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아기를 뺏어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은새는 육아 관련 도서를 읽고 있었다.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음……. 이유식은 4개월에서 6개월 무렵에 시작하고 초기에는 분유와 병행해야 한다고.”
그녀는 쌀미음을 만드는 법을 자세히 읽었다. 요리에 취미가 없는 은새가 이토록 레시피에 열중하는 건 오직 아기 때문이었다.
“분쇄기랑 손절구를 사야겠네. 주문, 주문.”
은새가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부를 마친 뒤 은새는 거실 테이블에 놓인 세계수 가지의 물을 갈았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로 갈자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세계수의 빛이 강해진 듯했다.
은새는 청소기를 들고 방 이곳저곳을 밀고 다녔다. 마수들의 털 때문에 맨날 청소해도 부족했다.
다음은 소독이었다. 아기가 입에 가져다 넣는 물건들을 소독기에 넣고 돌렸다.
“도통 가만히 있질 않는군.”
“깜짝이야. 계셨어요?”
은새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그녀의 뒤에서 벨키오르가 나타났다.
벨키오르는 우리 일행과의 전투 이후 전보다 자주 자리를 비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은새를 보다가 아기의 곁으로 갔다. 선잠에서 깨어난 아기가 칭얼거렸다.
벨키오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신기해. 어떻게 인간이 드래곤을 이렇게 키울 수 있는 거지?”
“네? 아기가 어떤데요?”
벨키오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기를 훑었다. 요람에 있을 때보다 쑥 커진 몸집,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청명한 기운.
그가 은새를 힐끔거렸다.
“건강해.”
“다행이네요! 제가 잘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봐요.”
은새가 손뼉을 쳤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갔다.
“흐애. 흐애앵.”
시야에서 은새가 멀어지니 아기가 온몸을 버둥거렸다. 기어코 아기가 뒤집기를 했다.
은새에게 가기 위한 배밀이를 하는 아기를 보고 벨키오르가 중얼거렸다.
“별짓을 다 하는군.”
“마! 브아.”
“네가 가지 않아도 그녀는 곧 돌아올 거다.”
아기가 항의하듯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그때였다.
쨍그랑! 데구르르……. 무언가 땅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지?”
벨키오르가 밖으로 나갔다. 주방에서 은새가 배를 감싸고 쓰러져 있었다.
“이봐. 괜찮나?”
은새의 안색이 새파랬다. 잠깐 새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으…… 괜찮, 아요.”
은새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런 때마저 그녀는 벨키오르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다.
못마땅함에 벨키오르가 한 소리 하려는 찰나, 은새에게서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이 훅 솟구쳤다.
“저 잠시…….”
은새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녀의 상태를 살핀 벨키오르가 가뿐히 그녀를 안아 올렸다.
“마! 마! 후애앵.”
방으로 가니 아기가 힘없이 축 늘어진 은새를 보고 경기를 일으켰다.
“울지 마라. 죽은 거 아니다.”
“히끅. 히잉.”
아기는 벨키오르가 안아 은새 옆으로 옮겨 주자 폭 안겼다. 은새의 심장 소리를 듣고 진정했다.
벨키오르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기운은 분명.’
벨키오르는 거리낌 없이 은새의 옷자락을 들췄다. 옆구리부터 배까지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저주의 흔적이다.’
벨키오르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은새는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끙끙거리던 그녀는 아기 생각에 눈을 반짝 떴다.
“어라?”
팔 한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아기는 은새 품에 안겨 울지도 않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기야?”
“흐아! 브아브, 아앙.”
아기가 쉴 새 없이 옹알이를 했다. 은새가 생각하기로 왜 밥도 안 주고 잠만 자느냐는 타박 같았다.
“그래, 그래. 미안. 놀랐지? 우리 아기 심심했겠다.”
“그대나 걱정해라.”
“앗, 아버님. 아버님이 저 옮겨 주셨어요?”
소리 없이 다가온 벨키오르에게 은새가 겸연쩍게 물었다. 그는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아라크네의 저주더군.”
“아…….”
은새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벨키오르는 은새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은새가 내색하지 않고 벨키오르도 구태여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아꼈다.
그러나 아기가 은새를 너무 좋아하고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해 벨키오르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음……. 몇 년 전에 갔던 던전에서 보스가 자폭하면서 저주를 걸었어요.”
은새가 당시를 회상하며 머리를 기울였다.
“거기 있던 사람들 수가 꽤 많았는데 이렇게 된 건 저뿐이에요. 아마 제가 운이 굉장히 나빴나 봐요.”
“그대 혼자만 당한 것은 아닐 거다.”
“어, 그래요?”
벨키오르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대 말고도 비슷한 현상을 겪는 이들이 있었을 테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다른 건 몰라도 그대처럼 태평하게 드래곤 해츨링이나 돌보진 않았겠지.”
인간은 죽을 날을 받아 놓고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종족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새는 특이했다.
은새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이었다.
“저! 이거 누구한테 옮기는 저주 아니에요.”
“그런데?”
“몇 년 동안 마수들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아기한테 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벨키오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왜. 내가 아기를 데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 같나?”
은새가 눈치를 봤다. 벨키오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안심해. 아기를 뺏어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적어도 아기가 계속 그녀를 원하는 한 강제로 데려가진 않을 것이다. 벨키오르가 침대에서 멀어졌다.
“어디 가세요?”
“한동안 자릴 비울 것이다.”
그 말만 남긴 채 벨키오르는 모습을 감추었다.
***
랭킹 대회 결승전이었다. 결승전은 많은 이들이 예측한 대로 한우리 대 남궁솔이었다.
유하는 전체 4위에 머물렀다. 골드스타 길드의 육재희가 접전 끝에 가까스로 3위에 올라섰다.
랭킹 대회의 순위는 국내 헌터 순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 국내 헌터 순위는 개인의 전투력 말고도 여러 가지 요소를 취합해 결정된다.
하지만 대중의 인지도를 올리는 측면에서 랭킹 대회만큼 좋은 이벤트가 없었다. 대회장에서 우리와 솔이 마주 보고 섰다.
“봐주지 않는다, 길짱.”
“오늘이야말로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남궁솔.”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르게 텐션이 낮았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벨키오르를 상대했을 때의 무력함을, 더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그들은 그날의 대결을 수없이 복기했다.
유하도 꽤 심란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벨키오르가 보여 준 것이 그가 지금까지 이능을 활용해 온 방법과 상이했기 때문이다.
‘이능을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는 없을까?’
‘더 강하게, 더 화려하게, 더 압도적으로!’
우리와 솔의 시선이 마주쳤다. 불꽃이 튀었다.
[대전 시작합니다!]
심판의 호루라기가 울림과 동시에 우리와 솔이 땅을 박찼다. 한 호흡을 채 쉬기 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손발을 맞춘 다년간의 경험 탓에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문제였다. 우리의 만유인력이 발동되기 전, 솔이 불꽃을 내뿜어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암혈을 두른 검이 허공에 꽃을 수놓았다. 솔은 이능의 출력을 높여 독기마저 불태워 버렸다.
막상막하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접전입니다!]
[빠릅니다, 빨라요!]
사회자와 해설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함성이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솔과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쇼맨십도 하고 여유를 부릴 텐데 그러지 않았다.
오직 상대를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드래곤은 지금껏 우리가 상대해 왔던 마수와 전혀 달랐다. 자만했어.’
‘더 할 수 있어! 그때 지금처럼만 했었더라면!’
불의 기둥이 솟구쳤다. 동양의 용을 닮은 불기둥이 우리를 꽁꽁 묶었다.
강한 일격이 불기둥을 동강 냈다. 우리가 경기장에 발을 딛고 섰다.
“무조건 강한 출력을 낸다고 위력이 강해지는 건 아니야.”
“잘난 척하기는! 그러는 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잖아?”
우리가 팔을 검으로 베었다. 상처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일어났다.
검푸른색의 거품이 바람에 날렸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건 뭔 수작이야?”
솔이 창으로 거품을 그었을 때였다. 퍽, 소리와 함께 거품이 폭발했다.
“으악!”
응축된 암혈을 뒤집어쓴 솔의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암혈이 튄 바닥은 치익, 소리와 함께 부식이 진행됐다.
“미쳤어? 날 죽일 셈이야?”
“안 죽었잖아.”
경기장 곳곳에 거품이 두둥실 떠다녔다. 그 자체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검날을 바로 세웠다.
“슬슬 끝장을 보자.”
“누구 마음대로?”
두 사람의 기세가 사뭇 위험해졌다.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긴장했다.
같은 길드원이면서 죽자고 싸우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적당히 싸우고 끝내면 안 되나?
우리가 휘두르는 검에서 검은 연꽃의 봉오리가 솟아났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솔이 기겁했다.
“그건 또 뭐야?!”
“암중봉연.”
검은 연꽃이 흐드러지게 개화했다. 독향이 뿜어졌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진 솔이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솔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오냐, 어디 한번 오늘 죽어 보자.”
두 사람이 격돌했다.
[오늘 결승전에서는 한우리 헌터, 남궁솔 헌터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 두드러졌습니다. 두 헌터 모두 새로운 기술을 선보여 주었는데요. 한우리 헌터의 ‘암중봉연’은 독향을 품은 검은 연꽃을 개화해 상대의 전력을 깎는 것이었고, 남궁솔 헌터의 홍염룡 역시…….]
“아이고, 길짱이 길드원 죽이네.”
미리내의 치료를 받으며 솔이 죽는시늉을 했다. 헌터 랭킹 대회는 우리의 우승으로 끝이 났다.
미리내가 솔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한심하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러게, 누가 그런 식으로 나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