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5)화 (15/190)

14화 – 재밌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나댔으면 얼마나 나댔다고?”

“하마터면 팔 한쪽이 날아갈 뻔했잖아!”

찰싹, 찰싹 등짝을 때리는 소리가 매우 차졌다. 솔이 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렀다.

막판 3분 전, 솔은 무리해서 우리에게 덤벼들었다가 오른팔을 반 이상 잘라먹었다.

미리내는 인터뷰하러 가는 우리에게도 잔소리를 했다.

힐러가 있으니 그 정도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과열된 것이 문제였다.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니야, 적당히. 너희 여기가 어딘지 잊어버렸니?”

“잚태씀다…….”

“최선을 다하는 거 좋아.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솔이 몸을 쭈그려 불쌍한 척을 했다. 미리내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우리와 솔이 왜 그렇게 필사적이었는지 모르지 않았다.

‘자극받은 거겠지.’

드래곤과의 전투. 사실 전투라고 하기도 부끄러웠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S급 헌터로 만인의 찬양을 받는 그들에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무력하다는 감정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전부터 고민해 오던 신기술 ‘암중봉연’을 완성해 냈고 솔은 홍염룡을 생성했다.

미리내는 초조했다. 자신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동료들한테 도움이 돼야 해.’

띠링!

“뭐야?”

미리내의 눈치를 보던 솔이 반색했다. 문자 알림음이었다.

“누구야? 은새야?”

“아니. 향기.”

“향기가 뭐래?”

도천 길드 소속 A급 헌터 오향기의 연락이었다. 미리내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찾았대. 실종된 일본인 헌터 세 명 중 한 명.”

***

은새는 마당에서 원반 세 개를 차례로 멀리 던졌다. 하늘이와 민들레, 쪼쪼가 달려가 원반을 물어서 도로 가져왔다.

“잘했어!”

세 마수의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휙휙 돌아갔다. 은새는 오랜만에 마수들과 놀아 주고 있었다.

마수들의 목과 머리를 듬뿍 쓰다듬어 줬다. 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원반을 향해 손을 잼잼 했다.

“흐아! 뱌!”

“아기도 해 볼래?”

은새는 다정하게 아기의 작은 손에 원반을 쥐여 줬다. 하지만 제대로 던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유모차 바로 앞에 떨어진 원반을 민들레가 냉큼 물어 아기에게 돌려주었다. 아기의 웃음소리가 까르륵 울려 퍼졌다.

꾸우!

“도다리야, 무슨 일이야?”

황새와 같이 산책을 나갔던 도다리가 입에 물고 온 무언가를 은새 앞에 뱉었다. 웬 기계 장치였다.

“이건 드론이잖아?”

은새가 머리를 갸웃했다. 요새 들어 이런 게 자주 보이는 듯했다.

은새는 마수들을 모아 두고 말했다.

“아기의 존재가 알려지면 안 되니까 이런 거 보면 바로바로 처리해 줘. 모르는 사람이 오면 접근 못 하게 막고. 부탁할게.”

꾸꾸!

매애애.

크아앙.

마수들이 열성적으로 대답했다. 원반을 정리하고 뒤를 돌아본 은새는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아기야.”

빨간 무당벌레가 아기의 콧등에 앉아 있었다. 아기의 금색 눈동자가 낯선 생명체에게 고정되었다.

“이건 무당벌레야.”

은새가 무당벌레를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아기가 만져 보려고 손을 뻗었다.

“음, 좀 더 커서 만지자. 잘못하면 다치게 할 수 있어.”

은새는 아기가 충분히 구경하게 해 주고 무당벌레를 날려 보냈다. 아기의 시선이 무당벌레가 사라진 곳을 향했다.

“기왕 나왔으니 산책 조금만 더 할까?”

은새는 발걸음 가볍게 유모차를 밀었다.

***

벨키오르는 눈을 떴다. 방대한 마력이 걷히고 드러난 풍경은 그에게 익숙했다.

울창한 숲속,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푸른빛의 나무.

나무의 이파리에선 신성한 빛이 은은하게 뿜어졌다.

한눈에 다 담기에도 어려운 세계수를 벨키오르가 응시했다.

[돌아왔구나.]

머릿속으로 세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키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아기는 잘 있니?]

“성장이 빠르더군. 이대로라면 무난히 1차 각성을 하겠어.”

[아기가 가출했을 때는 정말 놀랐는데. 그러게, 아기는 보살핌이 필요하다니까. 드래곤 해츨링이어도 말이야.]

“잔소리는 됐어. 혼자 살아남지 못한다면 어차피 도태될 뿐이다.”

[야박한 소리를 하는구나.]

세계수의 가지가 느리게 흔들렸다.

[그 인간은 어때? 너와 잘 지내고 있니?]

“…….”

벨키오르가 미간을 좁혔다. 세계수가 놀란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일 없어. 나와 잘 지내고 말 것도 없지. 다만.”

벨키오르가 말을 골랐다.

“그 여자는 무른 구석이 있어서 염려되는군.”

[착하다는 얘기구나.]

후후……. 세계수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벨키오르는 대꾸하지 않고 세계수의 열매를 땄다.

호두만 한 울퉁불퉁한 열매를 벨키오르가 품 안에 잘 챙겨 넣었다.

[그건 뭐 하게?]

“아들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지난번에 가져간 가지로 충분했을 텐데.]

세계수는 알 것 같다는 의뭉스러운 기색을 풍겼다. 콧잔등을 찡그린 벨키오르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공간 이동 마법진이 그의 발밑에 그려졌다.

[어디 가?]

“산체스에게.”

[비술의 드래곤이구나. 잘 다녀와.]

언제나 그랬듯 세계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

벨키오르가 도착한 곳은 용암이 들끓는 화산 지대였다. 그곳에 동족의 레어가 있었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여전히 취향이 고약하군.’

벨키오르는 함정을 파훼하며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레어를 지키던 용아병이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벨키오르가 커튼이 쳐진 침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산체스, 있나?”

“누구……?”

잠에 절어 있는 목소리였다. 벨키오르는 거침없이 커튼을 열어젖혔다.

밤하늘을 연상하게 하는 쪽빛의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여자가 눈을 비볐다. 그녀는 긴장감도 없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랜만이군. 산체스.”

“으음……. 벨키오르냐?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군.”

“너야말로 흙으로 돌아갈 나이는 한참 지난 것 같은데.”

“뒈지는 것도 순서가 있는 법이지.”

드래곤들의 유머였다. 산체스가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력이 너울댔다.

쪽빛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돈되었고 잠옷에서 딱 달라붙는 드레스로 의상이 바뀌었다.

관능적인 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눈에서 뚝뚝 묻어나는 졸음기는 감춰지지 않았다.

산체스가 약초 차를 우렸다.

“기어코 세계수랑 지지고 볶고 해서 애 낳았다는 소식은 들었다. 왜 왔어?”

“상스럽게 말하지 마라. 나에게 후계자 생산은 의무다.”

“어휴. 아무나 붙잡고 애 좀 낳아 달라고 하면 될 것을 결벽스럽기는.”

그녀가 뜨거운 차를 호록 마시며 혀를 쯧쯧 찼다.

“그 나이 먹었으면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알아야지. 그래도 얼마 전에 아케이아한테 재밌는 말을 들었어. 네 운명이 크게 변했다더라?”

“아케이아가?”

아케이아는 신탁의 드래곤이었다. 그녀는 허투루 말을 내뱉는 법이 없었고 그녀의 예언은 적중률이 매우 높았다.

산체스가 음흉하게 웃었다.

“드디어 네게 반려가 찾아올 모양이다.”

“웃기는 소리.”

벨키오르가 코웃음 쳤다. 긴 드래곤 생에서 그토록 반려를 찾아 헤맸다.

생에 딱 한 명뿐이라는 반려. 영혼을 공유하고 시간을 나누는, 유일한 세상의 중심.

반려를 맞이한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짝의 손을 잡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스치는 바람조차 그에겐 다가온 적 없었다. 이제 그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흰소리는 그만하고, 아라크네의 저주에 대해서 아나?”

“아라크네?”

산체스가 머리를 기우뚱했다.

“알지. 그 골 때리는 거. 그런데 왜?”

“해주 방법은?”

“이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렵지.”

뭔가 깨달은 것처럼 산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수상하다. 네가 한낱 미물에게 당했을 리는 없고. 누구야?”

“…….”

“누구길래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해주 방법을 물어?”

벨키오르가 느릿하게 시선을 피했다.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이 뭔데?”

벨키오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동족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건 그의 성미에 안 맞았다.

흐음. 산체스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비술(祕術)의 드래곤.

말해 준다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냥 말해 주는 건 재미없지.

“일단 돌아가. 몇 가지 모호한 게 있어서 나도 확인해 봐야 해.”

“알겠다.”

벨키오르는 수긍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산체스는 호들갑을 떨며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아케이아, 아케이아! 지금 벨키오르가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

은새는 벨키오르가 내민 호두알 같은 쭈글쭈글한 열매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이게 뭐예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열매다.”

“이걸 왜 제게……?”

“저택 뒤편에 심어라. 본목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잘 키운다면 꽤 덕을 보겠지.”

원래 세계에선 용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못 구하는 귀한 선물을 주고도 벨키오르가 무심하게 말했다.

은새가 알겠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 아기 때문인가요?”

“뭐?”

“그런데 빨리 자랄까요? 아기가 다 크고 나서 성목이 되면 아무 소용 없을 텐데.”

은새가 비음을 흘렸다. 상추나 허브도 아니고, 씨를 심는다고 금방 싹이 트고 자랄 것 같지 않았다.

“……마력이 충만하다면 가능해.”

벨키오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세계수의 열매는 아기 때문에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세계수 본목에는 악한 것을 정화하고 억누르는 힘이 있었다. 저주를 짊어진 은새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은새가 눈동자를 굴렸다.

“마력이요? 어…… 벨키오르 님이 사용하시는 힘 맞죠?”

“그래.”

“제가 열매를 심으면 벨키오르 님께서 키워 주시는 건가요?”

“그래.”

은새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버님이 아닌 척하면서 아기를 위해서 힘쓰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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