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도천 길드에서 맡아 줬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마수들이 걸림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걸 누가 몰라? 도대체, 머릿수가 몇 명인데 사진 한 방, 녹음 하나를 못 따느냔 말이야. 유은새한테 직접 수를 못 쓰면 도천 길드원들한테 뭐라도 캐내야지!”
백찬민이 다리를 가만두지 못하고 달달 떨었다. 그의 관자놀이가 씰룩였다.
“이토록 숨기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어. 길드원 중에 은신 능력이 뛰어나고 발 빠른 사람 있나?”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길드 분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려 섞인 육재희의 말을 백찬민이 딱 잘랐다.
“그러니까 어설픈 애 말고 길드에 대한 충성심도 높은 놈으로!”
“……임이석 헌터가 그쪽 방면으로 뛰어납니다.”
육재희는 약이 잔뜩 오른 백찬민을 말릴 수 없었다. 백찬민의 입가에 준열한 미소가 피어났다.
“보내. 어떤 방법을 써도 좋으니 실망시키지 말라고 해.”
“네.”
은단으로는 부족했는지 백찬민이 막대 사탕을 까서 입에 물었다. 아직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마석 판매자는 못 잡았나?”
“……죄송합니다. 대신 헌협에 요청해 공급 물량을 조절하기로 했습니다.”
백찬민이 인상을 찡그렸다. 돈을 그렇게 많이 처먹었으면서 느리적느리적 대응하는 헌터 협회가 못마땅했다.
마켓에 갑자기 풀린 대량의 마석으로 골드스타 길드는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판매자는 대단히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백찬민은 그 판매자의 얼굴을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어떤 놈이 자신의 계획을 망쳤는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다. 그가 책상 위를 굴러다니던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마석의 출처는. 그 많은 마석이 하늘에서 떨어지진 않았을 거 아니야.”
“알아본 바로는, 극비입니다만 협회에서 비밀리에 관리 중이던 던전 몇 개를 누군가 공략했다고 합니다.”
“뭐?”
백찬민의 손에서 라이터가 떨어졌다. 그가 천천히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웠다.
“하, 그놈들.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어조가 싸늘했다.
던전은 돈이 된다. 그래서 던전이 발생하면 길드 간에 입찰 전쟁이 벌어진다.
하지만 협회에서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던전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건 협회장이나 고위 간부들의 비자금이 되어 줬을 것이다.
그런데 신원 미상의 인물이 홀연히 나타나 던전을 공략해 버렸다.
“큭. 하하핫! 헌협 놈들 속이 쓰리겠구만.”
“아마 마켓에 풀린 마석들은 거기서 나온 것 같습니다.”
백찬민이 턱을 매만졌다. 처음 일이 터졌을 때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의미로.
“그자를 꼭 만나 보고 싶군.”
호기심이 생겼다. 백찬민의 미소가 짙어졌다.
***
아기를 안고 뒤뜰로 나온 은새는 놀라움에 입을 벙긋거렸다. 먼저 나와서 세계수에 마력을 풀고 있던 벨키오르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며칠 안 지났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어요?”
은새는 발걸음 가볍게 벨키오르에게 다가갔다. 쭈글쭈글한 씨앗에 불과했던 세계수는 어느새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 벌써 은새의 허리까지 왔다.
연한 푸른빛이 나무에 감돌았다. 은새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음. 수분과 마력만 충분히 공급되면 되니까.”
“아기야, 이거 봐라. 세계수야. 아기네 원래 세계에 있는 거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게 기특하지?”
“먀! 브아, 바. 까르륵.”
아기는 금가루처럼 떨어지는 벨키오르의 마력을 보며 손을 잼잼 했다. 순간 아기의 손바닥에서 기이한 힘이 머무는 걸 은새는 보지 못했다.
“아버님, 아기가 세계수 근처에 자주 나와 있는 게 좋겠죠?”
“……그대도 같이 와서 기운을 쐬거라.”
“저요? 네, 알겠어요.”
은새와 아기는 벨키오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세계수가 마력을 빨아들이는 모습은 봐도 봐도 신기했다.
할 일을 끝낸 벨키오르는 은새와 아기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기 좀 잠시 부탁해요. 이유식 만들어 올게요.”
아기를 거실 카펫 위에 눕히고 은새가 주방으로 갔다. 은새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아기가 벌러덩 뒤집기를 했다.
“앙. 마, 마.”
아기가 배밀이를 했다. 벨키오르는 그런 아기를 빤히 쳐다보다가 오뚝이를 그 앞에 놓았다.
은새가 전에 그렇게 하는 걸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기는 좌우로 흔들리는 귀여운 오리 모양의 오뚝이를 보고 시선을 빼앗겼다.
“웅! 하무하무…….”
아기가 오뚝이를 잡기 위해 있는 힘껏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아기는 성질이 났다. 울음이 차올랐다.
막 우는 소리를 내려는 찰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귀여워, 우리 아가!”
이유식을 들고 오던 은새가 핸드폰을 가져와 배밀이를 하는 아기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은새의 열렬한 반응에 아기는 눈물이 쏘옥 들어갔다. 은새만 있으면 아기는 울다가도 웃었고 보채다가도 곤히 잠들었다.
“꺄, 맘, 맘마-”
“아가 지금 맘마라고 한 거야? 어쩜, 똑똑하기도 하지!”
가만 지켜보던 벨키오르가 질문했다.
“뭘 하는 거지?”
“사진을 찍는 거예요. 음, 이 순간을 기록하는 거라고 보시면 돼요.”
혹시 벨키오르가 사진을 모를까 봐 부연 설명을 했다. 벨키오르의 머리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영상 기록 마법 같은 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러면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수 있어요. 아기는 금방금방 자라니까,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아기의 어렸을 때 모습을 저장해 놔요.”
사진을 확인한 은새가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드래곤들은 구태여 자식의 모습을 물질로 남겨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저런 게 꽤 의미 있는 행동인 듯싶었다.
은새가 시간 날 때마다 아기에게 핸드폰을 들이미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아기야, 맘마 먹자. 오늘은 고구마를 약간 넣어 봤어요.”
한 숟갈 떠먹일 때마다 아기와 눈을 맞추며 교감하는 은새를 벨키오르는 말없이 턱을 괸 채 바라보았다.
***
정부 고위직에게서 도천 길드로 연락이 왔다. 사무실에서 서류를 결재하던 우리가 전화를 받으며 펜대를 휙휙 돌렸다.
“그러니까 중국 후난성에 S++급 던전이 나타났는데 한국에 협력 요청이 들어왔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중국 정부를 통한 청화 길드의 의뢰입니다. 이미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고 보상이 상당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도천 길드에서 그 일을 맡아 주길 바라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문으로 보내 두었습니다.
우리의 손짓에 비서가 밀봉된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
“일단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디 긍정적인 회신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봉투를 뜯었다. 청화 길드. 거대한 중국 땅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길드로, 중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천 길드와는 이미 여러 번 손발을 맞춘 경험이 있었다.
공문의 내용을 확인한 우리의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말했다.
“부길드장 들어오라고 해.”
-네.
잠시 뒤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솔이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귀여운 내가 왔다.”
“왜 솔이 네가 와?”
“나도 왔어. 솔이랑 같이 있다가 자기도 오고 싶다고 해서.”
미리내가 테이크아웃 해 온 커피를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얼음을 씹어 먹었다.
“무슨 일이야?”
“정부를 통해서 중국 측에서 의뢰가 들어왔어. 그런데 문제가 있어서 미리내 네 의견 좀 들어 보려고.”
“뭐길래?”
“읽어 봐.”
우리가 공문을 내밀었다. 솔이 달라붙어서 같이 읽다가 표정을 구겼다.
“뭐야, 이거. 대놓고 은새를 보내 달라는 거잖아?”
은새는 국내 활동은 물론 국외 활동 역시 안 한 지 꽤 됐다. 그런데 청화 길드에서 이번 의뢰에 은새와 마수들의 동행을 적극 요구했다.
과거 중국에서 은새를 빼내 가기 위해 수작질 부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솔이 길길이 날뛰었다.
“재수 없게! 그냥 무시해. 은새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애야? 하여튼 중국 놈들, 주제를 몰라요. 야, 야, 무시해.”
“미리내 네 생각은?”
“음…….”
미리내가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그녀가 보고 있는 건 보상 항목이었다.
“정부에서는 우리가 꼭 이 의뢰를 수락하길 기대하고 있겠네.”
“안 그래도 아까 통화하는데 부디 잘 좀 부탁한다더라.”
주변국에서 침을 흘릴 몇 가지 사업권과 무역 혜택 등이 나열되어 있었다. 만약 성립된다면 도천 그룹과 길드 역시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마수 알이라는 건 뭐야?”
“모르지. 은새라면 흥미가 있을지 몰라도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구워 먹으라고?”
“솔아, 야만인 같아.”
미리내가 결정을 내렸다.
“은새 몸 상태도 그렇고 아기 때문에라도 어차피 거절할 것 같긴 한데 일단 말이나 꺼내 보자.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는 건 은새도 알고 있어야지.”
“그래. 그럼 그러자.”
아기와 낮잠을 자고 있다가 우리의 전화를 받은 은새는 난색을 표했다.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 어쩌지. 아기 때문에라도 오래 집을 비울 순 없는데.”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은새는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어떡해? 의뢰는 거절이야?”
-아니. 최대한 인원을 잘 꾸려 봐야지. 그쪽에서 거절하면 불발인 거고. 그나마 다행인 건 네가 1년 넘게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요청도 거절해서 큰 소란은 없을 거야.
“그래……. 항상 고맙고 미안해, 우리야.”
-뭘. 컨디션은 어때?
“컨디션? 아.”
은새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녀가 조잘조잘 말했다.
“있지, 벨키오르 님이 우리 집 뒤뜰에서 세계수를 키우고 있거든?”
-뭐를 키워? 세계수?
“응. 원래 세계에서 열매를 따서 가져오셨는데, 땅에 심으니까 자랐어. 아기한테 세계수 기운이 필요하대서 자주 나가서 옆에 있는데 이상하게 점점 내 몸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아. 신기하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