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끌림 (77)화 (77/111)

77화 

금지어

“태성 씨….”

“응?”

“전화드려요.”

“……?”

“그렇게 가신 거 너무 마음에 걸려요.”

서현의 말에 태성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꼬옥 안았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며느리 하기에는 당신이 너무 아깝다.”

“어머, 들으시면 정말 서운하시겠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땐 내가 미운 게 당연하지.”

태성은 서현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여자가 내 여자라니… 나 정말 복 받았다.”

“나도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이런 남자가 내 남자라니?”

서현이 태성의 허리를 꼬옥 껴안았다.

* * *

“태성이는 뭐래?”

이제 막 통화를 끝낸 숙영에게 이 회장이 닦달했다.

“뭐라긴 뭐래요. 화내지.”

“그러게 친자 확인서 얘기는 하지 말지. 당신은 쓸데없는 말을 해서 꼭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아, 잘나셨네요.”

“거참… 왜 갈수록 교양이 없어져? 태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여기서 태오 얘기는 왜 나와요?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손자 보기 창피하지 않으려면 인간미! 그런 것 좀 길러요. 알겠어요?”

이 회장은 숙영에게 이를 한번 바득 갈고는 신문을 펼쳤다.

“그래서 뭐래? 언제 만나자는 거야?”

“서현이랑 얘기해 보겠대요. 지금 서현이 귀국 독주회로 좀 바쁜가 봐요.”

“바빠도 밥은 먹겠지.”

“그렇게 좀 말하지 말고 걱정 좀 해요. 사람이 감성이 메말랐어. 아, 그렇지. 서현이 연주한 거 좀 듣고 감성 좀 키워봐요. 이 가슴으로 나오는 거… 아시려나?”

“당신 유난히 빈정대는 거 알지, 요즘? 내가 집에서 쉬니까 우스워?”

“싫으면 밖에 나가세요. 그리고 당신이 쉬니까 이러는 게 아니라 내가 이제 당신한테 목매달고 살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에요.”

“뭐야?”

“나도 나 좋다는 남자 찾아갈 거예요.”

“뭐, 뭐야? 그렇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거지?”

“무슨 소리예요? 난 아들도 남편도 필요 없어요. 우리 태오면 돼. 우리 태오가 이 딱딱하고 시커먼 남자들 닮기 전에 잘 키워야지. 서현이 닮았으면 감성적이겠지?”

또 휴대전화를 꺼내 태오의 사진을 찾아보는 숙영이었다.

“아이고, 어쩜 이렇게 잘났을까?”

그런 숙영을 이 회장은 얄밉게 바라봤다.

“남자는 남자 편이야. 결국 할머니보다는 할아버지 찾게 되어 있으니까 헛물켜지 마.”

“뭐라고요? 우리 태오 그런 애 아니거든요?”

“내 피야. 뭐가 다를까?”

“왜 당신 피만 흐른다고 생각해요? 내 피도 있거든요? 이승경 씨!”

“두고 보자고. 진숙영 씨!”

“그래요, 두고 봐요. 이승경 씨!”

숙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거칠게 발을 구르며 방으로 향했다.

쾅-

사납게 문이 닫히자, 이 회장은 이를 바득바득 갈고는 자기 방으로 향했다.

쾅-

숙영 들으라는 듯 더 세게 문을 닫는 이 회장이었다.

* * *

태성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태오는 거실로 달려갔다.

운동장처럼 넓은 집을 뛰어다니는 태오를 보면서 태성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오길 잘했지?”

“그러네요….”

“층간소음도 없고, 태오한테는 여기가 좋을 거야.”

“그렇겠죠… 알아요. 근데 미안해서 그런 거죠.”

“안 되겠다.”

“네?”

“미안하다는 말 금지. 어기면….”

“어기면?”

“미안하다는 말 할 때마다 1시간씩 늘어날 줄 알아.”

“뭐가요?”

“당신과 나의 밤?”

“어머!”

서현은 태오가 어디 있나 찾았다.

다행이 멀리 있는 걸 확인하고, 서현은 태성의 팔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찰싹 때렸다.

“태오 있잖아요. 둘만 있을 때처럼 하지 말라니까….”

“우리 그러고 보니 둘만의 시간을 너무 못 가진 거 아닌가?”

“벌써 아들이 귀찮아진 거예요?”

“무슨 소리? 당신이 그리워진 거지.”

“못살아….”

서현은 태성을 흘겨보면서도 입꼬리를 씰룩댔다.

“그러면서 왜 자꾸 웃는데?”

“누가요?”

“당신이.”

“내가 언제요?”

“지금. 분명히 웃었는데?”

“아니거든요.”

“밤을 기대하는 건가? 지금부터 체력 조절을 좀 할까?”

“어머!”

서현은 또다시 고개를 돌려 태오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느새 정원으로 나가 구경하고 있는 태오였다.

서현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태오의 위치를 파악한 태성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늘 태오 빨리 재우자.”

“어머, 이거 놔요. 태오 보면 어쩌려고.”

“태오 잘 놀고 있는데 왜? 오늘 밤 되는 건가?”

“언제부터 물어봤다고?”

“하긴…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잡아먹고 싶네.”

태성은 서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지만 농밀한 키스를 건넨 태성은 아쉽다는 듯 서현의 입술을 세게 빨아 당겼다 놓았다.

촉촉한 마찰음이 번지자 하체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하….”

금세 진해진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었다.

“진짜 더는 못 참겠다. 태오 체력 좀 빨리 방전시켜야지. 그럼 빨리 자겠지?”

“잘해봐요.”

태성은 서현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 당기고는 태오가 있는 정원으로 달려갔다.

“태오야, 아빠랑 축구 할까?”

태오가 없을 때는 저 정원에 나갈 일이 없었는데, 새삼 정원이 있다는 게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처럼 느껴지는 서현이었다.

서현은 태오의 짐을 정리하기 위해 태성이 말한 태오의 방으로 향했다.

태오와 함께 가구를 보러 가자고 해서 아직은 빈방인 곳이었다.

다시 이 집에, 태오와 함께 오게 될 줄이야…

서현은 새삼 감회가 새로워서 집안을 둘러봤다.

피아노 방은 그대로인가 싶어서 문을 열어보니, 그대로였다.

청소를 계속 해왔는지 청결 상태도 아주 좋아 보였다.

방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다 보니 이 집이 이렇게 컸었나 싶고, 이 큰 집에 오랫동안 태성을 혼자 놔뒀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태성이 서현에게 다가왔다.

“우리 저녁은 어떻게 할까? 나가서 먹고 올까? 태오는 또 돈가스 먹고 싶다는데?”

태성이 가까워지자, 서현이 그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서현이 갑자기 안기자, 태성은 영문은 모르지만 기분이 좋아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왜? 그새 내가 보고 싶었어?”

“미안해요… 그동안 당신 너무 외로웠죠?”

“이제 알았어? 더 빨리 좀 돌아오지.”

“미안해요….”

“괜찮아, 지금은 당신이랑 태오가 이렇게 함께 있으니까.”

서현이 태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행복하게 해줄게요. 혼자 둬서 미안해요.”

“이젠 괜찮다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벌써 오늘 밤부터 행복할 것 같은데?”

“네?”

눈을 마주친 태성이 피식 웃자, 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 지금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몇 번 한 줄 알아?”

태성은 접은 손가락을 서현에게 보여줬다.

정확히 손가락 세 개가 접혀 있었다.

“세 시간 추가.”

“네?”

서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말도 안 돼. 내가 진짜 미안해서 말한 건데, 미안하다고 말한 걸 그걸 다 새고 있었던 거예요? 진짜 미안한 마음 다 사라졌어.”

태성은 손가락을 세 개 더 접었다.

한 손으로도 모자라 두 손을 이용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 방금… 미안 추가돼서 6시간 됐다. 당신 내일 스케줄 없지? 난 괜찮은데.”

“아니 그게… 내가 미….”

또 미안이라는 말이 나올 뻔해서 서현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태성이었다. 

“아, 아깝다. 7시간 할 수 있었는데.”

“태성 씨!”

“당신 오늘 잠 못 자겠다. 지금부터 자둘래?”

태성은 서현에게 여섯 개의 손가락을 접은 손을 흔들며 유유히 사라졌다.

“저녁은 나가서 먹자. 돈가스.”

* * *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태성은 태오와 함께 목욕을 했다.

태성이 때를 밀어주자, 이번엔 태오가 자기 손에 때수건을 끼웠다.

“아빠, 내가 등 밀어줄게.”

“태오가?”

“응! 내가 해줄게.”

약한 힘이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등을 밀어주는 태오가 느껴지자, 태성은 울컥했다.

“태오야.”

“응?”

“태오는 언제까지 아빠 등 밀어줄 거야?”

“평생!”

“진짜?”

“응!”

“이리 와, 내 아들.”

태성이 꼬옥 껴안자, 태오가 바둥거렸다.

“아빠, 때 밀어야 돼.”

“아빠는 깨끗해서 때 없어.”

“때 있어.”

“없어.”

태오를 꼬옥 껴안으면서, 태성은 순간적으로 이 회장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나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

목욕을 마치고, 태성이 태오에게 로션을 꼼꼼히 발라줬다.

그러자 이번에도 태오가 따라 했다.

“아빠도 내가 발라줄게.”

고사리손으로 여기저기 로션이 뭉치게 발라주는데도 행복한 태성이었다.

“야, 간지러워.”

어느새 간지럼 태우기로 변질이 되긴 했지만 행복하게 뒹구는 두 사람을 보며 서현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 장난 그만하고 얼른 자야지?”

서현의 말에 두 남자는 장난을 멈추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성은 들어가면서 서현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6시간! 준비하고 있어.”

그러면서 태성이 태오 몰래 서현의 엉덩이를 살짝 움켜잡았다가 놓았다.

“어머, 미쳤나 봐.”

서현은 깜짝 놀라 그대로 굳었고, 태성은 태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따로 잠을 잤던 태오는 게스트룸에 자신의 애착 조명을 갖고 와 잠잘 준비를 마쳤다.

“아빠! 여기 누워.”

침대에 먼저 누워 제 옆을 손으로 팡팡 치는 태오를 보며 태성은 당황했다.

“응?”

“아빠, 나랑 같이 자자.”

“어? 같이?”

서현에게 준비하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들아, 너도 좋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다, 아들아.’

태성이 이렇게 속으로 울부짖는데, 마침 서현이 문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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