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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9)화 (19/190)

18화 – 아들이 효도했네?

은새는 미묘한 우리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중에 너도 와서 봐 봐. 파란빛이 도는 나무가 아주 예뻐.”

-알겠어. 은새야,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거나 하면 꼭 말해야 해. 알았지?

“그-으럼. 너무 걱정하지 마.”

은새는 일순 며칠 전에 쓰러졌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나중에 상태가 더 나빠지면 그때 말하지, 뭐. 요새는 컨디션도 좋으니까.’

우리는 통화를 끊기 직전까지 당부의 말을 거듭했다.

***

벨키오르는 화산 지대로 다시 산체스를 만나러 갔다. 이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산체스는 잠에 취해 있었다.

느릿느릿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보고 벨키오르가 질색했다.

“게을러터졌군.”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아직 창창한가 보지, 뭐. 부럽니?”

산체스가 얄밉게 미소 지었다.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멀끔한 차림새가 되었다.

산체스는 벨키오르에게 차를 대접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가 질문했다.

“알아봤나?”

“알아보긴 했는데, 너 솔직히 말해 봐. 왜 그걸 알고 싶은 거야?”

산체스는 쉽게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생전 세계수 곁을 벗어나는 법이 없는 벨키오르가 직접 그녀의 레어를 방문했다.

게다가 뜬금없이 마물의 저주에 관해 물었다. 드래곤인 그가 마물에게 당했을 리는 없고 분명 다른 이가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건 내가 판단해. 아아~ 비밀 많은 벨키오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말 안 해 줄 거예용.”

“…….”

“뭘 봐용? 눈 깔아용.”

벨키오르가 죽일 듯이 산체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벨키오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동족에 대한 애정과 관심?”

“몹쓸 호기심이겠지.”

“부정하지 않겠어. 그래서 누구야? 여자야? 예뻐?”

벨키오르가 자조를 섞어 중얼거렸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아케이아 말이 맞는지 궁금하니까 빨리 말해. 여자지? 너 여자 생겼지?”

“아니다.”

벨키오르는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가늠했다. 질질 끌어 봐야 밑천만 털릴 것이므로 그는 간결하게 말했다.

“내 아들을 돌봐 주고 있는 인간 여자가 저주에 걸렸어. 원념이 담긴 저주더군. 그래서…….”

“뭐어, 인간 여자?!”

산체스가 펄쩍 뛰었다.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녀의 말이 빨라졌다.

“어쩌다가 인간 여자랑 엮인 거야? 위그드라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인간이 있을 리 없고. 아니, 아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왜 인간 여자가 해츨링을 돌보고 있어?”

“…….”

“말 안 해 주면 얄짤 없어.”

벨키오르는 머리가 아팠다. 이대로 뒤돌아서 레어를 나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그가 돌아가면 이번엔 궁금증에 몸이 단 산체스가 쫓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곳에 온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벨키오르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도 의외인데. 어떻게 만난 거야?”

“내 아들이 둥지를 벗어났어. 아들의 흔적을 따라가니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산체스의 표정이 음흉해졌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벨키오르를 쿡쿡 찔렀다.

“이야~ 아들이 효도했네? 아빠가 노총각으로 늙어 죽게 생겼으니 대신 나섰나 보다. 야, 잘됐다!”

“그런 거 아니라고.”

벨키오르가 콧잔등을 꾹꾹 눌렀다. 어떻게 말해도 산체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더 말꼬리를 잡기 전에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그래서 해주 방법은?”

“확인해 봤더니 골 때리겠던데? 그 여자 살릴 거야?”

“……일단은.”

“천하의 벨키오르가 인간 여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동족들한테 당장 알려야지.”

“까불지 말고.”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산체스의 뒷덜미를 벨키오르가 붙잡았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난 뒤 하루도 안 돼서 모든 동족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는 데 그의 왼쪽 뿔을 걸 수 있었다.

나태하고 권태로운 드래곤들이 이럴 때만 재빠르다. 산체스가 구미가 당긴다는 듯 손바닥을 비볐다.

“다른 건 됐고 몇 가지만 구해 와라.”

“말해.”

“타란튤라의 원혼 넉넉하게 100개.”

“……마물을 말하는 건가? 원혼이라니 대체.”

벨키오르가 당황했다. 그러나 산체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무당강시거미의 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크로노스의 힘줄. 판도라꽃. 이건 즙이 필요하니까 꽃밭을 통째로 들고 와, 그냥.”

“…….”

“마지막으로 세계수의 뿌리. 그나마 세계수와 관련된 건 너라면 쉽게 구할 수 있겠다. 어때? 할래?”

산체스의 표정에 짓궂은 기색이 어렸다. 벨키오르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장난하는 거 아니겠지?”

“설마. 너 삐치면 한참 가는 거 아는데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어?”

산체스가 방실방실 웃었다. 못 미더웠다.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벨키오르는 산체스가 말한 목록을 되짚어 봤다. 하나같이 구하기 까다로운 것들이었다. 어려운 게 아니라 까다로운 것.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군.”

“오랜만에 운동 좀 하겠네, 벨키오르.”

산체스가 키득거렸다.

타란튤라의 원혼은 확률적으로 얻을 수 있는 영혼석이었다. 마물을 100마리 죽인다고 100개가 나오는 게 아니었다.

무당강시거미의 알도 현재 산란기가 아니라 찾기 어려울 터였다. 크로노스는 해저에 사는 마물로 거기까지 가기 위해 오랜만에 본 모습을 해야 할 듯싶었다.

판도라꽃은 시끄럽게 우는 꽃으로 유명했다. 그러니 일반적인 곳에선 찾을 수 없었다. 험지나 습지, 황무지 등을 뒤져 봐야 했다.

벨키오르는 마음이 급해졌다.

“간다.”

“야! 그냥 가게? 그 인간 여자에 대해서 좀 더 말해 주지!”

“그런 거 아니라고.”

툴툴거리는 산체스를 뒤로하고 벨키오르는 걸음을 빨리했다.

***

“손이 잘 안 닿네…….”

은새는 주방 천장에서 냄비를 꺼내려 발꿈치를 들었다. 하지만 잘 쓰지 않는 물건이라서 그런지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앗!”

은새가 휘청거렸다. 그때 뒤에서 뻗어 온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크고 넉넉한 품에 안긴 은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었다.

“아버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이걸 꺼내려는 건가?”

벨키오르는 무뚝뚝하게 그녀가 집으려던 걸 대신 꺼내 줬다.

“고맙습니다. 앉아 계세요.”

“음.”

벨키오르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은새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구경했다. 은새는 마수들에게 줄 고기를 각종 약재를 넣고 삶았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으니 특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잘 익은 고기를 식게 내버려 두고 은새는 건조기에서 옷을 꺼냈다.

“이걸 개려고?”

“네? 네.”

벨키오르가 무심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마법이 발동해 아기 옷을 착착 정리했다.

은새가 개는 것보다 더 깔끔했다.

“어라…… 가, 감사해요?”

“별거 아니다.”

아리송해진 얼굴로 벨키오르를 쳐다보던 은새가 이번엔 청소기를 들었다. 하지만 돌릴 새가 없었다.

벨키오르의 마법이 온 집 안을 휘저었다.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깨끗해진 집을 은새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

“됐으니 그대는 식사나 챙겨라.”

벨키오르가 혀를 찼다. 꼴을 보아하니 아기와 마수들의 밥은 챙기면서 본인 식사는 걸렀을 게 뻔했다.

벨키오르의 성화에 못 이겨 은새는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밥솥에서 밥을 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벨키오르가 평소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막 한 숟갈을 뜨려고 했을 때였다.

“쯧.”

벨키오르가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은새가 차려놓은 식탁을 힐끗 본 그는 탄식했다.

“그걸로 충분한 영양 섭취가 되겠나?”

“저 보기보다 튼튼해서 괜찮아요.”

벨키오르가 은새의 숟가락을 빼앗았다.

“기다려.”

“네?”

그는 거침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은새가 뭘 하려고 그러나 하고 그를 따라갔다.

벨키오르는 허공에서 고기와 채소 같은 것을 소환해 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을 씻는다.

은새가 멍한 눈길을 보냈다.

“그게 뭐예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정신 사나우니 저리 가 있어라.”

“조용히 할 테니까 옆에서 구경해도 돼요?”

그가 뭘 하려는지 짐작한 은새의 낯빛이 환해졌다. 벨키오르는 주위를 얼쩡거리는 그녀를 굳이 쫓아내지 않았다.

그간 은새가 하는 걸 주의 깊게 관찰한 그는 손쉽게 가스레인지의 불을 켰다. 하지만 화력은 마법으로 조절했다.

의외로 벨키오르는 칼질에 능숙했다. 그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빠르게 손질했다.

마른 천으로 핏물을 제거하고 고기의 비계를 잘라 냈다. 부위별로 토막 내 한쪽은 양념에 재고 다른 쪽은 생고기인 채로 놔두었다.

그는 손질한 고기를 프라이팬에 쓸어 넣었다. 여러 가지 조미료를 뿌려 간을 했다. 양념한 고기는 냉장고에 넣어 둘 테니 나중에 익혀 먹으라고 은새에게 당부했다.

뭐든지 순식간이었다. 불필요한 동작이 하나도 없었다.

“우와…….”

은새는 감탄했다. 뚝딱 한 상을 차려 낸 벨키오르가 은새를 식탁으로 데려가 앉혔다.

“간단한 거지만 먹어라.”

“요리하실 줄 알았어요?”

“오래 살면 웬만한 건 다 할 줄 알게 돼.”

은새는 노릇노릇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에 가져갔다. 향신료라든가 재료가 전부 이계의 것이었지만 솔솔 풍겨 오는 맛있는 냄새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설마 벨키오르가 못 먹을 걸 줬겠냐는 심정이었다.

“음! 맛있어요. 무슨 고기예요?”

“외뿔숫노루. 중부 대륙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동물이다.”

“그렇구나. 아버님 덕분에 포식하네요.”

마수가 아니니 다행이네. 은새는 볼이 빵빵해지도록 고기를 입에 밀어 넣었다.

짭조름한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고기의 육질도 괜찮았고.

입이 짧은 은새가 접시를 비울 정도니 말 다 했다.

“전에 왔었던 그대의 친우를 만났으면 하는데.”

“누구요. 우리요?”

“맞을 거다.”

은새는 의아해하면서도 옆에 놔둔 핸드폰을 즉시 집어 들었다.

“알겠어요. 오라고 연락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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