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헌터 랭킹 대회 2
그녀가 거듭 당부했다.
“방심하면 안 돼. 도발에 넘어가서도 안 되고.”
-너는 날 뭐로 보고!
솔이 발끈했다. 하지만 전과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유하가 그녀를 살살 약 올렸다.
-남궁솔 랭킹 떨어지면 길드의 수치다. 우우, 떠나라.
-너는 기회만 잡았다 하면 나 내쫓으려고 하더라? 그래 봤자 네가 2인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솔이 너 2인자에 만족해? 그렇게 배포가 작은 여자였어?
-이번 랭킹전에서 길짱의 콧대를 콱 눌러 버릴 테니까 두고 봐!
-도전 받아 준다.
-왜 너희는 나이를 먹어도 변하질 않니.
핸드폰 너머에서 친구들이 티격태격했다. 은새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번엔 꼭 챙겨 볼게. 다들 몸조심하고.”
-엉. 아니지, 왜 애 아빠 얘기하다가 딴 얘기로 샌 거야? 그래서 외간 남자랑 계속 같이 있겠다고?
“이만 끊는다.”
-야! 유은새!
뚝.
은새는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친구들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애초에 벨키오르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은새의 신경은 온통 아기에게 쏠려 있었다.
“마! 마!”
“응, 아가.”
아기가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은새는 얼른 호응해 줬다.
아기가 러그 깐 바닥에서 꼬물거리자 마수들도 그 옆에서 다 같이 꼬물거렸다. 은새는 그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했다.
어느새 그녀의 앨범엔 아기의 사진만 백여 장이 담겼다. 분유를 타면서 은새가 생각했다.
‘슬슬 이유식을 준비해야 하나.’
은새가 늘 염두에 두는 건 영양소였다. 아기가 뒤집기를 할 수 있게 되면 이유식을 먹여야 할 듯했다.
“아가, 맘마. 맘-마.”
“마-망.”
“옳지, 맘마 줄게요.”
배부르게 분유를 먹은 아기를 데리고 침실로 갔다. 그녀는 다리 사이에 아기를 기대듯 앉히고 동화책을 펼쳤다.
색색의 아기자기한 그림이 펼쳐졌다. 은새는 실감 나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글자를 읽었다.
“다람쥐네는 숲속에서 살아요. 다람쥐네는 뭐든지 다 작아요. 포크도 작고, 식탁도 작고, 침대도 작아요. 와아, 정말 작다. 그치?”
아기는 그림책 대신 은새를 올려다봤다. 초롱초롱한 시선이 은새의 입 모양에 꽂혔다.
“똑똑! 밥을 먹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요. ‘누구세요?’ 문을 열고 보니 커다란 곰돌이였어요. ‘배가 고파서 그런데 한 끼 식사를 대접해 줄 수 있나요?’”
대사에 맞춰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기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곰돌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들어오렴, 착한 곰돌이야.’ 다람쥐네 가족은 곰돌이를 맞아들였어요. ‘고맙습니다.’”
은새가 곰돌이 그림을 손으로 짚었다.
“아기야, 고마운 일이 있을 때는 이렇게 손을 배꼽에 모으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거야. 알겠지?”
“음-마!”
“옳지. 작은 집이 꽉 찼어요. ‘어라, 곰돌이가 쓸 접시가 너무 작아. 어떡하지?’”
“후아암.”
아기가 작게 하품했다. 페이지를 넘기며 은새가 아기의 가슴을 토닥였다.
“다람쥐 가족은 곰돌이를 위한 접시 찾기에 나섰어요. 장난감 상자는 가득 차서 안 돼. 꽃병은 너무 작아서 안 돼.”
아예 은새 쪽으로 돌아누운 아기가 칭얼거렸다. 배도 부르겠다, 솔솔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커다란 나뭇잎을 찾았어요! 이제 곰돌이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어요. 잘됐다, 다람쥐네는 도토리랑 나무 열매를 먹는구나.”
동화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한 은새가 아기를 내려다봤다. 아기의 눈이 가물가물했다.
조금만 더 하면 재울 수 있겠다. 은새는 아무 말이나 속삭이며 아기의 등을 쓸어내렸다.
오래지 않아 아기는 은새에게 몸을 폭 기대고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은새는 동화책을 접었다. 아기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늦은 식사를 하려는데 사라졌던 벨키오르가 돌아왔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벨키오르는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뭔가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가지다.”
“세계수요?”
은새는 입을 벌렸다. 나뭇가지는 특이하게 파란빛을 띠었다. 이파리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내 아들 근처에 둬라.”
“어떻게 보관하면 되나요?”
“물에 담가 놓으면 될 거다.”
“네에.”
은새는 예쁜 화병에 물을 담아 세계수의 가지를 꽂았다. 화병은 거실 테이블 중앙에 놓였다.
은새는 조촐하게 식탁을 차렸다.
“식사하시겠어요?”
“됐다.”
“그럼 마실 거라도 드릴게요.”
며칠간 벨키오르를 살펴보며 그의 취향을 파악한 은새는 100% 생과일을 착즙한 주스를 내놓았다.
한동안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은새가 식사를 거의 끝마쳤을 때 벨키오르가 쯧, 혀를 찼다.
“내 아들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 정작 본인은 잘 챙기지 않는군.”
먹는 데에 취미가 없는 은새는 반찬도 몇 가지만 놓고 대충 먹었다. 그녀가 겸연쩍게 웃었다.
순간 은새의 가느다란 손목에 걸쳐져 있던 팔찌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것을 본 벨키오르가 물었다.
“그 팔찌는?”
“아, 독성 정화 아이템이에요.”
“독?”
벨키오르가 반문했다.
“음. 선물받은 거예요.”
은새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벨키오르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세계수의 가지를 더 꺾어 와야겠군.”
“네?”
“됐다.”
벨키오르는 그 말만 남긴 채 마당으로 갔다. 마수들과 있는 벨키오르를 보며 은새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
랭킹 대회 대기실. 솔이 몸을 풀고 있었다.
도천 길드의 전담 코디팀이 솔의 의상과 화장을 점검했다. 솔은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간 화려한 인상의 미녀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진 가죽자켓과 바지를 입었다. 늘씬늘씬한 몸과 쭉쭉 뻗은 팔다리가 유연하게 움직였다.
미리내가 보리차를 마시며 말했다.
“잘해. 은새 실망시키지 말고.”
“당연하지! 나 남궁솔이야!”
솔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그러다 별안간 으, 하고 신 것을 먹은 듯한 표정을 했다.
“유은새 뒤끝 길어서 이번에 지면 두고두고 구박할걸? 생각만 해도 귀 따가워. 그리고 올해는 길짱을 꼭 때려눕혀 주겠어.”
솔이 전의를 불태웠다. 막 대기실에 들어오던 우리가 가소롭다는 얼굴을 했다.
“네가? 백만 년은 일러.”
“내가 이기면 길짱의 자리는 내 거야.”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두 사람의 눈이 이글이글했다. 똑같은 수준의 그들을 보며 미리내가 머리를 흔들었다.
“중계 시작했어.”
조용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유하가 말했다. 관계자가 솔의 대기실을 찾아와 이제 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다녀온다!”
“남궁솔, 지면 길드의 수치다.”
“이겨.”
“화이팅!”
“도천에게 골드스타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보여 줘.”
솔은 날듯이 경기장에 뛰어올랐다. 쩌렁쩌렁한 함성이 경기장을 울렸다.
“남궁솔! 남궁솔!”
“솔이 언니! 멋져요! 예뻐요!”
“화홍염제 남궁솔! 다 불태워 버려!”
솔은 오롯이 주목받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뒤이어 백찬민 헌터가 올라오자 분위기가 양분되었다.
“형님! 찬민 형님! 으아아아!”
“뇌전의 지배자 백찬민!”
“찬민 오빠! 손 한 번만 흔들어 주세요!”
눈을 가늘게 뜬 백찬민은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백사자 같은 위압감 서린 걸음걸이와 태도.
재수 없는 반반한 낯짝을 보고 솔이 침을 바닥에 탁 뱉었다.
“어이, 백찬민. 여유롭다? 어차피 쳐발릴 거라 그런 모양이지?”
백찬민 헌터가 솔을 힐끔거렸다. 그가 한껏 빈정댔다.
“왜 까칠하게 구시나. 관종이 관심을 못 받아서 그래?”
“누가 관종이라는 거야?!”
솔이 발끈했다. 백찬민이 알지 않냐는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튼 이목을 독차지하지 못하면 퉁퉁거린다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너야말로 나른한 척, 치명적인 척하는 거 꼴불견이거든?”
백찬민의 미소에 금이 갔다. 그가 입꼬리만 끌어 올린 채 차가운 눈빛을 했다.
“마수들의 공주님은 잘 지내? 통 소식이 없어.”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솔이 으르렁거렸다. 백찬민이 말하는 공주님은 은새를 일컫는 것이었다.
“아니면 실은 정말 도천이랑 갈라선 거야?”
“…….”
“잘됐네. 공주님은 뭘 좋아해? 우리 골드스타에서 모셔 오고 싶은데.”
솔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친구들의 잔소리를 떠올리고 후우, 심호흡했다.
솔이 대기실에서 봤던 우리의 가소롭다는 표정을 재현했다.
“골드스타 주제에? 공주님의 몸값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유은새를 담기엔 네 그릇이 너무 작지 않냐?”
“뭣!”
백찬민의 가면이 드디어 와장창 깨졌다. 솔이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인터넷에 알바 풀 시간 있으면 한 푼이라도 아껴서 저금하지 그래.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지 않겠어?”
“남궁솔.”
백찬민이 이를 갈았다. 투쟁심이 일렁였다.
백찬민의 이명은 전격마황. 그의 몸에서 뇌전이 튀었다.
마찬가지로 솔의 손끝에서 불꽃이 타다닥 피어올랐다. 긴장감이 팽배했다.
[대전 시작합니다!]
사회자의 외침에 솔과 백찬민이 격돌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백찬민 헌터, 선제공격을 합니다!]
백찬민이 전격을 두른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퍼억! 파바박.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들렸다. 솔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무식하기는!”
불꽃을 키운 솔은 창을 만들어 백찬민과 거리를 벌렸다. 이글이글한 불의 파편이 허공에 떠올라 백찬민을 덮쳤다.
“칫.”
백찬민이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뽑았다. 쿠르르 쾅쾅! 창과 대검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섰다.
새카만 연기가 그들을 감쌌다. 당황한 사회자가 외쳤다.
[보,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경기장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솔은 불꽃의 출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온몸이 하나의 불덩이가 되었다.
백찬민이 기가 찬 탄성을 질렀다.
“무식한 게 누구인데?!”
미사일처럼 빠르게 쏘아지는 솔을 피하느라 백찬민의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오늘 대전을 위해 불 저항 옵션이 달린 아이템으로 무장을 했지만 화마나 다름없는 솔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내기란 요원했다.
어쩔 수 없이 화상을 입었다. 오늘 솔은 지나치게 텐션이 높았다.
백찬민은 이를 사리물었다. 여기서 질 수 없다.
백찬민은 국내 2위 길드 골드스타의 길드장으로 그의 목표는 도천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 안 써 본 방법이 없었다. 도천 소속 헌터를 빼 오기도 하고 여론전을 펼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를 백사자가 아닌 하이에나라고 부를 정도였다.
한우리를 꺾기 전에는 결코 무릎 꿇을 수 없다. 백찬민의 고유 능력 ‘파천’이 발동되었다.
우르릉. 하늘을 가득 채운 대뢰가 지상을 폭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