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추가 외전 11화
야한 생각
“그럼, 저 혼자 먹고 올게요. 저 퇴근 중이었거든요. 다시 근무 연장하려면 저녁을 먹어야 해서요. 저는 직원이라서 근무시간 지키듯이 점심시간, 저녁 시간을 꼭 지킨답니다. 그럼 이만….”
“같이 가죠.”
저 여자가 언제 밥을 다 먹을지 알고,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도 고팠고.
민혁은 성 팀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차 타고 가는 건가요?”
“네.”
“그냥 근처에서 먹으면 안 될까요? 제가 집이 이 근처라서… 밥 먹다가 얘기가 끝나면 그냥 집으로 바로 가게요. 어차피 퇴근도 찍었거든요.”
“아….”
뭐지? 이 여자?
저 세상 쿨함을 가진 성 팀장을 보며, 민혁은 살짝 기가 눌리는 듯했다.
성 팀장은 별 신경 안 쓴다는 듯 익숙한 식당으로 자리했다.
“제가 자주 오는 식당인데 맛있어요.”
성 팀장은 손을 들어 주문했다.
“이모님, 여기 국밥 두 개랑 깍두기 국물 많이요.”
“저 아직 메뉴 안 골랐습니다.”
민혁이 미간을 좁히자, 성 팀장이 입을 가리고 작게 속삭였다.
“여긴 국밥만 맛있어요. 깍두기랑.”
“아….”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국밥만 먹고 있는 게 보였다.
민혁이 조금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때였다.
성 팀장이 물을 따라주면서 좀 전에 하던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작품 전시하는 곳에서 연주를 하면 어떤 게 문제인 거예요? 아무래도 음향 시설이 문제인 건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전시관에서 연주를 하면 돌아다니면서 작품을 보며 연주를 듣게 되는 걸 텐데,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저희 아티스트한테는 CD를 틀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죠.”
“그럼, 이건 어때요?”
“연주가 시작될 때는 스크린으로 작품을 보여주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그 여운을 품고 전시된 작품관으로 향하는 거죠. 그때, 그 칸마다 작품이 있는 곳에 그 음악을 CD로 트는 거죠.”
“아, 두 번 감상하게 한다?”
“그렇죠. 그건 괜찮아요?”
이때, 식탁에 국밥이 차려지고, 성 팀장은 어느새 음식에 집중했다.
성 팀장은 갖가지 양념 키트를 끌고 와서는 국밥에 넣기 시작했다.
“후추 뿌리실래요?”
“네, 뭐.”
후추를 뿌리고.
“청양고추 넣으실래요?”
“아뇨.”
“조금 넣는 게 맛있어요. 조금만 넣으세요.”
“그럼 몇 개만.”
싫다고 해도 어차피 청양고추를 넣게 만들었고.
“양념장은요?”
“저는 됐습니다.”
“저 믿어보세요. 여긴 양념장 넣어야 맛있어요.”
“그럼… 조금만.”
결국 양념장도 넣게 만드는 성 팀장이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보는 거지?
결론적으로는 성 팀장과 같은 레시피로 제조가 된 국밥이었다.
“드세요.”
“네, 드세요.”
동시에 한술 뜨는데, 성 팀장은 만족의 미소를 지었고, 민혁은… 꽤 괜찮은 맛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입맛에 맞으시나 봐요.”
성 팀장이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하자, 민혁은 조금 머쓱해졌다.
“뭐, 괜찮네요.”
“이렇게 드시다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는 깍두기 국물도 살짝 부어서 드셔보세요. 그럼 또 맛이 달라져요.”
그러면서 성 팀장이 엄지척을 하는데, 민혁이 특이한 걸 보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뭘 섞는 걸 참 좋아하시네요?”
“제가 그런가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끼리 국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게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는 게 또 이상했다.
“아까 그 의견 좋은 것 같습니다. 작가님도 저희 아티스트도 좋아할 것 같은 컨셉인 것 같고. 그럴 만한 장소는 있으니까 그런 의견을 주신 거겠죠?”
“물론이죠.”
“그럼, 음향 알아보겠습니다.”
“생각보다 얘기가 빨리 끝났네요. 그냥 퇴근해야겠다.”
“퇴근하시는데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해결하고 나니까 후련하네요. 그런 의미로 소주 한 병 시켜도 될까요?”
“네?”
“여기 국밥이 소주랑 같이 먹어야 맛있거든요.”
“도대체 이 국밥을 맛있게 먹는 법이 몇 가지나 되는 겁니까?”
“드셔보세요.”
“저는 됐….”
민혁이 거절하기도 전에 먼저 주문을 하는 성 팀장이었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하나요.”
“저는 됐다고….”
“원래 거절 자주 하세요?”
“네?”
“뭐 싫은 게 많으시길래.”
“그러는 그쪽은 원래 그렇게 다 좋습니까?”
“그래 보여요?”
“네.”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민혁은 성 팀장을 흥미롭게 바라봤고, 두 사람의 눈빛은 어느새 같아졌다.
* * *
- 엄마, 나 할아버지, 할머니랑 자고 내일 갈게.
“또?”
- 할머니 바꿔줄게.
“여보세요? 태오야.”
그사이 숙영이 전화를 바꿨다.
- 아가, 오늘 태오 여기서 재울 테니까 내일 주말이고 한데 밥 먹으러 올래? 그때 데리고 가는 거 어때?
“어머님, 안 힘드세요?”
- 힘들긴. 입덧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는데 오랜만에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쉬어라. 주말에 맛있는 거 해놓을 테니까 와서 저녁 먹고.
“감사합니다, 어머니.”
- 감사는 무슨. 푹 쉬어라.
“네, 알겠습니다. 주말에 뵐게요.”
숙영의 배려에 절로 미소가 나는 서현이었다.
전화를 끊은 서현은 레몬차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입덧에 좋다고 해서 태성이 직접 만들어 준 레몬차였다.
직접 일일이 닦고 자르고 레몬청을 담그던 태성이 떠올라 서현은 미소를 지었다.
라면도 못 끓이던 사람이 이젠 레몬청까지 담그다니….
조금 유난이긴 해도, 그런 그가 좋았다. 그만큼 사랑받고 있는 것만 같아서.
임신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니 입덧도 많이 나아지고, 기운도 좀 생기는 게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태오 가졌을 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몰랐지,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다는 게 떠오르자 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는 아시안 마켓에 가서 산 라면, 그것도 국물만 겨우 먹으면서 버텼었는데….
서현은 이번엔 숙영이 가져다준 고기 국물로 버텼었다. 거기에 순애의 양념장을 넣으면 딱 먹기 좋게 얼큰해져서 그걸 조금씩 마시면서 입덧을 버틸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는 모든 걸 혼자 했었는데,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거였다.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그때였다.
누군가 허리를 감싸 안는데, 풍겨오는 향과 품이 너무 익숙해 서현은 미소를 지었다.
“뭐 하고 있었어?”
태성이었다.
서현은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라서 애 떨어지면 어쩌려고 이렇게 소리도 없이 나타나요?”
“당신 안 놀랐잖아.”
“조금 설레긴 했어요. 당신 향이 너무 좋아서.”
태성은 그대로 고개를 내려 서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레몬차 마시고 있었어?”
“네, 향 너무 좋아요.”
“달다. 당신 입술.”
태성이 다시 고개를 내려 서현의 입술을 좀 더 진하게 빨아 당겼다.
“태오 자고 온다며?”
“주말에 저녁 먹으러 오면서 태오 데리고 가라고… 매번 어머님, 아버님께 너무 신세 지는 거 같아서 미안해요.”
“좋아서 하시는데 뭐. 그리고 우리끼리 이렇게 오붓한 시간도 갖고 좋지.”
“태오 들으면 서운하겠다.”
“가끔인데 뭐. 저녁은?”
“나 스테이크 먹고 싶어.”
“뭐 먹고 싶다는 말 오랜만에 들어보는데? 좋네. 오랜만에 나가자. 근사한 곳에서 저녁 사줄게.”
* * *
태성은 전에 서현이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던 레스토랑으로 예약했다.
서현도 기억이 난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신이 났다.
“여기, 거기 맞죠?”
“당신이 맛있다고 했었잖아.”
“근데 다 못 먹고 일어났죠. 누구 때문에.”
“오늘은 실컷 먹어.”
“이상하다. 이곳에 당신이랑 이렇게 온 거….”
“나 또 괜히 여기 데리고 온 건가?”
“왜요?”
“또 마이너스인가 싶어서….”
“아뇨, 나 여기에서는 나쁜 기억 없어요. 돌이켜보면 당신과 함께했던 기억 중 딱히 나쁜 기억은 없긴 해요. 당신이 말만 좀 못되게 했지, 행동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괜히 데리고 온 것 같네.”
“아니에요. 나 여기 좋아.”
“그럼, 우리 오늘 여기 호텔에서 묵고 갈까? 그때 그 방으로?”
서현이 눈을 반짝이자, 태성이 미소 지었다.
곧 음식이 나오고, 서현은 조심스럽게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첫입이 괜찮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고, 첫입이 힘들면 오늘 식사는 실패인 거였다.
태성도 긴장하며 서현이 먹는 걸 지켜봤다.
서현이 곧잘 씹어 삼키자, 태성이 음료를 건넸다.
“어때? 먹을 만해?”
“응. 맛있어요. 입덧 괜찮은 거 같아.”
“다행이다. 많이 먹어.”
서현이 맛있게 먹자, 태성은 자기 스테이크도 잘라서 건넸다.
“더 먹어.”
“당신 먹어요.”
“아니야. 당신 먹는 거 보니까 배부르네.”
태성은 이제 아예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턱을 괸 채 서현이 먹는 것만 바라봤다.
“안 먹어요, 진짜?”
“당신 먹는 거 보는 게 더 좋은데? 그동안 못 먹는 거 보면서 속상했거든.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면서 태성은 서현의 앞으로 음식 접시를 옮겼다.
“뭐 더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이것도 너무 많아요.”
태성이 또 빤히 쳐다보자, 서현도 빤히 그를 쳐다봤다.
“당신 전에도 여기에서 음식 잘 안 먹고 나 먹는 것만 바라봤던 거 기억해요?”
“그랬나?”
“지금은 나 보면서 무슨 생각 해요?”
“뿌듯하다?”
“뿌듯?”
“당신이 잘 먹는 게 좋아서.”
서현은 태성의 대답이 조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변했어….”
“응?”
“당신 그땐 야한 생각했었잖아요. 이젠 나보고 그런 생각 안 드는 거예요?”
그 말에 태성은 하마터면 소리를 내서 웃을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장서현….”
“왜 웃어요?”
“내가 당신 보고 야한 생각 했으면 좋겠어?”
“아니, 그렇다기보다….”
잠시 머뭇대더니, 서현은 서운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네. 좀 그래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지금 부성애로 억누르고 있는 거니까.”
“네?”
“여태 아무것도 못 먹으면서 고생한 거 다 아는데, 야한 생각만 하는 못된 남편, 못된 아빠이고 싶진 않거든. 그리고 우선 먹여야 잡아먹지.”
“……?”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린 줄 당신도 알잖아. 야한 거 억누르는 중이니까 많이 먹어둬.”
야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놓고, 막상 또 그 순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떨리는 서현이었다.
“나 임신 중인 거 잊지 말아요.”
“잊을 리가….”
“나 왜 떨리지?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나도 그래. 당신 보면 늘. 얼른 올라가자. 더는 참기가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