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6)화 (16/190)

15화 –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은새는 벨키오르와 함께 뒤뜰로 열매를 심으러 갔다. 하늘이에게 땅을 파는 걸 부탁했다.

파바바박!

“고마워, 하늘아!”

하늘이의 목덜미를 꼭 안아 주고 정성스럽게 열매를 심었다. ‘세계수’라고 쓴 팻말도 꽂았다.

땅을 평평하게 고른 뒤 물뿌리개로 시원한 물을 충분히 뿌려 주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그래. 물은 사나흘에 한 번씩 주면 된다.”

벨키오르가 마력을 피워 올렸다. 금가루를 뿌린 것 같은 고운 황금색의 입자가 그의 손짓에 따라 너울댔다.

마치 아름다운 선율을 시각적으로 보는 듯했다.

‘와, 예쁘다…….’

은새는 감탄했다. 세계수의 열매가 묻힌 땅에 마력이 내려앉았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식물을 키우는 건 시간과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은새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주방으로 갔다. 이유식을 만들 셈이었다.

벨키오르가 은새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는 불려 놓은 쌀을 분쇄기에 곱게 갈았다.

“이 다음은.”

은새가 레시피를 힐끔힐끔 확인했다. 냄비에 쌀가루와 물을 넣고 푹 퍼지도록 끓였다.

고운체에 걸러 그릇에 담았다.

“다 됐다.”

은새가 땀도 안 나는 이마를 훔쳤다. 뿌듯함이 차올랐다.

이제 본격적인 시식 시간이었다.

“음. 아무 맛도 안 나네.”

후후 식혀 한 숟갈 맛본 은새가 머리를 갸웃했다. 굳이 말하자면 고소함?

은새는 충분히 식힌 이유식을 들고 아기 방으로 갔다. 아기가 딸랑이를 흔들며 마수들과 놀고 있었다.

은새의 입가에 사르르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 아기, 누나가 맘마 가져왔어요.”

“아! 아! 마므…….”

까르륵 웃으며 팔다리를 바동거리는 아기의 겨드랑이를 잡아 들어올렸다. 코와 코를 맞대고 비볐다.

“처음으로 이유식 먹을 건데 잘 먹어 줬으면 좋겠다.”

벨키오르는 말없이 그 모습을 관찰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다른 종족에게 어떻게 저런 애정을 가질 수 있는지 신기했다.

은새는 아기를 돌보는 일 하나하나를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쉬운 일도 아니었다.

고작 영양분 섭취를 위해 도구를 준비하고 재료를 손질한다. 그뿐인가? 아기가 입는 것, 자는 것, 노는 것까지 전부 신경 썼다.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벨키오르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정성이었다.

아기를 안은 은새는 작은 숟가락으로 이유식을 떠먹였다. 아기의 입이 빠끔 벌어질 때마다 그녀는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괜찮아? 안 이상해? 먹기 싫으면 뱉어도 돼, 아가.”

“음냠냠.”

아기는 꿀떡꿀떡 잘도 삼켰다. 은새는 몰랐지만 독이 아니고서야 아기는 은새가 주는 걸 의심 없이 받아먹을 것이었다.

전폭적인 신뢰.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아기에게는 있었다.

아기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존재보다 은새에게 더 애착이 생겼다.

“한 그릇 다 비웠네?”

은새가 놀라워했다. 그녀는 물을 몇 번 떠먹이는 걸로 아기의 식사를 마쳤다.

이유식은 하루 1회만 일정한 시간에 먹이는 것으로 습관을 들여야 했다. 아기를 재우고 나오니 벨키오르가 말했다.

“그대도 끼니를 챙겨라.”

“아 맞다. 네, 그럴게요.”

은새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벨키오르는 말없이 책을 펼쳤다.

***

우리와 미리내는 비밀리에 일본으로 출국했다. 소재를 파악한 일본인 헌터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의 길 안내는 도천 길드 소속 A급 헌터 오향기가 맡았다. 그들은 사이타마현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외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로 들어갔다. 도시라기엔 시골에 가까운 풍경.

철조망을 친 담과 잡초 덤불에 가려 거의 안 보이는 기울어진 흰색 이정표가 을씨년스러웠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에 이따금 자동차가 지나갔다. 최종 목적지는 다 쓰러져 가는 맨션이었다.

오향기가 칠이 벗겨진 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에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느릿느릿 문이 열렸다. 초췌한 인상의 남자가 생기가 꺼진 눈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야마시타 요시오 씨 맞습니까?”

통역은 오향기가 했다. 남자가 ‘그렇소만.’ 하고 대답했다.

“한국의 도천 길드에서 왔습니다. 잠시 얘기 가능하실까요?”

“퇴물이 된 헌터에게 무슨 말이 듣고 싶은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들어오시오.”

요시오의 집은 빈말로라도 쾌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쓰레기는 산처럼 쌓여 있었고 음식물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전형적인 폐인의 삶이었다.

헌터 중 은퇴한 뒤 폐인이 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기에 우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질문했다.

“3년 전, 한중일 연합 레이드를 기억하십니까?”

“음…… 은가시나무 던전을 말하나 보군.”

부르튼 입에서 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시오가 왈칵 얼굴을 구겼다.

“그래. 그때부터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어. 그때 그 레이드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의미입니까?”

“흐흐흐……. 기억나는군. 자네도 그때 참가했었지? 왜, 한국인 헌터 중에도 문제가 생긴 이가 있나? 나 혼자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불공평하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그 시궁창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우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요시오는 척 보기에도 제정신 같지 않았다.

화려한 헌터의 삶 이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헌터는 몸이 망가지면 헌터로서의 생명이 끝이 난다는 것이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그들은 대중에게서 잊히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자살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자살하지 않으면 눈앞의 요시오처럼 여생을 피폐하게 살았다. 미리내가 그에게 물었다.

“문제라뇨? 레이드가 끝난 후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의뭉 떨기는! 던전 보스가 남긴 저주가 몸을 좀먹어 갈 텐데 몸이든 정신이든 멀쩡하겠어? 맞지? 맞다고 해. 아니면 내가 당신을 죽여 버릴 테니까!”

“진정하시죠.”

“으윽!”

오향기가 요시오를 제압했다. 한중일 연합 레이드에 참가할 만큼 실력 있는 헌터였던 요시오는 맥없이 바닥에 얼굴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히죽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우리와 미리내는 불쾌해졌다.

요시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피부가 썩고 내장이 녹겠지. 피를 토하고 밤에 잠 못 들 거야.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서 세상 모든 게 원망스러워지겠지. 그런데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크하하하…….”

“당신이 그랬습니까?”

“아니. 미우라가.”

우리와 미리내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우라 켄이치. 실종된 또 다른 헌터였다.

요시오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건조하던 그의 목소리에 강렬한 분노가 스몄다.

“그 빌어먹을 던전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다음은 내 차례야. 내 차례라고!”

“……저주를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까?”

“있겠나? 있겠어? 있으면 나 좀 알려 주게.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으아아악. 요시오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미쳐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요시오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한 우리와 미리내는 오향기를 데리고 나왔다.

그들의 얼굴이 참담했다. 던전 보스의 저주가 은새 하나만을 노린 게 아니란 걸 알게 됐지만 대책이 없었다.

우리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은새야.’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울부짖던 요시오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머물렀다.

***

[한우리: 오늘 너희 집에 들를게.]

낮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은새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기분이 저조해 보이네. 우리한테 무슨 일 있나?”

단조로운 내용이었지만 오랜 기간 우리를 봐 온 은새는 단번에 그의 기분 상태를 알아차렸다.

흐음. 친구들한테 연락해 볼까 했지만 관두었다. 그가 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었다.

“아가야, 여기 봐라.”

은새는 손을 흔들어 아기의 주의를 끌었다. 아기가 꼬물꼬물 발가락을 입에 가져가다가 은새를 보고 행동을 멈추었다.

“바. 브아.”

“누나 없다. 까꿍!”

“흐학! 흐하학.”

아기가 입을 벙긋대며 와르르 웃음을 쏟아 냈다. 은새는 다시 한번 ‘까꿍!’ 하고 얼굴을 가렸다 펼쳤다.

벨키오르가 해괴한 것을 보는 눈빛을 했다.

“그건 왜 하는 거지?”

“네? 아, 이러면 아기의 성장 발달에 큰 도움이 된대요.”

“어떤 점이?”

“기억력이 좋아지고 집중력이 향상된다고 했나……?”

책에서 봤다.

벨키오르는 드래곤에게 그런 것이 왜 필요하냐고 말하려다가 은새가 즐거워하니 그냥 두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왔군.”

“아마 제 친구 우리일 거예요! 잠깐만 아기 좀 봐 주세요. 문 열어 주고 올게요.”

벨키오르는 은새가 자신에게 아기를 ‘맡기고’ 간 상황을 돌이켜보고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아기는 분명 제 아들인데……? 아기가 부우우, 부우우, 하고 아랫입술을 내밀자 침이 흘렀다.

벨키오르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며 머리를 기우뚱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은새는 현관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와, 우리야!”

“잘 있었어? 아기는?”

“아버님이랑 같이 있어. 밥 먹었어?”

“난 먹었고 너 먹으라고 초밥 사 왔어.”

“와, 초밥. 맛있겠다.”

은새는 우리가 내미는 쇼핑백을 냉큼 받았다. 우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 이 아니라 드래곤이랑 할 말이 있는데.”

“벨키오르 님이랑?”

놀란 듯 커졌던 은새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싸우려는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럼 잠시만 기다려 봐.”

은새는 쇼핑백을 식탁에 내려놓고 방으로 갔다. 벨키오르가 왜 왔냐는 시선을 보냈다.

“아버님, 잠깐 나오실 수 있으세요? 제 친구가 아버님께 할 말이 있대요.”

“나한테?”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벨키오르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그에게 묵례하고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어디 가?”

“잠깐 대화하고 올게. 넌 밥 먹고 있어.”

우리와 벨키오르가 마당으로 나갔다. 어슴푸레한 조명이 주변을 밝힌 가운데 우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때의 무례는 사과드립니다.”

“음.”

우리는 굳은 표정으로 벨키오르를 쳐다봤다.

“은새가 저주에 걸린 거 알고 있으세요?”

벨키오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의도로 묻는 거지?

우리가 참담하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레이드를 하다가 던전 보스에게 당했습니다. 백방으로 방법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

“혹시 알고 계신 방법이 있다면 감히 부탁드립니다. 은새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어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이번엔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의 목소리에 절실함이 담겼다.

“도와주신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