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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21)화 (21/190)

20화 – 데려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암석을 때리는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자갈이 가득한 길을 벨키오르와 듀가 나란히 걸었다.

멀리서 바람을 타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긁는 불길하고 음울한 소음.

[다 왔네요.]

가까이 갈수록 울음소리가 커졌다. 귀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벨키오르는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암벽 사이에 거대한 꽃밭이 자리해 있었다. 싸아아. 불어온 바람에 보라색 꽃잎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확실하군.”

‘우는 꽃’으로 더 잘 알려진 판도라꽃이었다. 그 특징 때문에 인간은 물론 마물마저 피한다는 식물.

[어떻게 할까요?]

“뒤엎어.”

켜켜이 쌓이는 소음에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차였다. 듀가 신이 나서 꽃밭으로 달려갔다.

듀의 발구름 한 번에 땅이 뒤집어졌다. 뿌리가 뽑힌 판도라꽃이 비명을 내질렀다.

듀는 한동안 꽃밭을 헤집고 다녔다. 애달픈 울음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마침내 일대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황폐해진 땅을 바라보며 벨키오르가 중얼거렸다.

“이쪽은 준비가 끝났군.”

***

“김유하, 이쪽!”

빛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쏘아졌다. 무당강시거미의 머리가 팍, 하고 뇌수를 터트렸다.

“으, 이 짓도 자꾸 하니까 적응된다.”

얼굴에 묻은 점액질을 닦으며 우리가 말했다.

“이걸로 390마리째인가?”

“소름이다. 그걸 다 세고 있냐.”

“틀렸어. 391마리째야.”

“미리내 너까지…….”

유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마수의 사체에 다가갔다. 단검을 꺼내 배를 쩌억 갈랐다.

“오, 빙고.”

“있어? 있어?”

“있다. 운이 좋았어.”

산란기가 아닌 마수의 알을 구하는 건 천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단순 노동과 집요함으로 승부했지만.

우리가 몸을 일으켰다.

“이만 나가자. 더 있다간 수상한 짓 한다고 체포당하겠다.”

“이미 늦은 거 같은데.”

싱가포르 현지인 헌터들이 해괴한 것을 보는 눈길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른 척, 던전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돌아가 깨끗이 씻고 다시 모였다. 우리가 솔에게 전화했다.

착신음이 흐르고 곧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솔. 원혼 얼마나 모았어?”

-35개. 완전 열심히 했다고. 이제 필리핀에 거미 나오는 던전은 없어. 궤멸이야. 너희는?

“26개.”

-아싸, 이겼다! 그럼 우리 한국에서 모은 것까지 100개 넘지 않았어?

“어. 무당강시 알도 충분히 모았으니 귀국해.”

-OK. 한국에서 봐.

우리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그는 고양된 시선으로 미리내, 유하를 보았다.

“준비가 끝났어. 이제 돌아간다.”

***

은새는 에이패드 화면을 뚫어져라 봤다. 화면 너머에서 안경을 쓴 여자 선생님이 바느질 강좌를 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은새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보면 쉬운데 왜 내가 하면 이 모양이지…….”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낸 망작들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곰인지 돼지인지 모를 솜인형들은 전쟁터를 구른 병사처럼 이리저리 터져 솜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기에게 애착 인형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인터넷 강좌를 신청한 지 일주일.

처음엔 야심차게 시작했다. 친구들은 다 외국으로 나갔고 벨키오르는 며칠째 오지 않아 은새는 대단히 한가했다.

아기와 함께 카펫 위를 뒹굴고 있는데 때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그래! 아기한테 직접 애착 인형을 만들어 주는 거야!’

은새는 아기한테 뭘 해 줄 생각에 기대에 부풀었다. 학생 때 바느질 수업 같은 것도 배웠으니 기본적인 건 할 수 있을 터였다.

은새는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신감이 박살이 난 건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 이게 왜 꼬였지?’

실이 엉키는 건 기본, 분명 배운 대로 따라 했는데 어딘가 야무지지 못하고 허술했다.

은새는 처음 만들어 봤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다음 날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해도 결과물은 마찬가지였다.

상처투성이 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무룩해진 은새는 배밀이를 하는 아기 손에 그나마 곰돌이처럼 보이는 인형을 쥐여 주었다.

“아기야, 미안해. 누나가 나중에 좋은 걸로 사 줄게…….”

“브아! 앙, 아앙. 흐흥.”

“좋아해 주는 거야? 역시 우리 아기밖에 없어!”

은새는 아기의 말랑말랑한 볼을 쭈압쭈압 했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내 아들을 잡아먹으려는 건가?”

갑작스럽게 들린 음성에 은새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버님! 왜 이제 오세요. 아기가 아버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다고요.”

“그 애가?”

벨키오르가 불신에 찬 눈빛을 보냈다. 며칠 만에 봤어도 아기는 벨키오르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여전히 은새만 보고 좋아 죽겠다는 듯 방싯거렸다. 벨키오르가 아기 손에 들린 희한한 솜뭉치를 발견했다.

“그 괴상한 것은 뭐지?”

“아…… 제가 만든 곰돌이 인형이에요. 보실래요?”

은새가 머뭇머뭇 실패작들을 내놓았다. 벨키오르가 간단하게 평가했다.

“그대는…… 손재주가 없군.”

“이상하다. 옛날에는 잘했는데.”

“그 옛날이라는 게 언제지?”

“한 10년 전쯤이요?”

드래곤에게는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세월이었지만 인간에게는 아니었다. 10년이나 지났는데 이 모양이라면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벨키오르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더욱 정진하도록.”

“네! 뜨개질도 배우려고요. 아기 양말이나 모자 떠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은새가 의욕적으로 뜨개질 강좌를 찾아봤다. 벨키오르는 기계적으로 딸랑이를 흔들며 아기의 주의를 끌었다.

아기와 마수들의 밥을 챙겨 주고 저녁 식사를 하려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은새가 반갑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리내야! 잘 지내고 있어? 싱가포르는 어때?”

-은새야, 집이야?

“응. 이제 밥 먹으려고.”

-그 드래곤은? 있어?

“네가 먼저 아버님에 대해 묻다니. 별일이네. 응, 며칠 안 계셨는데 오늘 돌아오셨어.”

-그러면 이따 밤에 들를게. 우리 지금 서울이야.

“어? 진짜?”

은새는 뛸 듯이 기뻐했다. 통화를 끊고 벨키오르에게 조르르 가 재잘거렸다.

“아버님, 몇 시간 후에 친구들이 온대요.”

“그쪽도 준비가 끝났나 보군.”

“준비요?”

은새가 눈을 깜박였다. 벨키오르는 말간 은새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봤다.

“그대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도록.”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궁금했지만 은새는 속으로 삼켰다.

약 한 달 만에 보는 친구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생각에 은새는 들떴다.

“유은새! 살아 있냐!”

마당에서부터 솔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아기를 재우고 기다리고 있던 은새는 한달음에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얘들아, 다들 안 다쳤어? 갑자기 다 같이 웬 출장이야.”

“물론 안 다쳤지. 자, 여기 선물. 면세점에서 신상이란 신상은 다 털어 왔어.”

온갖 브랜드의 쇼핑백이 현관에서 거실까지 착착 쌓였다. 은새는 기뻐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다.

“돈 많이 썼겠다.”

“개처럼 벌어서 이런 데 써야지.”

유하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들은 잠깐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바빴던 거야? 곧 중국도 가야 하잖아.”

“은새야.”

미리내가 은새의 손을 꼭 잡았다. 친구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뭔가 벅차오른 것 같으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은새는 어리둥절했다.

“네 저주를 풀 수 있을 것 같아.”

“뭐……? 어떻게?”

“드래곤 님이 도와주실 거야.”

모두의 시선이 창가에 팔짱을 끼고 선 벨키오르에게 향했다. 벨키오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말한 것은?”

“준비됐습니다.”

우리가 아공간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벨키오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눈길로 그들을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친구들도 덩달아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벨키오르가 세계수가 있는 뒤뜰로 나갔다. 황급히 은새가 그의 뒤를 따랐다.

“아버님!”

“벨키오르.”

“네?”

“벨키오르라고 불러라. 이름을 알려 준 게 언제인데 언제까지 아버님 타령을 할 거지?”

“아…….”

평온한 금색 눈과 마주친 은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은새가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벨키오르 님, 친구들의 말이 사실인가요? 제 저주를…… 풀 방법이 있어요?”

벨키오르는 처음으로 은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설핏 웃음기가 어렸다. 은새는 눈을 의심했다.

“그대는 평소처럼 아기와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돼.”

“…….”

“금방 돌아오겠다.”

은새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친구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그녀는 은은한 빛이 나는 세계수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

풀썩.

산체스의 발치로 아공간 주머니 2개가 떨어졌다. 놀란 그녀를 보며 벨키오르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말했던 것을 가져왔다.”

“뭐야. 진짜 다 구해 온 거야?”

산체스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타란튤라의 원혼 109개, 무당강시거미의 알 무수히 많이, 크로노스의 힘줄, 판도라꽃, 세계수의 뿌리…….

“세계수 뿌리는 캐 온 거야? 위그드라실이 허락해 주든?”

“그래.”

“너 정말 그 인간 여자 살리고 싶구나.”

“말이 많군.”

벨키오르가 차갑게 일축했다. 그래 봐야 무섭지 않았다. 산체스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 알겠어. 고생해서 재료까지 가져오셨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얼마나 걸리지?”

“얼마 안 걸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네?”

“뭐.”

산체스의 눈매가 여우처럼 샐쭉 가늘어졌다.

“그 인간 여자, 내가 만날 수 있어?”

“안 된다.”

즉답이었다. 벨키오르는 불쾌한 티를 풀풀 풍겼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산체스가 다리를 꼬았다. 여유로운 태도였다.

“아라크네의 저주를 파훼하려면 시전자와 당사자가 같이 있어야 해. 반려가 될 여자잖아? 미리 소개해 주면 어때.”

“그런 거 아니다.”

“아니야? 그럼 더 잘됐네. 데려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벨키오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산체스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아, 정말 재미있네. 벨키오르의 동요가 그녀에게까지 느껴졌다.

“……생각해 보지.”

“그래. 아, 하나 빠뜨렸네.”

산체스의 손짓에 날카로운 단검이 벨키오르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뭐 하는 거지?”

“드래곤의 피. 마지막 재료거든.”

산체스가 피가 묻은 단검을 혀로 핥았다. 벨키오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기다려. 완성되면 부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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