척이 느껴졌다. 암막 커튼을 친 어두운 방 안. 은새와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평온했다. 날카로웠던 신경이 느슨해졌다.

벨키오르는 침대 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세계수와 산체스의 주접을 들어서 그런지 정말 은새가 그의 반려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도 은새에게 하는 행동이 그답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인간 여자에게 자식을 맡기고, 저주에 걸렸다고 세계수 열매를 가져다준 일.

동족에게 저주의 파훼 방법을 묻고 재료까지 직접 나서서 구해 온 일.

이게 단순히 ‘어쩌다 알게 된 인간 여자에게 베풀 수 있는 호의’ 정도에 그칠까?

벨키오르는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 산 세월이 길기 때문에 순순히 인정하기 어려웠다.

인정하면 뭐가 달라질까? 그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몬스터 테이밍 특성을 가지고 있다더니 영향을 받는 걸지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드래곤을 테이밍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음…… 오셨어요?”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은새가 부스스 일어났다. 그를 반기는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생각이 무색하게 벨키오르는 흐트러진 은새의 머리를 손수 정리해 줬다.

은새가 어색하게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저 배시시 웃을 따름이었다.

“시킨 대로 잘하고 있었군.”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 벨키오르는 마력을 퍼트려 은새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낯선 기운이 파고들자 은새는 움찔했다. 그 작은 떨림에 벨키오르가 작은 동물을 달래듯 쉬이, 하고 낮은 소리를 냈다.

은새는 벨키오르의 손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따뜻한 감각이 퍼져 가는 게 기분 좋았다.

“그대의 친우가 나와 거래를 했다.”

“…….”

“동족에게 물어 그대의 저주를 파훼할 방법을 찾았고, 준비를 끝마쳤다. 함께 나의 세계로 가겠나?”

“벨키오르 님의 세계요?”

은새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제가 갈 수 있나요?”

“원래라면 불가능하지. 하지만 이곳에는 세계수가 있고 위그드라실이 허락했으니 편법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와……. 신기하네요. 좋아요, 갈래요.”

은새가 선뜻 대답했다. 벨키오르는 그게 또 못마땅했다.

“그대는 너무 쉽게 대답하는군.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없나?”

“던전에 들어가면 매번 다른 세계에 던져지는데요, 뭐. 헌터들에게는 일상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뺨을 감싼 벨키오르의 손을 은새가 꼭 잡았다.

“고맙습니다.”

“…….”

“감사해요, 벨키오르 님. 은혜는 꼭 갚을게요.”

“됐다. 채비하거라.”

벨키오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은새가 따라 일어났다.

“뭘 챙기면 될까요?”

“요란하게 챙길 것 없어. 볼일만 보고 돌아올 것이니.”

“아기도 데려갈 거죠? 그럼 아기 용품을…….”

“그대는 또 그대보다 아기를 먼저 챙기는군. 됐다. 내가 돌보지.”

은새는 뿌듯해졌다. 벨키오르가 제법 아빠 같은 말을 했다.

처음 봤을 때의 그와 비교하면 확실히 달랐다.

잠에서 깨 칭얼거리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 옷을 입혔다. 바구니에 아기 옷과 장난감, 이유식, 물티슈와 뜨거운 물 등을 챙겼다.

벨키오르가 할 말 많은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수들은…….”

“괜찮으니 두고 가.”

은새의 눈썹이 처졌다. 자신이 없을 때의 마수들이 걱정됐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단체 메시지방을 열었다.

[유은새: 나 벨키오르 님이랑 잠깐 멀리 다녀올게.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우리 집 와서 마수들 좀 돌봐 줄 수 있어? 중국 출장 때 데려가도 돼.]

[한우리: 멀리 어디 가는데?]

[유은새: 벨키오르 님이랑 아기가 원래 살던 세계.]

[김유하: 뭐??????]

[남궁솔: 유은새가 또! 유또! 얌전한 고양이가 뚝배기를 깬다더니!]

[유은새: 뭔 소리야... 저주를 없애려면 그쪽으로 가야 한대. 백합이만 내가 데려갈게.]

단체 메시지방이 난리가 났다. 하지만 은새는 쿨하게 핸드폰을 종료했다.

“백합이만 제가 데려가고 싶어요.”

“그러도록.”

은새가 이쪽 눈치를 보던 보석뱀 백합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쉭쉭 소리를 내며 백합이가 엉겨 왔다.

백합이를 목에 걸고 은새가 마수들을 하나하나 끌어안았다. 잠깐의 헤어짐이었지만 은새에게는 애틋했다.

“얘들아, 나 없는 동안 밥 잘 먹고, 잘 자고, 길드원들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알았지?”

꾸꾸!

크르릉.

까악. 깍.

캉캉.

은새는 마지막까지 미련을 못 버리는 눈으로 마수들을 돌아봤다. 아기를 품에 안은 벨키오르가 은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다가 도중에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그대는 안전하게 이곳으로 되돌아올 거야.”

“네. 잘 부탁드려요.”

은새는 벨키오르의 손을 꼭 잡았다.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들을 휘감았다.

***

은새는 축축한 흙냄새에 눈을 떴다.

“음…… 어?”

은새는 웬 커다란 나무 아래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가야? 벨키오르 님?”

주변은 적막하니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당황하려는 찰나 은새는 처음 보는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와.”

그녀가 누워 있던 나무는 성인 다섯 명이 끌어안아도 다 끌어안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푸른빛이 도는 몸체, 은은하게 흩뿌려지는 빛.

뿜어지는 광대한 기운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정순하고, 신비로웠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눈이 번쩍 뜨일 장관이었다. 풀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본목을 보니 뒤뜰에 자라는 세계수는 미니미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녕.]

“으학! 말했어!”

은새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재차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벨키오르에게 얘기 들었단다. 아기를 돌봐 주고 있다고?]

“세계수? 정말 세계수 님이에요?”

세계수에 다가서는 은새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계의 신목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몸체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네. 부족하지만 제가 아기를 돌보고 있어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후후…… 벨키오르의 아들을 아껴 줘서 고맙구나. 이름이 어떻게 되니?]

“유은새라고 해요. ‘유’가 성이고 ‘은새’가 이름이에요.”

은새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기랑 벨키오르 님은 어디 갔나요?”

[근처를 돌아보러 갔단다. 곧 올 거야.]

은새는 세계수에 등을 기댔다. 주변 경관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풍부한 햇살이 대지를 은근하게 달구었고 길게 자란 풀과 야생화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저 멀리 이끼로 뒤덮인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양 떼 같은 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유영했다.

들이마시는 숨에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숨죽인 동물 발소리, 날갯짓하며 지저귀는 새…….

눈과 귀가 맑아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은새는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래. 벨키오르가 지키고 가꾸는 땅이지.]

세계수의 목소리에 은은한 자부심이 서렸다. 은새는 그 점이 신기했다.

“깨어났나.”

“흐앙, 흐아앙, 맘마, 하무…….”

벨키오르에게 불퉁하게 안겨 있던 아기가 깨어난 은새를 보고 보채며 손을 뻗어 왔다.

은새는 자연스럽게 아기를 받아 안아 둥개둥개 했다. 아기가 은새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폭 기대 왔다.

“나날이 응석이 늘어나는군. 다 받아 주지 마.”

“아기잖아요. 이때 응석을 안 부리면 언제 부려요.”

은새가 손수건으로 아기의 눈물과 콧물, 침을 닦아 줬다. 아기의 손에 잡혀 있던 백합이가 은근슬쩍 은새에게 건너왔다.

은새는 고생했다는 의미로 백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세계수가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신기하구나.]

벨키오르는 세계수를 힐끔 보고 은새에게 말했다.

“이동하지.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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