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특별 외전 3
부부의 시간
“괜찮아?”
태성의 물음에 서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몰라요. 너무 놀랐나 봐.”
“안마해줄까?”
“아니. 안아줘요.”
서현은 돌아서서 태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속상해요.”
서현이 투정을 부리자, 태성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애들 두고 우리끼리 나갔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까… 애한테도 미안하고, 어머님, 아버님께도 미안하단 말이에요.”
태성은 서현의 이마와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위로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자책하지도 말고. 애들 키우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이 얼마나 더 많겠어? 남자애야. 앞으로 놀랄 일 더 많을 거라고.”
“휴….”
어째 서현의 한숨이 더 깊어지자, 태성은 그녀를 타일렀다.
“앞으로 이런 일 없게 조심시키고 가르치자. 그게 우리 할 일이잖아. 나도 더 신경 쓸게.”
“알았어요… 근데 나….”
“응?”
“애들 맡기고 다니는 건 아무래도 당분간 자제하고 싶어요. 더 크고 나서 우리 시간 가지면 안 돼요?”
“돼. 안 될 게 뭐가 있어. 당신 마음 편한 게 중요하지. 그래, 그러자.”
“고마워요.”
“고맙긴….”
서현의 걱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기에 태성은 의견이 달랐지만, 우선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부부의 시간은 갖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 * *
“어머니, 저희 왔어요.”
서현은 태오와 지오를 데리고 숙영과 이 회장이 운영하는 카페를 찾았다.
소담하고 아기자기한 내부와 조경이 예쁘게 꾸며진 외부가 멋스러운 한옥 카페는 숙영과 이 회장의 손길로 나날이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카페에 자주 와 본 태오와 지오는 익숙하게 정원으로 향했고, 서현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제가 뭐 도울 건 없어요?”
주방으로 들어선 서현을 발견한 숙영은 그녀를 말렸다.
“아이고, 손님! 주방에 들어오지 말라니까.”
“손님이라뇨, 제가 왜 손님이에요?”
서현은 뭐라도 도우려고 했지만, 숙영은 한사코 거절했다.
“손님이지. 얼른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안 그래도 너 요즘 많이 피곤해한다고 태성이가 걱정하더라.”
“태오 아빠가요?”
“그래. 요즘 많이 힘들어?”
“아뇨, 괜찮아요.”
“보약 좀 지었어. 이따가 갈 때 가져가.”
“저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도 가져가. 건강 챙겨서 나쁠 거 뭐 있니? 그리고 너 힘든 거 다 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도 힘들 걸 알아주니 서현은 감동이 밀려와 숙영의 팔을 껴안고 기댔다.
“감사해요, 어머니….”
“감사는 무슨. 고마워하려면 네 남편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앉으나 서나 네 생각뿐이다, 걔가. 너 좀 잘 챙겨주라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는지.”
“죄송해요.”
“죄송하긴, 잘 사는 모습 보기 좋구만. 그리고 네가 우리한테 좀 잘해?”
“제가 뭘요….”
“세상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디 있니? 내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카페 일로 바빠서 신경을 못 썼어. 애 키우랴, 일 하느랴, 힘들지? 내 일까지 떠맡아서….”
“어머니, 저 진짜 괜찮아요. 애 아빠가 어머니한테 괜히 더 엄살 부린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암튼 네 걱정 많이 하더라. 태성이가.”
서현은 불현듯 요즘 태성에게 피곤한 내색을 많이 했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태성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얘기만 했지, 그의 얘기를 들어준 지도 오래됐고, 사랑을 나눈 지도 꽤 오래됐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심지어 매일 힘들다는 핑계로 그의 챙김만 받고, 밤마다 그를 밀어냈던 기억만 떠오르니 미안함이 들었다.
태성 씨 지금 어디 있지?
오늘도 전화 한 통 안 했네….
심지어 부재중 전화에도 응답을 안 했다는 게 떠오르자, 서현은 아차 싶었다.
난 정말 왜 이러지?
너무 내 생각만 했잖아….
혼자 반성의 시간을 갖느라 생각에 잠겼던 서현은 숙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아빠 모시고 들어오라고. 정원에 나간 지 꽤 됐거든.”
“아, 네.”
“새로 개발한 주스 시음회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들어오시라고 해.”
“네.”
서현은 정원을 가꾸고 있는 이 회장에게로 다가갔다.
“아버님, 저 왔어요.”
“그래. 왔어? 태오랑 지오는 한바탕 왔다 갔다. 어찌나 빠른지 그새 사라졌어.”
“갈 곳 뻔하죠, 뭐.”
태오와 지오는 카페 정원 구석에 자기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카페만 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인사만 하고 아지트로 향했다.
아이들의 꺄르르 웃는 소리가 정원에 퍼지자, 서현과 이 회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가 요즘 우리 강아지들 때문에 더 웃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러니까요. 얼마나 활발한지 몰라요. 태성 씨도 어릴 때 그랬어요?”
“그럼. 더 했지.”
그때였다.
“저는 얌전했죠.”
태성이 연락도 없이 등장하자, 서현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와요?”
“전화 안 받은 사람이 누구더라?”
“아….”
서현이 미안함에 멋쩍은 미소를 짓자, 태성은 괜찮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언제 왔어?”
“좀 전에요.”
서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태성은 이 회장을 바라봤다.
“저 왔어요.”
“안다. 네 엄마가 연락했냐?”
“네. 시음회 있다고요.”
“그것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이 사람 있다고 해서 왔죠. 요즘 저도, 이 사람도, 서로 바빠서 얼굴 자주 못 보거든요. 근데 이건 다 뭐예요?”
“꽃.”
이 회장의 옆으로 쭉 놓여 있는 수많은 모종을 보고 서현은 혀를 내둘렀다.
“아버님, 이 많은 걸 혼자 다 심고 계셨던 거예요?”
“어제 등산 다녀오는 길에 화원이 있어서 들렀는데, 할망구가 이거저거 다 고르는 바람에 이렇게 고생이지 뭐냐.”
“절 부르시죠.”
“됐어. 금방 해. 하다 보니까 재미도 있고.”
“그래도 다음에는 저 부르세요.”
태성이 도와주겠다는 게 내심 기분 좋았던 이 회장은 힐끔 눈치를 살폈다.
“그럼 이따가 도와줄래?”
“네, 그럴게요.”
“저도 도울게요, 아버님.”
“당신까지 할 필요는 없고.”
행여 서현이 일할까 봐 딱 잘라 말하는 태성을 보며 이 회장은 피식 웃었다.
“안 부려먹는다, 이놈아!”
이 회장의 장난에 민망해진 서현이 태성을 툭 건드렸다.
“왜 그래요?”
“볕 뜨거우니까 얼른 들어가. 내가 애들 데리고 들어갈게.”
태성이 서현을 챙기자, 이 회장은 괜한 심통을 부렸다.
“볕에 땀 뻘뻘 흘리는 네 아비는 안 보이냐?”
“재미있으시다면서요?”
이 회장이 눈을 부릅뜨자, 태성은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밀었다.
“아버지도 얼른 들어가서 잠깐 쉬세요. 나머지는 이따 저랑 하시고.”
“됐다, 이놈아!”
“얼른 들어가세요.”
그때였다.
“왜 안 들어와요?”
숙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 회장이 소리쳤다.
“지금 들어가!”
이 회장은 무뚝뚝하게 답했지만,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면서 히죽거렸다.
“네 엄마, 또 시작이다. 뭘 또 개발을 했는지, 며칠 전부터 기대를 하라고 유난을… 그렇게 좋을까?”
“좋아하시니까 좋잖아요.”
“애 같아 아주. 귀여워 죽겠어.”
“네?”
태성은 잘못 들었나 싶어 제 귀를 의심했지만, 이 회장이 다시 쐐기를 박았다.
“귀엽잖아, 네 엄마.”
태성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발언을 던진 이 회장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태성이 얼음이 된 채 서 있자, 서현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안 들어가요?”
“지금 뭐라고 하신 거야?”
“당신, 아버님 닮았어요. 얼굴만 닮은 게 아니었다니까.”
서현에게 온갖 애정 어린 말들을 내뱉을 때는 언제고, 이 회장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태성은 소름이 돋았다.
* * *
시음회가 끝난 후, 저녁까지 같이 먹고 집에 들어오는 길, 태오와 지오는 차에서 잠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태성과 서현은 잠든 아이들을 한 명씩 맡아 방에 눕히고 나왔다.
“태오가 제법 무거워졌어.”
“저는 이제 못 들어요.”
“고생했어.”
“고생은요. 놀았는데.”
“그래도. 오늘은 어떻게 시간 냈어? 무리한 거 아니야?”
“며칠 전부터 어머님께서 얘기하신 날이니까 미리 스케줄 빼놨죠. 난 당신 바쁠까 봐 말 안 한 건데….”
“바빠도 당신이랑 시간 보내는 거면 빼야지.”
“미안해요. 미리 말 안 해서.”
“괜찮아.”
태성은 괜찮다며 욕실로 향했고, 서현도 다른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서현은 빼꼼히 문을 열고 방을 살폈다.
침대에 있어야 할 태성이 없자, 서현은 욕실에서 나와 그를 찾았다.
“어디 갔지?”
방을 나와 여기저기 기웃대던 서현은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저기 있나?”
태성은 집으로 일을 가져오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현은 그가 이 시간까지 서재에 있는 게 조금 어색했다.
“일이 그렇게 많나?”
무슨 일인가 싶어 서현은 서재 문을 두드렸다.
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