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신의 선물
똑똑-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데, 서현이었다.
놀란 태성은 얼른 차에서 내렸다.
“서현아.”
“매일 여기로 퇴근하는 거예요?”
“그게….”
들켰다는 사실이 민망해 태성이 조금 머뭇대자, 서현이 보조석 문을 열었다.
“나 좀 타도 돼요?”
“그럼.”
서현이 차에 타자, 태성도 따라 운전석에 탔다.
서현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꾹 다물었던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오늘 일이 조금 일찍 끝났어요. 아직 태오 돌봐주시는 이모님 시간이 좀 남아서… 당신하고 얘기 좀 하려고요.”
서현은 주저리주저리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몇 분 동안 늘어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후… 솔직히 많이 고민하고, 연습도 했는데 자꾸 헛소리만 하네요.”
태성이 재촉하지 않고 바라봐 주자 서현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내 아이라면 좋다는 말… 진짜예요?”
“그럼.”
자신의 아이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남자라면, 이 남자를 믿고 또 한 번 부딪혀보자, 이겨내 보자라는 생각으로 서현은 용기를 냈다.
“태성 씨….”
“응?”
“당신 떠나고 나서 알았어요. 오스트리아에 도착하고 얼마 안 돼서….”
서현은 태성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태오를 가졌을 때의 기분과 태오를 낳았을 때의 기분, 태오가 처음 옹알이를 했을 때의 기분, 첫걸음을 걸었을 때 기분, 쑥쑥 커갈 때마다 느낀 기분….
“말이 길었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요… 이 모든 기분을 당신도 이제부터 같이 알아 가면 어떨까 하고요….”
“서현아….”
“태오 당신 아들이에요.”
예상한 말이었지만, 서현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태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서현은 미소를 지었다.
“태오 이름 뜻이 신의 선물이거든요. 저한테 태오는 그런 아들이에요.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 떠나고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나 했는데… 태오가 그 이유가 되어줬어요. 정말 제겐 신이 주신 아이였죠. 태오가 날 살린 거고, 곧 당신이 날 살린 거예요. 고마워요.”
미안한 거 투성이인데, 고맙다고 말해주는 서현을 보며 태성은 가슴이 벅찼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서현아.”
태성은 서현을 와락 껴안았다.
그런 태성을 서현은 두 손으로 감싸 안고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나 밉죠?”
서현의 물음에 태성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마워.”
“내가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태성 씨….”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서현과 태성은 한참 동안 껴안은 채 서로를 위로했다.
* * *
“태오야!”
“어? 대장님?”
“기억하는구나?”
“안녕하세요.”
“아이고, 인사도 잘하지.”
“대장님 여기 사세요?”
숙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버무렸다.
“아, 그게… 뭐 하고 있었어?”
이젠 서현의 오피스텔까지 찾아온 숙영이었다.
그냥 멀리서 보고만 온다는 게, 태오를 보자마자 숙영은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태오는 갑작스러운 숙영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방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이어갔다.
“미술관 오늘 쉬는 날이에요?”
“아니, 일하고 온 거야. 태오는 오늘 유치원 잘 다녀왔어?”
“네.”
“관장님이 배식 도우미 하려고 했는데, 못 갔어.”
“왜요?”
“배식 도우미하려고 보건증을 신청했는데, 글쎄 일주일이나 걸린다지 뭐야.”
숙영은 유치원에서 나오는 길에 보건증을 받으러 바로 보건소로 향했었다.
근데 바로 받을 수 없다는 얘기에 실망을 하고, 보건증이 나올 때까지 태오를 안 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오피스텔까지 오고 만 것이었다.
“태오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까 하나 먹었는데.”
“또 먹으면 안 돼?”
“엄마가 하나만 먹으랬어요. 배탈 난다고.”
“아, 그럼 엄마 말 들어야지. 근데 왜 혼자 돌아다녀? 위험하게?”
“이모님 계세요.”
꼬박꼬박 자기 엄마처럼 이모님이라고 호칭을 하는 태오였다.
“저기.”
태오는 그늘에서 다른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모님을 가리켰다.
“아니, 애한테 눈을 떼면 어떡해?”
숙영은 이모님을 향해 눈을 흘긴 뒤, 태오의 옷을 살폈다.
“태오야, 옷 사이즈 좀 봐도 될까?”
“네?”
숙영은 태오의 옷에 붙어있는 사이즈를 확인했다.
“옷 사이즈는 왜요?”
“아, 그냥.”
숙영은 성 팀장에게 태오의 옷 사이즈를 문자로 보냈다.
백화점에서 태오의 옷을 보는데, 사이즈를 모르겠어서 여러 사이즈를 샀는데, 이걸 또 줄 방법을 연구하다가 태오의 유치원 애들 모두에게 나눠주기로 한 숙영이었다.
물론, 태오의 것은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벌, 그것도 더 비싸고 특별한 옷이었다.
숙영은 명품디자이너에게 특별 주문 제작한 옷도 함께 선물할 생각이었다.
요즘 어딜 다녀도 숙영의 눈에는 태오의 물건 밖에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마음껏 사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답답할 뿐이었다.
“태오야, 태오는 뭐가 가장 갖고 싶어?”
“음… 왜요?”
“미술상 받은 친구들한테 관장님이 상으로 선물을 주거든.”
“지난번에 선물 받았는데?”
“아… 그건 그 선물이 아니라… 아! 그건 어린이날 선물이었고. 미술상 받은 친구들한테 주는 선물은 다른 거야. 태오는 어떤 게 가장 갖고 싶어?”
“음… 저는….”
태오가 TV 만화에 나오는 로봇 이름을 나열하자, 숙영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잠시 당황했다.
“잠깐만… 다시 천천히 불러줄래?”
태오는 다시 천천히 불렀지만, 숙영은 받아적으면서도 이게 뭔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게 장난감 가게에 있어?”
“네.”
“그렇구나. 다음에 만날 때 꼭 선물로 줄게.”
“근데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받지 말랬는데….”
“태오 관장님 몰라?”
“알아요.”
“그래, 알잖아. 그리고 관장님이 주는 건 태오가 그림 잘 그려서 주는 상이야. 그러니까 받아도 돼. 아, 물론 관장님 말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으면 안 돼. 알았지?”
숙영의 말에도 태오는 별로 내키지 않는지 고민했다.
그런 태오를 보면서 숙영은 피식 웃었다.
‘호락호락하지가 않고만, 우리 손자가?’
숙영이 태오를 귀엽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씩씩대며 나타났다.
지난번 태오에게 딱지를 모두 빼앗긴 명수였다. 태성에게도 혼났던 아이 명수.
“야! 너 덤벼.”
그 말에 태오가 뒷주머니에서 딱지를 꺼냈다.
“야, 박명수! 너 이번엔 안 봐준다.”
“나 최강 딱지 가져왔거든. 이번엔 안 지거든!”
“맘대로 해.”
갑작스럽게 이뤄진 결투를 숙영은 흥미롭게 바라봤다.
놀이지만, 제법 진지하게 임하는 아이들을 보며 숙영도 어느새 집중했다.
3판 2선승제로 승부를 가르는 딱지 대결의 첫 번째 대결은 태오가 이겼다.
“어머, 우리 태오가 이겼네. 1 대 0.”
숙영이 박수를 치며 너무 좋아하자, 명수는 조금 빈정이 상했다.
“할머니, 누구예요?”
“할머니?”
할머니라는 말이 거슬려서 숙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태오가 대신 소개했다.
“대장님이셔.”
“대장?”
“야, 딱지나 쳐.”
“알았어.”
두 번째 딱지 대결, 여기서 이기면 태오의 우승이었지만, 이번엔 안타깝게 진 태오였다.
대결을 하는 태오보다 더 아쉬워하는 숙영을 이번에도 명수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네 할머니야?”
“아니야, 대장님이라니까.”
“그래?”
숙영은 ‘내가 태오 할머니다’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리고 세 번째 딱지 대결,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는 딱지였다.
태오와 명수가 번갈아 가면서 치다가 드디어 태오가 넘어뜨렸다.
태오의 우승이었다.
“아싸!”
태오가 외친 게 아니었다. 숙영이 외친 거였다.
이번에도 명수가 어이없는 눈으로 숙영을 쳐다봤다.
“할머니 진짜 뭐예요?”
“내가 왜?”
“아, 기분 나빠.”
“기분 나쁘긴, 승부는 원래 냉정한 거다.”
“아, 뭐야… 맨날 냉정하대.”
빈정이 상한 명수는 울먹이면서 자기 딱지를 팽개치고 자리를 떠났다.
“어머, 쟤 왜 저러니?”
“쟤 원래 저래요.”
지난번에는 태성에게 당했는데, 이번에 저 할머니는 뭔지….
명수는 씩씩대면서 걸어갔다.
* * *
서현은 연습을 일찍 마치고, 태성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매니저의 차를 타지 않고, 서현은 최 기사의 차를 탔다.
태성이 연습실로 최 기사를 보낸 덕분에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다.
마치 5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 기사님은 진짜 여전하시네요.”
“작은 사모님은 더 예뻐지셨어요.”
“최 기사님도 참….”
“잘 돌아오셨습니다. 잘 돌아오셨어요.”
“감사해요.”
“작은 사모님 그렇게 가시고, 부회장님 정말… 옆에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본인을 혹사시키시면서 일을 하시는데… 덕분에 김 기사도 저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죄송해요.”
“죄송은요. 다시 떠나지나 마세요.”
“네….”
어느새 태성의 집 앞에 도착한 서현은 차에서 내려 그의 집 대문을 바라봤다.