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끌림 (87)화 (87/111)

87화

추가 외전 3화

당신의 팬

깊은 새벽, 잠을 자고 있던 태성이 옆자리의 썰렁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서현아….”

서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 새벽에 어딜 갔나 싶어 태성은 몸을 일으켰다.

깜깜한 거실 불을 켜고, 태성은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서현을 찾았다.

“설마….”

이렇게 찾아도 없으면 한군데밖에 없었다.

피아노 방.

문을 열자, 역시나 서현이 있었다.

“안 자고 뭐 해?”

멍하니 있던 서현은 태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깼어요?”

“응. 아까 급한 일 맡은 거, 그거 때문에 못 자는 거야?”

“네, 뭐…. 근데 나 때문에 깬 거예요?”

“아니. 나야말로 방해한 건가?”

“아뇨, 이리 와서 앉아요. 어차피 생각 안 나서 멍하게 있던 참이니까….”

태성은 서현이 앉아 있는 피아노 의자 옆에 앉았다.

“뭘 고민하기에 이래?”

태성이 허리를 감싸 안아주자, 서현이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나 머리 안 좋은가 봐.”

“왜?”

“작곡에 소질이 없는 건가?”

서현이 낙담해서 고개를 푹 숙이자, 태성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난 당신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난 당신이 만든 곡이 제일 좋거든.”

쪽-

태성이 격려와 함께 입을 맞춰주자, 서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거짓말.”

태성이 서현의 입술에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쪽-

“맹세코 당신이 작곡한 곡이 제일 좋아.”

“역시 내 편.”

“당신 팬이기도 하고.”

서현이 태성의 허리를 와락 껴안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당신만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문제야….”

“어디가 막혀서 그러는데?”

“거의 다 만들었는데… 좀 아쉬워서… 당신이 한 번 들어볼래요?”

“그래.”

태성은 음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서현이 곡을 들려줄 때마다 늘 진지하게 들어주곤 했었다.

이렇게 들어주는 것밖에 해줄 건 없었지만, 태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힘껏 엄지를 들어주고, 격려 한 마디, 진한 포옹으로 서현에게 힘을 줬다.

서현은 그래서 태성에게 자신의 곡을 들려주고 나면 어쩐지 자신감이 올라왔다.

서현은 연주를 시작했다.

한 손으로 가볍게 치는 연주였다.

“이 부분부터 좀 집중해서 들어봐요.”

중간중간에 설명도 섞어가면서 서현은 태성에게 곡을 들려줬다.

“어때요?”

“이거 지난번에도 들려줬던 거 아니었나?”

“어? 맞아요. 기억해요?”

“그럼. 지난번보다 훨씬 곡이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좋아졌어. 그때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고생했네.”

“정말?”

“그럼.”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서현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나,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

서현은 한 손으로 가볍게 연주를 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다른 버전으로 한 번 쳐보고, 또 다른 버전으로도 한 번 쳐보고. 점점 대충, 막 하는 게 보이자 태성이 서현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당신, 지금 하기 싫지?”

“아닌데?”

정말 억지로 하고 있는 거였다. 억지로. 

그냥 손을 놓을 수는 없고, 생각이 안 날 때면 이렇게 막 칠 때 한 번은 걸릴 때도 있었으니까.

서현이 장난스럽게 치자, 태성도 장난스럽게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아, 간지러워요.”

서현은 간지럽다고 웃으면서도 연주를 멈추지는 않았다.

계속 장난치듯이 그렇게 연주하다가, 서현은 불현듯… 아!

“태성 씨, 잠깐만요.”

“응?”

서현이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건반을 치면서 메모를 하더니, 자세를 고치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들어봐요.”

제법 진지한 연주에 태성도 집중했다.

안 풀리던 부분이 풀렸는지, 서현의 표정도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어때요?”

기대에 잔뜩 부푼 서현의 눈빛을 보며, 태성은 미소를 지었다.

“이봐, 당신 천재랬잖아.”

“어떡해… 이거 진짜 괜찮은 거 같아. 나만 좋은 거 아니죠?”

태성이 엄지를 들어 보이자, 서현이 처음부터 연주를 시작했다.

태성은 진지하게 연주를 들었다.

연주가 끝나자, 태성이 박수를 쳤다.

그런 그를 보며, 서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진짜 좋아요?”

“응. 그렇다니까.”

잠시 태성의 표정을 살피더니, 서현은 이내 긴장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한시름 놓았다….”

서현의 피곤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태성은 순간 열이 올랐다.

“가만! 정민혁 그 자식은 왜 일을 이렇게 촉박하게 잡아 온 거래?”

“내가 아직은 더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그렇지. 내가 카옐을 만나서….”

생각이 더 발전해서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서현이 태성을 막았다.

“잠깐!”

“왜?”

“만나기만 해요!”

“왜?”

“내 힘으로 하고 싶단 말이야.”

“내 힘이 당신 힘이야. 내 모든 게 당신 거라고.”

“싫어요. 이런 고생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건 고생 축에도 못 낀다고요. 그러니까 만나지 마요.”

태성은 서현을 바라보고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근데 필요하면 말해. 아, 그 공연에 협찬을 좀 해줄까?”

“노! 부회장님! 절대 안 돼요. 나 그냥 초대받은 게스트라고요. 주인공보다 튀면 절대 안 되니까 자제 부탁드립니다.”

“드레스는?”

“지난번에 맞춘 거 입으면….”

“그럴 순 없지. 그건 내가 해줄게.”

“그럼 대신 너무 비싼 거 말고.”

“그것까진 뭐라고 하지 말지. 나 많이 양보한 거야.”

“알겠어요….”

“그럼 잘까?”

“네. 너무 피곤해….”

그 말에 태성이 서현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악! 걸어갈 순 있어요.”

“내가 안을 수 있는데 왜?”

태성이 가볍게 입을 맞추자, 서현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더 진하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좀 전까지만 해도 미소를 짓고 있던 태성의 표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더욱 진해진 눈빛으로 바라보는 태성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또?”

“그냥 재우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네?”

태성은 서현을 안고 성큼성큼 조금은 급한 걸음으로 안방으로 향했다.

* * *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카옐의 공연 게스트로 출연한 서현은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치고, 덕분에 늘어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내일 운동회 진짜 올 거지?”

“그럼, 당연히 가야지.”

태오는 서현이 행여 운동회에 오지 못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스케줄을 끝내고 오겠다고 했지만, 요즘 매번 늦는 서현을 믿지 못하는 태오였다.

“엄마, 이번에도 늦으면 진짜 화낼 거야.”

“알았어. 절대 안 늦어.”

“진짜 늦으면 안 돼. 약속!”

태오가 서현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는 태성을 바라봤다.

“아빠, 아빠가 봤지? 엄마가 약속하는 거?”

“그럼. 엄마 절대 안 늦게 아빠가 최 기사 아저씨 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어. 할아버지랑 할머니한테도 전화해야겠다.”

“태오야, 아까 전화했잖아.”

“까먹었으면 어떡해.”

태오는 영상 통화를 걸기 위해 태블릿을 찾으러 제 방으로 향했다.

다음 날, 태오의 운동회 때문에 온 가족이 모였다.

화명가(家)가 뜨자, 파파라치들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사진을 몰래 찍고 있었다.

방 실장과 고 비서는 파파라치들이 사진을 찍지 못하게 경비 인력을 동원해 막고 있었다.

치열한 그들에 비해, 이 회장과 숙영은 태오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태오야, 이건 할아버지가 만든 거야.”

이 회장이 태오 앞에 내놓은 건 5층 도시락이었다.

생전 요리라고는 해보지도 않던 이 회장이었지만, 태오가 김밥을 먹고 싶다고 하자, 웰빙으로 만들겠다면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새벽부터 김밥을 만들었다.

주방을 개판으로 만들었지만, 도우미들의 도움으로 김밥은 꽤 그럴듯하게 나왔고, 숙영은 경쟁하듯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나머지는 물론 도우미들의 손길이 들어갔다.

그렇게 완성된 5층 도시락이었다.

1층에는 김밥, 2층에는 샌드위치, 3층에는 쌈밥, 4층에는 케이크와 쿠키, 5층에는 과일.

거대한 5층 도시락을 본 태오는 입을 떡 벌렸다.

“우와, 맛있겠다.”

“태오야, 지금 조금 먹어볼래?”

이때, 태성이 음료수를 들고 다가왔다.

“이따가 점심시간에 먹어야죠. 서현이가 태오 아침 든든히 먹여서 지금 배 안 고플 거예요.”

태성의 말에 숙영은 태오를 바라봤다.

“엄마가 바쁜데도 우리 태오 아침에 맛있는 거 해줬구나?”

“네. 오므라이스 해줬어요. 엄청 맛있었어요.”

“그럼 도시락은 이따가 먹을까?”

“네. 지금은 좀 배부르거든요.”

“그래, 그러자.”

이 회장은 얼른 태오에게 도시락을 먹이고 싶었지만 도시락을 옆으로 밀어 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새아가 올 때 되지 않았어?”

“곧 올 거예요. 이거 받으세요.”

운동회 스케줄 표를 가져온 태성은 이 회장과 숙영, 그리고 태오에게 나눠줬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함께하는 게임도 있으니까 두 분 준비하세요.”

“뭐? 우리가 나가는 것도 있다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하는 3인 4각이라는데… 지금 태오 반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온 집은 우리 집뿐이라서, 우리가 대표라고 하던데요?”

“우리가 대표?”

이 회장이 조금 놀라며 스케줄을 확인하자, 숙영이 살짝 비웃었다.

“왜요? 자신 없나 보죠?”

“내가 왜?”

“요새 운동도 안 하고, 태오랑 집에서 뒹굴기만 하던데….”

전에는 골프도 열심히 다니고 하던 이 회장이었지만, 태오와 함께 지내고부터는 골프도 끊었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뿐인 이 회장을 숙영이 놀렸다.

“태오야, 할아버지가 잘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 못 뛰어요? 나는 엄청 빠른데!”

그 말에 이 회장은 발끈했다.

“태오야, 네가 누구 닮아서 빠른지 알아? 다 이 할아버지 닮아서 빠른 거야.”

“어? 나 아빠 닮아서 빠른 건데….”

“아빠가 할아버지를 닮았으니까 태오도 할아버지 닮은 거지.”

“아….”

“할아버지가 꼭 우승할게.”

이 회장은 자신만만하게 포부를 밝히고는 숙영을 찌릿 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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