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추가 외전 4화
왜 안 생겼지?
“당신 그 짧은 다리로 뛸 수 있겠어?”
이 회장의 도발에 숙영은 발끈했다.
“내 다리가 어디가 짧아요? 태성이가 누구 닮아서 다리가 긴 건데! 그리고 태성이가 왜 당신을 닮아서 달리기가 빠르다는 거예요? 날 닮은 거지.”
“아, 그러셔?”
“그럼요.”
“잘 따라오기나 해.”
“당신이야말로 잘해요.”
어느새 또 티격태격하는 이 회장과 숙영을 보고, 태오는 입을 삐쭉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좋게 해야 해요.”
“알고 있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태오를 사이에 두고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이 회장과 숙영이었다.
잠시 후, 서현까지 운동회에 참석을 하고,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는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엄마, 나도 나가고 싶어.”
“태오는 동생이 없어서 안 돼.”
“아빠는 거짓말쟁이. 동생 데리고 온다며!”
동생들과 함께하는 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된 태오는 결국 입이 삐쭉 나와서는 이 회장의 품에 안겼다.
“넌….”
이 회장이 태성을 찌릿 째려봤다.
그러고는 혀를 끌끌 차는데, 태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서현이가 바빠서 잠깐 미룬 겁니다.”
“누가 뭐래?”
이 회장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이 말을 하는 듯했다.
태성에게는 아주 자존심 상하는 말.
이때, 숙영이 서현의 눈치를 보며 이 회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만 해요. 너무 부부 사이가 좋아도 질투해서 안 생긴다고 하던데… 어련히 때 되면 생길까… 부담 갖지 말아라. 우린 태오 하나도 너무 감사한데, 태오가 자꾸 이렇게 동생, 동생 떼를 쓰니까….”
“알아요, 어머니. 저 정말 괜찮아요.”
서현은 괜찮다고 하는데, 이 회장이 태성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보약 지어주랴?”
“아버지… 괜찮습니다. 너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필요하면 말하고.”
신혼여행에서 허니문 베이비가 생기지 않아 태오가 단단히 삐쳤던 것만 생각하면… 게다가 이 회장은 그 이후로 태성을 좀 시원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전혀 그게 아니건만….
아직도 의문이었다. 신혼여행에서 왜 안 생겼는지….
이젠 서현의 일이 또 바빠져서 둘째를 갖는 건 잠시 미룬 상태였다.
바쁜 일만 끝나면 다시 노력하기로 했는데,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태오는 동생 얘기만 나오면 입을 삐쭉 내밀기 바빴다.
동생들과 달리고 있는 친구들을 부럽게 바라보던 태오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하는 3인 4각 경기가 시작된다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차례에요.”
태오가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붙잡고 선수 대기석으로 가자, 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둘째를 낳아야지, 안 되겠네. 그러니까 시간 좀 내주시죠, 장서현 씨.”
요즘 스케줄이 많아서 집에 오면 곯아떨어지기 바쁜 서현이었다.
덕분에 태성은 며칠째, 독수공방 신세였다.
이미 태성이 서운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소리까지 듣게 하니 서현은 조금 미안해졌다.
“바빠서 그랬어요, 미안. 이제 바쁜 일 거의 끝났어요.”
서현이 팔짱을 끼며 품으로 파고들자, 태성이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내려봤다.
“시간만 내주면 둘째가 뭐야. 축구팀을 만들 수도 있는데.”
“어머, 미쳤나 봐.”
“축구팀은 너무했고, 농구팀 정도는 만들어볼까? 오늘 밤부터?”
“어머, 누가 들어요.”
서현은 주위를 살피고는 태성의 팔을 때렸다.
“응원이나 해요, 응원.”
드디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하는 3인 4각 달리기 대회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파이팅!”
서현이 파이팅을 외치자, 태오를 가운데에 두고 다리를 묶은 이 회장과 숙영이 출발선에 서서 파이팅을 외쳤다.
“파이팅!”
태오는 긴장을 했는지, 서현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고사리손으로 이 회장과 숙영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 작은 손에서 땀이 나는 게 느껴지자, 이 회장과 숙영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탕!
출발 신호음이 울리고, 드디어 시작된 3인 4각 달리기 대회.
“태오야, 한 발, 한 발, 한 발, 한 발.”
이 회장의 구호에 맞춰 최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가족이었다.
이 회장과 숙영, 그리고 태오는 어느새 반환점을 돌아서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서현도, 태성도 긴장이 되었다.
“어머님, 아버님, 왜 저렇게 잘하세요?”
“아니, 저렇게 열심히 하신다고?”
태성은 이 회장과 숙영이 너무 열심히 하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진심으로 행복해하시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1등 할 거 같아요.”
“1등은 우리 거다.”
“그럼요!”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던 태오와 이 회장, 숙영이 드디어 1등으로 골인!
“우와, 아버님, 어머님! 태오야!”
서현이 그들을 향해 달려갔고, 태성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승리가 기뻤던 숙영이 흥분을 못 감추고 태오의 손과 이 회장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다가 그만….
“악!”
“여보!”
스텝이 꼬인 숙영이 넘어지려 하자, 이 회장이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준다는 게 그만… 숙영이 이 회장의 위로 철퍼덕!
태오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다치진 않았는데, 숙영과 이 회장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자세를 연출하고 말았다.
“……?”
“……!”
“할아버지, 할머니, 뭐 하는 거예요?”
태오가 얼굴을 가릴 정도로 민망한 자세를 연출한 두 사람이었다.
얼마 안 있어 창피함이 밀려온 숙영이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칠 때마다 이 회장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윽, 헉, 악, 으.”
태오는 이 회장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장난을 치는 줄 알고 키득댔고, 태성은 등을 돌려 모르는 척했다.
서현이 얼른 달려가서 그들의 발에 끼워져 있는 고리를 뺐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태오야?”
태오는 발을 빼자마자 웃긴다면서 태성에게 달려갔다.
“아빠, 할아버지랑 할머니 봐.”
태성은 태오를 안고 돌아섰다.
“태오야, 우리 잠깐만 어디 좀 가자.”
“응?”
서현의 도움으로 발이 풀린 숙영은 그제야 제대로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피신을 했고, 이 회장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뒤늦게 달려온 방 실장과 고 비서가 이 회장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사진.”
“네?”
“파파라치 사진부터 확인해. 사진!”
이게 무슨 창피인가….
이 회장은 넘어졌을 때 마주친 숙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았다.
주책이지….
태오가 자고 갈 때만 숙영과 한 침대에서 자는 이 회장이었다.
평소에는 각방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런 야릇한 자세가 도대체 얼마 만인지….
저 여자가 왜 또 예뻐 보이는 거야… 내가 진짜 미쳤나?
* * *
“어머님,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살짝 삐끗한 건데 뭐.”
민망해서 도망치다가 발목을 삐끗하고만 숙영이었다.
결국 치료를 받은 숙영은 발에 깁스를 하게 되었다.
“이게 다 뭐람….”
여러 가지로 민망한 숙영이 고개도 못 들고 있는데, 이 회장이 놀리듯 말을 걸었다.
“꼼짝없이 집에만 있게 생겼구만?”
“그래서 좋아요? 웃지 말아요.”
숙영이 이 회장을 찌릿 째려보는데, 서현은 깁스를 한 숙영의 발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많이 불편하실 텐데… 정말 어떡해요?”
“괜찮아. 회장님이 다 시중들겠지, 뭐. 이 기회에 회장 시중도 받아보고 얼마나 좋니?”
이 회장이 ‘뭔 소리야?’라는 눈빛을 보내며 발끈했다.
“내가 왜?”
“그럼 누가 해요?”
“도우미 있잖아.”
“간병인이에요? 도우미한테 시키게?”
“그럼 간병인을 불러.”
“뭐 이런 걸로 불러요? 당신이 그냥 해요.”
“아니 이게 무슨….”
이때, 태오가 이 회장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할아버지, 내가 도와줄까요?”
“태오가?”
“네.”
“태오가 도와주면 할아버지야 고맙지.”
“그럼 제가 도와줄게요. 할머니, 뭐 필요해요? 내가 다 갖다줄게요.”
“아이고, 우리 손자. 효자네.”
의욕이 넘치는 태오를 보면서, 파스를 가져오던 태성이 미소를 지었다.
“아들, 이 파스, 할아버지랑 할머니께 붙여드릴까?”
“응.”
잠시 후, 집에 갈 때가 됐는데, 갑자기 태오가 이 회장의 손을 붙잡았다.
“엄마, 나 할아버지랑 할머니 간호해줘야 해서 집에 못 가.”
“응?”
서현이 뭔 소리인가 싶어 얼굴을 찡그렸지만, 태성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아들, 여기에서 잘래?”
“응.”
서현은 태오가 더 고집부리기 전에 말렸다.
“태오야, 할머니 아프시니까 나중에. 응?”
“내가 할머니 간호해 줘야 하는데….”
기특한 태오를 보며, 숙영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태오가 할머니 간호해 줄 거예요?”
“네.”
“그럼 자고 가. 태오가 간호해 주면 할머니가 더 빨리 나을 것 같네.”
“어머님… 태오 있으면 힘드실 텐데….”
“힘들긴, 태오 여기에서 재울 테니까, 너희도 피곤할 텐데 얼른 집에 가서 자.”
“그래도….”
이때, 이 회장이 태오를 무릎에 앉혔다.
“태오가 있고 싶다면 두고 가. 뭐 어떠냐?”
“엄마, 나 자고 갈래….”
태오의 간절한 눈빛에 서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태성이 손을 잡았다.
“가자. 태오 여기에서 자라고 하고. 나도 피곤해.”
“그래도….”
“괜찮대도….”
결국 태오를 놓고 집으로 가는 태성과 서현이었다.
* * *
운전을 하던 태성이 힐끔 서현을 바라봤다.
“우리 태오도 없는데 데이트할까?”
“데이트요?”
데이트라는 말에 서현이 눈을 반짝이자, 태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좋구나?”
“응, 좋아요. 근데 피곤하다면서요.”
“갑자기 안 피곤하네. 당신이랑 둘이 있으니까.”
서현이 좋아서 입술을 씰룩이자, 태성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디 가고 싶었던 곳 있었어?”
“음….”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서현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