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수상해
화를 내는 숙영을 보며, 이 회장은 확신했다.
“더 수상해.”
“수상하긴 뭐가 수상하다고… 진짜 어딜 따라온다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야, 당신 가는 데지. 얼른. 앞장서.”
태오에게도 유치원에도 간다고 말해놨는데 안 갈 수도 없고, 숙영은 어쩔 수 없이 이 회장과 함께 집을 나섰다.
잠시 후, 유치원 앞에 멈춰 선 차에서 숙영이 내리자, 이 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뭐야?”
“어디 가냐면서요. 여기예요. 됐죠? 나 바쁘니까 따라오든 집으로 가든 알아서 해요.”
서둘러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숙영을 바라보며, 이 회장은 차에서 내렸다.
“여긴 왜 온 거야?”
이 회장이 유치원으로 들어서자, 이 회장을 알아본 유치원 선생님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저….”
화명그룹의 이승경 회장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히 놀랄 만도 했다.
부원장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 회장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아, 네… 지금 제 와이프가 여기로 들어갔는데….”
“배식 도우미 하러 오셨어요?”
“배식 도우미요?”
“이쪽으로 오시죠.”
부원장이 이 회장을 태오의 반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숙영은 앞치마와 두건을 두르고 아이들에게 급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 회장이 고개를 또 갸웃했다.
“저 사람 저기서 뭐 하는 거야?”
평소 숙영의 모습이 아니었다.
40년 가까이 같이 살면서도 본 적 없는 표정과 웃음소리였다.
부원장이 옆에서 쩔쩔매자, 이 회장이 말했다.
“저 혼자 있어도 됩니다. 와이프 나오면 같이 가겠습니다.”
“아, 네. 그러시겠어요?”
“네, 가서 볼일 보십시오.”
이 회장의 말에 부원장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무실로 향했다.
어제는 이태성 부회장이 태오를 데리러 와서 기함하게 하더니, 오늘은 화명그룹 큰 사모님의 배식 도우미에 회장님 행차까지….
동네 조그마한 유치원이었던 하늘동산 유치원에 나타날 만한 인사들이 아니었다.
요즘 휘몰아치는 유명인사들, 화명그룹 사람들 때문에 유치원 선생님들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한편, 배식 도우미를 하고 있는 숙영을 바라보던 이 회장은 흠칫 놀랐다.
숙영이 유독 관심을 갖고 예뻐하는 아이가 태성과 너무 닮은 탓이었다.
“아니 저….”
이 회장은 태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저렇게 닮을 수가 있지?
태성이를 닮아서 숙영이 좋아하는 건가?
아니,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배식 도우미를 한다고?
숙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절대 이유 없이 배식 도우미를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 회장도 알고 있었다.
부엌살림이라면 집에서도 절대 손도 안 대는 사람이 숙영이었다.
근데 여기 와서 배식도우미를 하고 있다고?
저 아이를 보기 위해? 왜?
잠시 후, 숙영은 배식을 끝내고 아이들이 밥을 먹는 것까지 도와주고는 태오와 함께 교실에서 나왔다.
“우리 태오 양치해야지? 자, 다른 친구들도 양치하자.”
아이들을 양치시키겠다며 숙영이 스쳐 지나가자 이 회장은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감았다 떴다.
“저 사람이 뭐 잘못 먹었나?”
선생님을 도와서 야무지게 아이들 양치까지 시키고, 교실까지 통솔한 숙영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태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관장님 또 올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아이고, 인사도 잘하지.”
숙영은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태오에게 끝까지 시선을 주고는 어렵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숙영을 보며 이 회장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 어디 가는지 궁금하다면서요?”
“죽을 날 받아놨어? 아니면 뭐 약점이라도 잡혔어?”
“무슨 소리예요? 얼른 나가요. 애들 공부할 시간 됐으니까.”
숙영이 서둘러 나가고, 이 회장은 그 뒤를 따랐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 이 회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숙영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무슨 짓이라뇨? 오늘 봤잖아요.”
“그러니까 뭐 하는 거냐고.”
“못 봤어요? 우리 태성이랑 아주 판박이처럼 닮은 아이? 딱 봐도 똘똘하니 잘생긴 우리 손자.”
“……?”
이 회장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잘생긴 우리 손자 못 봤냐고요.”
“소, 손자?”
“네, 당신은 눈썰미도 없어요? 난 한눈에 알아보겠던데.”
숙영은 휴대전화로 태오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보면서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우리 손자 어쩜 이렇게 예뻐?”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아까 그 유치원에 있던 애가 우리 태성이 애라는 거야?”
“네.”
“누가 낳았는데?”
“서현이요. 서현이 느낌도 좀 있지 않아요? 애가 서현이 닮아서 그런지 예술 감각이 있더라고요.”
“아니 이게 무슨….”
이 회장은 혼란스러워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요새 수상하게 돌아다니고 그런 게 이것 때문이었어?”
“수상하다뇨? 생전 관심 안 가져 놓고 갑자기 왜 관심이래?”
“저 아이가 태성이 아이인지 당신은 어떻게 알았어?”
숙영의 얘기를 듣고, 이 회장은 다시 한번 태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잘 떠오르지 않자, 숙영이 보고 있는 휴대전화를 뺏어 사진을 봤다.
“이리 줘 봐.”
“이상한 버튼 눌러서 지우지 말아요.”
휴대전화 사진 속 태오의 모습을 보고 이 회장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아이 이름이 뭐라고?”
“태오요. 태오한테 물어보니까 이름 뜻이 글쎄 신의 선물이래요. 너무 딱이지 않아요? 이게 선물이지 뭐가 선물이겠어요. 서현이가 혼자서도 애를 얼마나 야무지게 키웠는지.”
“태성이는 알아?”
“글쎄요. 서현이 만나는 것까지는 아는데….”
“이 녀석 어디 있어?”
“왜요?”
“자기 자식이 어디에서 크는지도 모르고 이 바보 같은 자식을!”
이 회장이 휴대전화를 들어 태성에게 전화를 걸자, 숙영이 얼른 뺏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머! 미쳤나 봐.”
“이리 안 내놔?”
“못 줘요. 태성이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하게요?”
“자기 자식이 어디서 크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아이고….”
숙영이 이 회장을 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 숙영을 보며 이 회장이 버럭 화를 냈다.
“왜? 왜 그렇게 봐?”
“내가 왜 당신한테 말 안 하고 몰래 다녔는 줄 알아요? 이럴까 봐 그랬어요.”
“뭐야?”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가 서현이한테 지은 죄가 있는데 무슨 낯으로 손자를 보여달라고 해요? 서현이한테도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니에요. 당신이 지금 태성이한테 말하면? 그래서 뭐 어쩌게요? 말을 하더라도 서현이가 태성이한테 말을 해야지. 그걸 왜 당신이 말해요? 둘이서 긴 시간 오해했던 거도 풀고, 자기들끼리 정리 끝내면 어련히 손자 데리고 나타날까. 우리가 반대해도 그렇게 좋아 죽던 애들이 헤어지겠어요? 그냥 냅두자고요. 그냥 좀.”
태성한테 얘기를 듣고 생각이 많이 바뀐 숙영이었다.
이 회장은 숙영을 바라보며 원래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감탄했다.
숙영의 말을 듣고 머쓱해진 이 회장은 휴대전화를 뺏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숙영이 혀를 끌끌 찼다.
“하긴… 당신이 뭘 알겠어요? 당신이 사랑을 알아요? 감정이라고는 10원어치도 없는 인간!”
숙영의 말에 발끈한 이 회장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째려봤다.
“지금 말 다 했어?”
“아뇨! 더 해줘요?”
숙영은 그동안 쌓였던 말들을 작정한 듯 토해냈다.
“당신이 아내 사랑할 줄을 알아요? 자식 사랑할 줄을 알아요? 그저 일만 할 줄 알았지. 태성이 이해 못 하는 것도 이해는 가요. 뭐 사랑이란 감정을 알아야 이해를 하지. 안 그래요? 왜? 평생 일만 하다가 일 좀 쉬니까 나라도 괴롭히고 싶은 거예요? 관심 가져달라고 애원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이제 와서 심심해요? 그래서 괴롭히는 거예요? 저기 이승경 씨! 이제 당신 관심 하나도 안 반갑거든요. 네 뿡이거든요!”
“뭐, 뭐야? 뿡? 교양 없이….”
“교양? 교양 없는 게 누군데? 한 번만 더 아들한테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둥 쓸데없는 얘기 하고 돌아다니기만 해요.”
“하면?”
“황혼이혼 당할 줄 아세요! 알겠어요?”
숙영이 소리를 빽 지르고, 창가로 시선을 돌리자 이 회장은 어이없어서 말이 다 안 나왔다.
* * *
“태오야, 여기.”
태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태성이 자세를 낮추고 두 팔을 벌리자 태오가 이모님의 손을 뿌리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빠!”
태오가 품 안에 안기자, 제법 강한 힘에 태성은 깜짝 놀랐다.
이모님은 멀리서 인사를 하고 퇴근했고, 태성은 태오를 꼬옥 껴안았다.
“우리 태오 힘 엄청 센데?”
“아빠보다도 더?”
“아빠한테 매달려 볼래?”
“응!”
태오가 팔에 매달리자, 태성이 몸을 일으켰다.
187cm가 넘는 키를 자랑하는 태성이 일어나자 태오는 저절로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태오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좋아하자 태성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꽉 잡아.”
“우와, 놀이기구 탄 거 같아. 한 바퀴 더! 한 바퀴 더!”
“그래! 한 바퀴 더!”
이때, 길을 지나가던 명수가 엄마와 지나가다가 태오와 태성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야, 장태오! 재미있냐?”
“응! 재미있어.”
“아저씨! 나도 해줘요.”
명수는 딱 보기에도 태오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명수가 매달리겠다고 달려가자 명수 엄마가 말렸다.
“명수야!”
적극적으로는 말리지 않는 명수 엄마였다.
명수가 태성의 팔을 잡으려고 하자, 태오가 막아섰다.
“야! 넌 너네 아빠한테 해달라고 해. 너네 아빠 힘세다며!”
“우리 아빠는 지금 없잖아. 그리고 이 아저씨 네 아빠도 아니잖아. 아저씨, 나도 해줘요.”
“야! 우리 아빠거든?”
“너 아빠 없잖아!”
그러자 태성이 명수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