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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76)화 (76/111)

76화 

오랜만에

“어허!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태성이 혼을 내자, 명수가 입술을 삐쭉였다.

“얘가 아빠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하잖아요.”

“나 태오 아빠 맞아. 그렇지 태오야?”

“응, 아빠!”

태오가 태성의 다리를 붙잡고 안기자, 명수가 엄마한테 일렀다.

“엄마, 태오랑 이 아저씨가 거짓말해.”

“아니 그러게… 태오는 장 씨고 거기 부회장님은 이 씨 아닌가?”

“저기 아주머니! 제가 태오 아빠 맞습니다. 그리고 행여 아니라고 해도 아이 앞에서 이런 말 하시는 거 아니죠. 요즘 재혼 가정도 많은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진짜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얼마나 상처를 받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사실을….”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 애한테 배려 좀 알려주시죠?”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

태오가 옆에서 독일어로 말하자, 명수 엄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뭐? 뭐라고요?”

“아, 그리고 제가 태오 친아빠인 게 사실입니다. 닮았잖아요. 사실을 원하시길래. 가자, 태오야.”

“네, 아빠.”

태오가 명수와 명수 엄마에게 메롱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 * *

“오늘은 또 어디로 가? 나도 같이 나가.”

“왜 자꾸 따라와요.”

“손자 보러 간다며? 내가 내 손자 보겠다는데! 그 아이가 당신 손자만 돼?”

“애 이름도 모르면서 손자는 무슨?”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장태오라고 몇 번을 말해요?”

“왜 성이 장이야? 얼른 이 씨로 바꿔야겠구만.”

“그런 생각만 하죠? 당신이란 사람은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이승경 씨!”

“됐고, 앞장 서시죠. 진숙영 씨!”

“허!”

“허!”

이 회장이 숙영의 어깨를 스치고 먼저 나갔다.

“어머, 진짜 별꼴이야.”

잠시 후, 서현의 오피스텔 앞에 멈춰선 차 안에서 숙영은 태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올 때가 됐는데….”

그런 숙영을 보며, 이 회장은 혀를 끌끌 찼다.

“항상 이러고 있어?”

“그럼 어떡해요? 지은 죄가 있는데….”

그때였다. 태오가 놀이터로 나오자, 숙영이 차 안에서 박수를 쳤다.

“아이고, 우리 태오 나왔네.”

“태오 나왔는데, 나가야지 왜 안 나가?”

“잠깐 기다려봐요. 서현이도 같이 나오는지 보고 나가야 된단 말이에요.”

“가지가지 하는구만.”

“당신은 당당해요? 그럼 지금 나가보시든가.”

“음!”

이 회장은 할 말이 없어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숙영과 함께 태오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니, 저 아이는 그때 그 딱지?”

숙영은 태오에게 시비를 거는 명수를 알아봤다.

태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자, 이상함을 감지한 숙영이 차에서 내려 태오에게 달려갔다.

“태오야!”

숙영이 나타나자, 명수가 아는 척을 했다.

“어? 그 할머니다.”

숙영은 씩씩대고 있는 태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숙영이 물어보기도 전에 태오가 억울해서 소리쳤다.

“우리 아빠 맞다고!”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명수가 놀리자, 명수 엄마가 옆에 있는 다른 엄마들을 둘러보면서 고상한 척 얄미운 목소리로 말했다.

“명수야, 너도 그만해. 맞다잖아.”

“엄마! 얘 거짓말하는 거라니까.”

“알아. 그러니까 좀 가만히 있어.”

명수 엄마가 명수를 말리고는 팔짱을 낀 채 태오를 내려봤다.

“근데 얘,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거야. 그 그룹 부회장님이 너희 아빠라는 게 말이 되니? 아니… 화명그룹 애면 이런데 살겠냐고… 안 그래요?”

다른 엄마들을 보면서 동의를 구하자, 엄마들이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태오는 명수 엄마를 뚫어지게 째려봤다.

“어머, 너 누가 어른 그렇게 보라고 가르쳤니?”

오피스텔 주변 고급 아파트에 사는 명수 엄마는 평소에도 태오를 얕보는 편이긴 했으나, 좀 전에 태성에게 한 방 먹고는 어린애를 상대로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태오야, 엄마가 알면 속상해하셔. 네가 자꾸 그 아저씨가 아빠라고 거짓말하고 다니면….”

태오가 또 소리치려고 하자, 숙영이 말렸다.

“태오야, 조용. 이 할머니가 알아서 할게.”

숙영을 바라보며, 명수의 엄마가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이 애 할머니세요?”

“네, 그렇습니다.”

“잘됐네요. 아셔야 될 게 있어서요. 좀 전에 화명그룹 부회장님이 얘가 좀 안 됐어서 아빠라고 해줬는데… 그게 아이 돕는 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자기가 이 씨인 거 뻔히 아는데, 태오 아빠라뇨? 애들한테 더 손가락질받는 거예요. 손자 데려가서 잘 타일러보세요. 이렇게 거짓말 하나씩 하다가….”

“누가 거짓말이래요?”

“네?”

“이 애 우리 태성이 아들 맞습니다.”

“네?”

명수 엄마와 다른 엄마들이 키득대기 시작했다.

“누구요? 이태성 씨 말고, 장태성 씨요?”

이때, 이 회장이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이 회장이 태오의 옆에 서자, 명수 엄마와 다른 엄마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얼음이 되고 말았다.

숙영의 얼굴은 못 알아봤지만, 이 회장의 얼굴은 확실히 알아본 엄마들이었다.

“아니… 화… 화명그룹.”

“네, 내 손자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이 회장의 말에 숙영이 명수 엄마를 째려보며 말했다.

“우리 태오가 무슨 잘못을 해요? 이 사람들이 문제인 거지.”

숙영은 태오를 꼬옥 껴안았다.

“아이고, 내 새끼. 내 손자.”

명수 엄마를 비롯한 엄마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 회장이 태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직도 볼 일이 있으십니까, 내 손자한테?”

“아, 아니요….”

이때, 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어머니?”

목소리를 들은 태오는 태성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아빠!”

옆에는 서현이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이 회장과 숙영은 태성과 서현을 보는 순간 몸을 뒤로 돌렸다.

“어떡해요?”

“잘난 진숙영 씨가 알아서 해.”

“회장님? 지금 장난해요?”

이 상황에서 명수 엄마와 다른 엄마들은 화명그룹 패밀리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벙쪘다.

고급아파트 산다고 태오를 무시했었는데… 이건 고급아파트로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재산 격차였다.

명수 엄마와 다른 엄마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이 회장과 숙영의 뒤로 태성과 서현이 점점 다가왔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숙영은 태성과 서현이 말을 걸기 전에 뒤돌아섰다.

“오, 오랜만이다. 서현아.”

숙영의 어색한 인사에 서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잘 지내셨어요, 어머니?”

“어, 그래….”

숙영이 이 회장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복화술로 말했다.

“인사해요. 서현이잖아요.”

옆구리를 찌르는 숙영을 밀어내고, 이 회장은 나름 당당하게 서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네,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태오는 가운데에 서서 이 회장과 숙영 쪽을 태성과 서현 쪽을 번갈아 바라봤다.

“엄마, 대장님 알아?”

“대장님?”

그 말에 숙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태오가 날 그렇게 부르거든. 그렇지, 태오야?”

“네, 대장님.”

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회장과 숙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렇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태오를 보러 왔다는 것에 태성은 화가 났다.

하지만 태오의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태성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숙영은 태성이 화를 낼까 봐 눈치가 보이는데, 태오의 눈치를 보는 태성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자식 앞에서는 별수 없구나.’

숙영은 재미있다는 피식 웃고, 이 회장은 서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이가 참 예쁘게 잘 컸구나. 언제 아이 데리고 밥이나 먹자.”

“네, 아버님.”

“시간은 언제….”

성격 급한 이 회장이 시간까지 정하려고 하자, 숙영이 그를 잡아당기며 복화술을 했다.

“나중에요. 나중에.”

숙영은 서현과 태성은 번갈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 갈게.”

숙영이 서둘러 이 회장을 데리고 걸음을 옮기면서 태오를 바라봤다.

“태오야,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

“안녕히 가세요.”

태오가 인사를 하자, 서현도 인사했다.

“들어가세요.”

“그래, 서현아, 다음에 보자.”

숙영이 이 회장을 억지로 끌고 차에 타자, 태성이 서현을 끌어안았다.

“미안… 아시는 줄 몰랐어.”

“아니에요. 어차피 말하려고 했던 건데… 그리고 우리 태오 편들어주시는 거 보고 저 감동받았는데요?”

서현이 괜찮다고 했지만, 태성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짜 왜 이러시는 거야….”

“그러지 말아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우리 태오 좋아해 주시는 거 같죠?”

“당연하지.”

태성이 볼을 쓰다듬어주자, 서현이 미소를 지었다.

“태오야.”

서현은 무릎을 굽히고 태오에게 눈을 마주쳤다.

“할머니랑 자주 만났어?”

“대장님?”

“응.”

“대장님이 유치원에서 밥도 주고 선물도 줬어.”

“아, 그랬어?”

서현이 태성의 눈치를 살폈다.

유치원까지 찾아갔다는 태오의 얘기를 듣던 태성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탄식했다.

“하….”

그 모습을 보고 태오가 태성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빠 화났어?”

“아니야, 아빠 화 안 났어.”

서현이 태성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태성 씨, 태오가 당신 화난 줄 알잖아요.”

그 말에 태성은 아차 싶어서 애써 화를 삭이고, 무릎을 굽혔다.

태오에게 눈을 맞춘 태성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빠 화 안 났어. 얼른 가자.”

서현과 태오는 태성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오피스텔이 이렇게 좁은지 몰랐던 태성은 오늘 오피스텔 안을 처음 보고 깜짝 놀라서 서현을 설득했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원래 함께 지내기로 했던 집 아니었냐고.

태오 때문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던 서현은 태성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태오를 차에 태우고, 차에 타기 전 서현이 태성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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