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아기가 없었는데, 있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오늘 한잔 어때? 은새 너 아기 돌본다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미리내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시스템, 배달을 시키려는 모양이었다.
“그럴 기분 아닌데…….”
“너 친구들이 왔는데 대접 이따위로 할 거야? 얼른 술을 대령해라! 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솔이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유하를 빼놓고 축하 파티를 하는 게 양심에 찔렸지만 이미 분위기는 기울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은새가 술상을 차렸다.
길드 직원이 집 앞까지 배달해 준 치킨과 족발, 보쌈, 피자와 함께 술판이 거하게 벌어졌다. 쉽게 취하지 않는 S급 헌터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술을 궤짝으로 가져다 놓고 마셨다.
“크하하! 유은새, 젓가락질 똑바로 못 해? 쟤 취했다.”
“남궁솔 너나 잘하세요. 네 앞에 술잔 엎질러진 거 안 보여?”
“사람이 급하게 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손 떨지 마라. 얘가 나중에 어떡하려고 벌써부터 손을 떨어?”
“우웅? 솔이는 손 떨지 않아요. 그런 건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누가 쟤 좀 말려.”
술에 취한 은새는 꾸벅꾸벅 졸았다. 미리내의 지시에 우리와 인찬이 그녀를 부축해 방에다 눕혔다.
문을 닫고 나온 그들을 보며 미리내가 씁쓸하게 말했다.
“은새가 많이 속상한가 봐.”
“어련하겠어. 쟤 말랑말랑해서 아무한테나 정 잘 주잖아.”
우리가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은새도 단호할 때는 단호해. 단지 한번 마음 주면 잘 접지를 못해서 그렇지.”
“그런데 진짜일까?”
“뭐가?”
인찬이 괜히 족발을 뒤적거렸다.
“애 아빠가 이계의 드래곤이라는 거.”
“모르지. 우리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미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은새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아마 맞을 거야. 쟤 다른 건 몰라도 마수에 관한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인간형 드래곤을 마수로 쳐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낄낄거렸다. 후. 내뱉는 숨에서 술 냄새가 났다.
솔이 질문했다.
“미리내야, 일본 다녀온 건 어떻게 됐어?”
한국에서 헌터 랭킹 대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미리내는 일본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3년 전 은가시나무 던전 레이드 때 참가했던 헌터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뭘 숨기려는지는 모르겠는데.”
미리내가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자꾸 만남을 피하더라고.”
레이드 때 생존한 헌터는 스무 명. 미리내가 만날 수 있었던 건 다섯 명뿐이었다.
도천 길드 정보부에서 조사하기로 스무 명 중 일곱 명은 도쿄 던전 브레이크 때 중상을 입어 은퇴했고 세 명은 실종, 나머지는 가끔 방송에도 모습을 비추며 활약하고 있었다.
미리내는 실종된 세 명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서 사사건건 방해를 했다.
“원래 일본이 그런 거에 있어서 폐쇄적이잖아.”
“걔네 진짜 이상해. 나카모리 케이코였나? 신녀로 한때 이름 날렸던 헌터. 걔 일본 정부에서 엄청 밀어 줬었는데 어느 순간 한 번에 훅 갔잖아. 이유는 아무도 모름.”
솔이 땅콩을 오도독오도독 씹었다. 미리내가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 줬다.
“실종된 세 명이 은새와 같은 현상을 겪었는지 알고 싶은데.”
“일단 계속 수소문하는 걸로 하자. 은새 저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어.”
우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동료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으, 목말라…….”
은새는 새벽에 깼다. 비척비척 거실로 나가자 어질러졌던 거실이 싹 정돈되어 있었다.
공기 중에 어렴풋하게 술 냄새가 떠도는 게 아마 동료들이 치우고 손님방 아무 데나 들어가 자는 듯싶었다.
은새가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병 뚜껑을 땄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들이켜고 뒤돌았을 때였다.
예민한 그녀의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
“아기야?”
은새는 화들짝 놀랐다. 아기 울음소리였다.
그녀는 더 이상 아기가 이곳에 없다는 걸 잊고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마수들이 소리가 나는 근원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기야!”
마수들 사이를 파헤치고 들어간 은새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진짜 아기였다. 고불고불한 하늘색 머리,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금색 눈.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기.
“왜 여기 있어? 아빠랑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잖아?”
“흐애앵, 흐애앵.”
“아이구 서러워, 뭐가 그렇게 서러워. 아빠가 또 혼자 뒀어? 그래서 누나한테 왔어?”
처음 온 그날처럼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은새가 안아서 토닥였다. 아기는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소란을 듣고 동료들이 밖으로 나왔다. 술 냄새를 풍기는 그들은 황당해했다.
“은새야, 아기가 왜 여기 있어? 집에 갔다며?”
“나도 몰라…….”
은새는 일단 아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불이 환하게 켜졌다.
“으아앙. 으앙.”
“아기야, 이제 괜찮아. 배고파? 배고파서 그래?”
은새는 미리내에게 아기를 맡기고 분유를 탔다. 아직 분유를 처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젖병을 입에 물려 주자 아기가 한에 사무친 것처럼 꿀꺽꿀꺽 마셨다. 분유를 먹으면서도 ‘흐으응, 흐으응’ 하고 서러운 숨을 내쉬었다.
“……아기가 가출했나?”
은새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솔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웃을 분위기가 아니란 걸 깨닫고 정색했다.
“곧 애 아빠가 쫓아오는 거 아냐?”
“근데 은새 잘못 아니잖아. 엄밀히 말해서 은새는 집 나온 아기를 보호한 거지.”
“애 아빠가 데려가도 계속 되돌아오면 어떡해?”
인찬의 마지막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은새는 아기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기 잔다.”
미리내가 작게 속삭였다. 분유를 거의 다 비운 아기의 눈이 가물가물했다.
우는 게 힘들었는지 아니면 세계를 넘어온 후유증인지 몰라도 아기는 금세 잠들었다. 은새는 아기를 침대에 눕혔다.
“아가야…….”
그렇게 헤어져서 너무 속상했다. 그런데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은새는 눈물을 꾹 참고 거실로 갔다. 솔이 손톱을 질겅질겅 씹으며 다리를 떨었다.
“애 아빠가 와서 행패 부리는 거 아냐?”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순진하기는! 괜히 꼬투리 잡아서 그럴 수 있어.”
솔은 드래곤 그거 강하냐며, 우리가 잡아 버리자고 주장했다. 이러다 가만히 있던 애 아빠를 잡을 것 같아서 은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잘 말해 볼게. 너희는 얼른 들어가서 자.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하잖아.”
“지금 잠이 와?”
“그래, 늦었는데 은새 너도 일찍 자.”
“응.”
“아니, 다들 왜 그렇게 천하태평이야?”
미리내가 솔을 질질 끌고 손님방으로 갔다. 우리와 인찬이 은새의 머리와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은새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거실에서 생각했다.
***
은새가 생각한 건 ‘아기를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가?’였다.
아기를 대하는 벨키오르의 태도. 숨넘어갈 듯이 울며 되돌아온 아기.
주제넘은 참견일 수 있었다. 종족이 다르니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말은 해 볼 수 있지 않은가.
‘좋아.’
은새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되든 안 되든 그와 얘기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벨키오르가 오길 기다렸다.
[아~ 김유하 헌터! 골드스타 길드의 강희수 헌터를 압도합니다!]
티브이 화면에서 유하가 높게 뛰어오르며 빛의 화살을 쏘아 대는 장면이 송출되었다.
유하는 궁수라 근접전에서 불리했지만 각종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조금 전에도 강희수 헌터가 오러를 담은 검을 내지르자 활대로 막았다.
그가 들고 다니는 활은 S-급 던전을 공략하고 보상으로 나온 것이라 특별했다.
유하가 활대를 주축으로 삼아 공중에서 돌았다. 퍼억! 강한 발차기에 강희수 헌터가 멀리 날아갔다.
그 순간 번쩍!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번개가 창밖을 하얗게 물들였다.
‘왔다.’
은새는 벨키오르를 맞을 준비를 했다.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깥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똑똑.
마당이 반파되었던 첫 방문 때와는 달리 상당히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술렁거리는 마수들을 진정시키고 은새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기 아버님.”
은새는 하마터면 헉 소리를 낼 뻔했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외모였다.
그녀는 절로 붉어지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내 아들이 여기에 있나?”
“네. 그런데 잠깐 얘기 가능하세요?”
벨키오르가 은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은새는 과하지 않게 웃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로 향하며 은새가 말했다.
“아기는 제 마수들이 돌봐 주고 있어요.”
그녀와 마찬가지로 인사 한 마디 못 한 채 아기를 보내야 했던 쪼쪼와 백합이, 황새가 아기 곁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하늘이와 민들레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벨키오르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그가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저…… 아기에게 잘 대해 주실 수는 없나요?”
무슨 뜻인지 몰라 벨키오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은새는 쪼그라들려는 어깨를 억지로 폈다.
“드래곤은 혼자 큰다고 하셨지만 제가 본 아기는 보살핌이 많이 필요해요. 저희 집에 있을 때 아기는 보통 아기와 똑같았어요. 배고프면 울고, 기분 좋을 때 웃고, 씻겨 줘야 하고.”
“…….”
“음, 음.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는데 아기에게 조금쯤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게 어떨까요? 애정 어린 손길이라든가 이름을 불러 준다거나.”
벨키오르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살아남을 환경은 충분히 마련해 줬다고 생각한다만.”
“그러니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할까요.”
은새는 벨키오르의 눈치를 봤다. 역시 그는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종족이 달라 생기는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벨키오르는 은새에게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 은새는 안도했다. 그녀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저, 아기를 꼭 데려가셔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