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추가 외전 6화
살살 좀 해요
“어? 어? 어? 어어어어어!”
잠꼬대를 하던 숙영은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이 회장도 덩달아 놀라서는 눈을 떴다.
“왜 그래?”
“헉… 헉….”
숙영이 상체를 일으키고 가쁜 숨을 몰아쉬자, 이 회장도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괘, 괜찮아요. 여보, 나 물.”
이 회장은 협탁 위에 있는 물을 따라 숙영에게 건넸다.
“왜 그래? 무슨 꿈이라도 꿨어?”
물을 벌컥벌컥 마신 숙영은 숨을 한 번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숙영이 여전히 멍한 채 말을 잇지 못하자, 이 회장은 태오를 확인했다.
“어떤 꿈인지 몰라도 태오 깰 뻔했네.”
이 회장이 숙영의 손에서 물잔을 뺏어 협탁 위에 놓았다.
“얼른 자. 아직 아침 되려면 멀었으니까.”
이 회장이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숙영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불렀다.
“여보.”
“왜?”
“나 태몽 꾼 거 같아.”
“뭐?”
“아니 꿈속에서 정말 이만한 용이, 엄청나게 커다란 용이 집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누구 집으로?”
“애들 집에요. 내가 애들 집에서 태오랑 놀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 용이 서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서현이 옷 속으로 막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고 깼어요.”
“개꿈 아냐?”
“개가 아니라 용이었다니까 그러네. 용꿈은 태몽이거든요?”
“그래? 애들 좋은 소식 있으려나?”
“그러게요. 우리 태오 동생 생기려나?”
이 회장은 곤히 자고 있는 태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럼 우리 태오는 좋겠네.”
“진짜면 좋겠다. 그렇죠, 여보?”
“생기면야 좋지.”
숙영은 태오의 손을 쓰다듬었다.
“아이고, 이 예쁜 것. 둘째는 또 얼마나 예쁠 거야… 안 그래요, 여보?”
“그럼.”
“아, 여보!”
“왜?”
“애들한테는 태몽 얘기하지 말아요.”
“안 하지, 이 사람아.”
“절대 하지 말아요. 부담 주는 거 같으니까.”
“알겠으니까 걱정 말고 얼른 자. 우리 말소리 때문에 태오 깨겠어.”
“알겠어요.”
숙영은 다시 자리에 누워서도 좀 전의 생생했던 꿈이 또 떠올라 한동안 잠을 청하지 못했다.
* * *
“태성 씨… 하아….”
뭐라도 잡고 버텨야 할 것 같은 힘이었다.
태성은 행여 서현이 머리를 부딪힐까 봐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막았다.
멈출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아래에서 한껏 흐트러진 채 느끼고 있는 서현의 모습에 태성은 취해가고 있었다.
더는 못 견디겠는지 서현이 태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서현의 격한 떨림이 느껴졌지만, 태성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움직임에 서현은 울음과도 가까운 신음을 질렀다.
잠시 후, 욕망을 쏟아낸 태성은 연신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감당이 안 되는 듯, 어쩌질 못해 이렇게라도 입을 맞추는 듯.
그제야 숨을 고른 서현이 태성을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사랑해.”
태성의 입술이 사랑이란 말을 내뱉는 서현의 달콤한 입술에 내려앉았다.
이미 물고 빨아서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어르고 달래듯 태성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러다가 또.
“……!”
놀란 서현이 입술을 떼고 그를 바라보자, 태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살살 할게.”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어떡해….”
서현이 침대 시트를 꽉 쥐자, 태성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몸을 붙여오는 태성의 기분 좋은 압박감은 서현을 또 절정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 * *
“살살 좀 해요.”
“살살하고 있어.”
숙영은 발목 다쳤다는 걸 핑계 삼아 이번 기회에 이 회장을 제대로 부려 먹을 심산으로 머리까지 감기게 하고 있었다.
숙영의 머리를 감기던 이 회장은 갑자기 억울하단 생각이 들어서 허리를 들었다.
“아이고, 허리야.”
“눈 매우니까 빨리해요.”
“아니, 다친 건 발목인데 내가 왜 머리를 감겨줘야 해?”
“그건….”
숙영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이 회장이 큰소리를 쳤다.
“이 봐, 당신 혼자 할 수 있지? 혼자 해.”
이 회장이 손을 씻고 나가려고 하자, 숙영이 붙잡았다.
“안 돼요.”
“왜?”
“발목이 아파서 내가 뭐라도 잡고 있어야 서 있을 수 있는데, 손이 모자라잖아요. 손이.”
“……?”
“내 손이 세 개에요, 네 개예요?”
“하… 허리 아파 죽겠어.”
이 회장이 넘어온 거 같자, 이번엔 숙영이 큰소리를 쳤다.
“나는 눈 매워 죽겠으니까 얼른 해요.”
이 회장은 투덜대면서도 다시 숙영의 머리를 감겼다.
“늙어도 머리숱은 많네.”
“복 받은 줄 알아요.”
“이게 왜 내 복이야? 당신 복이지.”
“예쁜 아내 둔 당신 복이지.”
잘난 척을 하는 숙영의 눈에 이 회장이 일부러 거품을 얹었다.
“아, 눈….”
“입에도 바르기 전에 조용히 해.”
숙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머리를 다 감고 나온 숙영을 향해 태오가 드라이기를 내밀었다.
“할머니, 이거 필요하죠?”
“아이고, 우리 태오 똑똑하네.”
“이거 받으세요.”
태오가 드라이기를 내밀자, 숙영이 이 회장을 바라봤다.
“뭐 해요? 안 받고?”
“뭐?”
“머리 안 말려줘요?”
“이건 당신이 할 수 있잖아.”
“아, 발목이야….”
“갑자기?”
“아까부터 아팠어요. 손으로 발목을 좀 잡고 있어야지 아파서 못 살겠네.”
엄살을 떨면서 소파에 앉은 숙영은 두 손으로 발목을 잡았다.
그런 숙영을 보면서 이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난은….”
그러면서도 못 이기는 척 또 시키는 대로 하는 이 회장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바람 너무 뜨거워요. 찬바람으로 해줘요. 머릿결 상하니까.”
바라는 것도 많은 숙영이었지만, 이 회장은 투덜대면서도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숙영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고, 이 회장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안 보이게 미소를 지었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거. 이 회장도 꽤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 * *
냉장고 문이 닫히고, 태성은 재료를 한가득 안고 돌아섰다.
조리대 위에 재료를 내려놓은 태성은 앞치마를 꺼내서 착용했다.
이때, 태오가 다가왔다.
“아빠, 나도 도우면 안 돼?”
“불 가까이 오면 안 되는데….”
“아빠, 나도 요리할래.”
태성은 태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아, 그럼 태오는 삶은 달걀 껍데기 깔까?”
“네!”
태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생겼다는 것이 기뻐 기합이 잔뜩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우리 태오 손 씻고 오자. 요리는 청결하게 해야지.”
“알았어, 아빠.”
태오는 얼른 욕실로 달려가서 손을 씻었고, 태성은 능숙하게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전에는 라면 하나도 못 끓여서 쩔쩔매던 태성이었지만, 서현이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요리를 배운 덕에 이렇게 자주 요리를 하곤 했다.
요리는 도우미가 하면 됐지만, 이렇게 서현과 태오에게 요리를 해줄 때의 행복을 알아버린 태성이었다.
전에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게 다 언젠가 돌아올 서현을 위해 배워둔 요리였다. 근데 아들까지 해주게 될 줄이야.
요리를 배우고 나니 태성은 이제 안 배운 요리들도 제법 그 맛을 흉내 낼 줄 아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오늘의 메뉴는 떡볶이.
태성이 한 요리 중에서 서현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떡볶이였다.
서현이 먹을 거는 조금 맵게 만들고, 태오가 먹을 건 케찹을 넣어 달콤하게 만들 정도로 요리 센스도 생긴 태성이었다.
태성은 다 삶아진 달걀을 찬물에 담가 태오에게 건넸다.
“아들, 부탁해.”
“네! 네!”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신이 난 태오는 고개를 흔들며 달걀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다.
“태오야, 엄마 오기 전에 만들어야 되니까 서둘러.”
“응, 알았어. 아빠.”
그때였다.
“나 왔어요.”
주방으로 들어오는 서현을 보고 태성과 태오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
“엄마!”
서현은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찍 들어왔어요. 나 좀 누울게요.”
서현이 안방으로 향하자, 태성이 그녀를 따라갔다.
“태오야, 하던 거 하고 있어.”
“응.”
서현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태성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태성이 서현의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했다.
“열나는데? 병원 가자, 서현아.”
태성이 외출 준비를 하려고 하자, 서현이 말렸다.
“나 그냥 좀 누워 있고 싶어요.”
“그럼 의사 부를 테니까 누워있어.”
“네….”
서현이 옷 갈아입는 동안 의사를 부른 태성은 다시 한번 열을 체크했다.
“진짜 열이 있네… 많이 아파?”
“그냥 좀 어지러운 정도? 나 좀 잘게요.”
“그래.”
침대에 누웠는데도 태성이 나갈 생각을 안 하자, 서현이 그를 밀었다.
“태오 밖에 혼자 있잖아요. 나 괜찮으니까 나가봐요.”
태성이 속상한 얼굴로 손을 꼭 잡아주자 서현이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나 죽을병 걸린 줄 알겠네.”
“그럼 안 되지.”
“그래요, 죽을병 걸린 거 아니니까 태오한테 가봐요. 나 잘래.”
“조금만 기다려. 주치의 올 테니까.”
“네.”
서현이 눈을 감자, 태성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